과거 우동과 라면은 젓가락으로 집으면 뚝 끊어지거나 씹는 맛이 푸석푸석했다.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젓가락에서 미끄러질 만큼 탱탱함을 자랑한다. 부드럽고 텁텁했던 도넛은 찹쌀떡처럼 쫄깃쫄깃한 구슬 8개가 이어진 팔찌로 태어났다. 지름이 1.5cm나 되는 두꺼운 빨대로 음료(버블 티)와 함께 들이마시는 탱글탱글한 구슬 젤리는 치아로 깨물기 전에는 절대 터지지 않는다. 빨대 끝으로 누르면 오히려 튕겨나간다. 다진 고기와 야채를 감싸는 만두피도, 갖가지 고명을 넣어 먹는 떡쌈도 일부러 젓가락으로 벌리기 전에는 찢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하다. 콘을 거꾸로 들거나 공중에서 휘둘러도 절대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 끈적끈적한 아이스크림도 있다. 비결은 카사바(Manihot esculenta)의 전분인 타피오카다.
남미 고구마’ 쫄깃한 비결은 아밀로펙틴
카사바는 풍부한 탄수화물이 들어 있는 열대작물로 연간 1억 6300만t이 생산된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 8억 인구가 주식으로 이용한다. 원래 고향은 브라질의 아마존 유역이며 덩이뿌리가 굵은 고구마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남미 고구마’라는 별명이 있다. 카사바 줄기는 위를 향해 길쭉길쭉하게 자라(1.5~3m) 가지는 많이 갈라지지 않는다.
덩이뿌리는 약 10개가 땅속에서 퍼져 자란다. 하나당 길이가 30~40cm, 지름이 약 20cm다. 껍질은 갈색이며 안쪽은 노란빛이 도는 흰색이다. 덩이뿌리에 타피오카(20∼25%)가 들었고 칼슘과 비타민 B와 비타민 C도 풍부하다. 끼니를 때우기에 충분하다는 얘기다.
나이지리아, 잠비아 같은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태국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예로부터 카사바의 덩이뿌리를 감자처럼 쪄서 밥으로 먹었다. 칼로리가 낮고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해 최근 국내에서도 다이어트 영양식으로 뜨고 있다.
카사바 덩이뿌리는 껍질을 벗겨 곱게 빻아 물에 넣으면 건더기가 가라앉는다. 건더기를 건져내 말리면 타피오카가 된다. 건더기가 마르기 전에 베로 짠 주머니에 넣어 흔들면 크기가 3~5mm인 알갱이가 생긴다. 알갱이들을 뜨겁게 데운 철판에 넣고 잘 섞으면 표면이 풀처럼 변하면서 반투명한 ‘진주’가 된다. 버블 티나 빙수, 요거트에 넣는 타피오카 펄이다. 스파게티나 도넛을 만드는 밀가루의 25%를, 빵을 만드는 밀가루의 20%를 타피오카로 대체하면 좀 더 부드럽고 탱탱한 식감을 살릴 수 있다.
타피오카로 만든 먹을거리가 옥수수나 감자, 밀의 전분으로 만든 것에 비해 더 쫄깃쫄깃한 이유는 무엇일까. 타피오카가 다른 전분에 비해 ‘호화’가 빠르고 ‘노화’가 더디기 때문이다. 전분을 물에 넣고 가열하면 물을 흡수해 반투명해지면서 걸쭉하게 변한다(호화). 전분은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는데, 아밀로오스는 엉기는 성질이 있고 아밀로펙틴은 끈끈한 성질을 낸다. 호화된 전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노화). 아밀로펙틴은 아밀로오스보다 노화가 더디기 때문에 아밀로펙틴이 많을수록 호화 상태를 오래 유지해 쫄깃함이 오래간다. 타피오카는 약 83%가 아밀로펙틴이다. 옥수수 전분(72%)과 밀 전분(74%), 쌀 전분(75%), 감자 전분(80%)에 비해 아밀로펙틴이 많다.
아밀로펙틴이 얼마나 느슨하게 채워져 있는가도 쫄깃함과 관련이 있다. 아밀로펙틴의 밀도(단위는g/mol/nm)는 옥수수가 약 16, 밀이 11, 쌀이 14, 타피오카가 10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카사바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IDB의 백창훈 사장은 “아밀로펙틴의 구조가 느슨할수록 호화 과정에서 물이 전분 안으로 쉽게 침투해 입자가 잘 부푼다”고 설명했다. 물을 잘 흡수해 호화가 잘 된다는 뜻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카사바 만든다
전문가들은 “카사바를 개량하면 세계적인 식량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카사바는 줄기나 뿌리를 아무렇게나 잘라 땅에 꽂기만 해도 뿌리를 내리고, 6개월 정도 지나면 고구마처럼 길고 두툼한 덩이뿌리들을 만든다. 언제나 어디서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잘 자란다. 열대와 아열대지방, 저지대나 고지대(해발 2000m), 강우량이 적거나 많은 지역 어디서나 잘 적응한다.
