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블이 팽창우주를 발견한 윌슨산 천문대, 헤일망원경과 슈미트 망원경을 갖추고 영원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팔로마천문대, 매년 1백50만명의 방문객이 다녀간다는 그리피스 천문대, 키트피크산 능선을 따라 십수개의 돔이 위용을 자랑하는 국립광학천문대는 세계 천문학사를 이끌어온 주역들이다.
지난 6월22일부터 7월1일까지 미국 서부의 주요 천문대들을 견학하는 '천문학 여행'을 다녀왔다. 천문학자라고는 하지만 이론 분야가 전공이어서 큰 천문대를 다녀 본 경험이 전혀 없던 필자에게 이번 여행은 차라리 충격이었다. 이번에 방문했던 천문대들을 인근 관광지와 묶어 여행코스를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적어도 과학기술계나 교육계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은 곳들이다.
(1) 윌슨산 천문대(Mount Wilson Observatory)
- 허블, 팽창우주 발견
6월 23일 우리는 먼저 LA 바로 북쪽에 있는 윌슨산 천문대를 방문하였다. 이 천문대는 1920년대 후반 허블(Hubble)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유서 깊은 곳이다.
천문학자 헤일(Hale, 1868-1938)은 금세기 초반 시카고의 경제인 여키스(Yerkes, 1837-1905)를 설득하여 지름 1m의 망원경을 소장한 여키스 천문대를 1897년(헤일이 29세가 되던 해)에 세운 후, 이에 자신을 얻어 1904년 다시 윌슨산 천문대를 출범시킨다. 그 후 카네기 재단(Carnegie Institute)의 도움으로 마침내 1917년 지름 2.5m(1백인치)의 대형 망원경을 윌슨산 천문대에 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 세계 최대의 크기로 천문학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윌슨산 천문대의 2.5m 망원경은 아직 거대하고 거무튀튀한 1910년대 기계들에 의해서 가동될 수 있지만, 50년대 이후 현대 장비를 많이 보강하였다. 러셀 기술원이 우리를 위하여 거대한 돔을 회전시켜 주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소음이 작았다.
돔 내부에는 정리되지 않은 많은 망원경 부속, 보조 장비, 연구물품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팽개쳐진 사물함에조차 허블이나 바데(Baade)와 같은 유명한 천문학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올해 9월 1.8m 망원경을 가동하기 시작할 우리에게 1910년대 만들어진 2.5m 망원경이 시사하는 바는 정말 컸다. 우리는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다. 우주는 미래를 내다보는 판단과 꾸준한 투자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만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이지, 방정식 몇 개로 종이나 컴퓨터에서 풀리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슨산 천문대에는 초창기 스노(Snow) 부인의 기부를 받아 만들어진 태양탑 망원경과 1.5m 망원경도 있다. 하지만 한 때 문을 닫았다는 소문까지 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흔적을 말해 주는 듯 직원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주말에는 역사의 현장을 완전공개하고 허블의 혼이 담긴 방문자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내부에는 윌슨산 천문대의 모형, 역사적인 사진, 천체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클라크(Clark)라는 한 기술원이 집념을 가지고 우리 소백산에 있는 망원경과 똑같은 크기의 자동망원경을 이용하여 미국의 학생들은 물론 전세계 회원들이 사용하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었던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일본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막 관측을 마친 결과가 나와 있었다.
(2) 팔로마 전문대(Palomar Observatory)
- 영원한(?) 세계 최대
국민학교 때 자연시험 문제가 기억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천체망원경은 미국( ) 천문대에 있는 지름( )m 망원경이다." 당시 이 문제의 정답은 각각 '팔로마'와 '5'였다. 그때 사진을 보고 몇 번씩 다시 그림으로 그려 보기도 했던 바로 그 천체망원경을 이제는 천문학자가 되어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방문 전 날 소풍 때 잠 못 이루는 어린이가 되어버렸다.
LA 남쪽에 위치한 팔로마 천문대를 우리가 찾아간 것은 6월 26일이었다. 정문에 도착하자 안내판에 반가운 한글이 눈에 띄었다. 고사리를 꺾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문을 들어서자 온통 고사리 투성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한국 사람들이 천문대를 이렇게 많이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선 기분이 좋았다. 정문에서는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오솔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자 거대한 돔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팔로마 천문대는 헤일의 집념에 의해 태어난 세번째 천문대다. 윌슨산 천문대를 먼저 들른 후 팔로마 천문대를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헤일은 진지한 설득 끝에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1928년 당시 금액으로 6백만 달러에 이르는 기부금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름 5m의 반사경을 가공하는 일이란 전혀 쉽지 않았다. 헤일은 끝내 망원경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헤일 망원경'으로 명명된 5m 망원경은 마침내 1948년 완성된다. 헤일 망원경이 있는 커다란 돔 입구의 중앙에는 헤일의 흉상이 모셔져 있다.
현재 팔로마 천문대는 세계적인 천문학 명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에 속해 있고, 본부는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 있어 산정에는 천문학자들이 거의 없다. 일반 방문객들은 유리벽 바깥에서 망원경의 모습을 보게 되어 있고 전시된 모형을 통하여 그 구조를 이해하게끔 되어 있다.
우리는 미리 연락을 받은 코넬 대학 코르디스(Cordes) 박사의 안내로 망원경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코르디스 박사는 그 날 관측을 담당한 천문학자였다. 헤일망원경에 손을 대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였다. 헤일망원경은 너무 커 광각