여기에 카사바를 개량하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미국과 스페인에서는 이미 일반 카사바보다 베타카로틴이 30배 이상 많아 적은 양으로도 일일권장량을 넘는 카사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스트레스 저항성 고구마를 개발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환경바이오연구센터 곽상수 박사가 개발하고 있다. 스트레스 저항성고구마는 추운 지역이나 건조한 사막, 염분이 높은 간척지에서도 쑥쑥 자란다. 그는 마찬가지로 척박한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카사바를 연구 중이다. “고구마와 카사바는 식물학적으로 전혀 다른 류의 식물이지만 열대지역에서 기를 수 있고 전분이 풍부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희는 고구마의 항산화물질 생산 유전자를 카사바에 도입해 일반 카사바보다 잘 자라는 신품종 카사바를 개발할 예정입니다.”
곽 박사팀은 IDB와 협약을 맺고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IDB와 곽 박사팀은 고구마에서 분리한 안토시아닌 합성유전자(lbMYB1), 카로티노이드 합성유전자(lbOrange)를 카사바에 도입해, 척박한 땅에서도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잘 자라며 생산량이 풍부한 카사바 품종을 개량할 예정이다.
IDB의 카사바작물연구소는 일반 카사바보다 덩이뿌리가 크고 개수가 많아 전분 생산량이 풍부한 ‘ISC카사바’를 개발했다. 수확이 많고 덩이뿌리의 알이 굵은 카사바를 이용해 육종했다. 2006년부터 3년 동안 재배한 결과 일반 카사바에 비해 생산량이 높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일반 카사바는 줄기가 1개씩 자라지만, ISC카바는 줄기가 5~15개 나고 사방으로 가지를 여러 개 치면서 자란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대신 옆으로 넓게 퍼져 성장이 빠르고 수확량이 많다. 일반 카사바는 덩이뿌리가 10~15개 맺히고, ISC카사바는 덩이뿌리가25개까지 생긴다. 또 일반 카사바의 뿌리는 약 50cm, 약 3.4kg인 데 비해 ISC카사바의 뿌리는 약 4.5m, 약 48.9kg나 된다.
사막화 막고, 친환경 바이오에탄올 만들고
IDB 백창훈 사장은 “카사바를 대량으로 재배하면 사막화를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식용으로 쓰고 남은 부분을 모아 재활용 물품을 만들거나 친환경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카사바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카사바 바이오플라스틱은 줄기의 거친 부분에서 탄수화물을 채취해 만든다. 탄수화물을 잘게 분해한 포도당을 발효시켜 젖산을 얻은 다음, 중합과정을 거치면 생화학적으로 미생물이 180일 이내에 분해할 수 있는 바이오플라스틱이 탄생한다. 아직까지는 재질이 단단하지 못하고 가격이 비싸다는 한계가 있다.
밀과 옥수수처럼 카사바에서도 친환경에너지원인 바이오에탄올을 얻을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은 물론, 단단하고 질긴 셀룰로오스도 활용한다. 이것을 발효시키고 증류시키면 순수한 에탄올이 생긴다.
미국 농업연구청(ARS)에서는 2008년 8월, 밀이나 옥수수에 비해 카사바나 고구마 같은 덩이뿌리 작물이 바이오에탄올 생산에 필요한 탄수화물을 2~3배나 더 많이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백 사장은 “ISC카사바는 매년 1만m2당 바이오에탄올을 100~150t 가량 생산한다”며 “이는 같은 면적에서 일반 카사바보다 3~5배나 높은 수준”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좀 더 효율적인 산업용 카사바를 개발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미국 도날드 댄포드 식물학센터의 리처드 세이어 박사팀은 카사바에서 바이오연료를 얻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일본의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도요타 바이오’를 설립하고 일찌감치 고효율 산업용 카사바 연구를 시작했다. 10여 년 전부터 매년 25만t의 카사바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비식용 바이오에너지 전문기업인 MH에탄올이 캄보디아 정부와 2000만 달러 상당의 타피오카 독점 공급 계약을 체결해 2008년 7월 말부터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하고 있다. 또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카사바의 전분 조절 시스템을 연구하면서 전분 합성과 관련된 유전자를 분리하는 데 성공해 아밀로오스 함량이 50%나 많은 카사바를 만들었다. 전분이 많으면 타피오카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바이오에탄올 생산량도 증가한다.
‘입을 즐겁게 하는’ 쫄깃쫄깃한 카사바가 식량위기를 해결하고 친환경에너지원으로 다시 태어날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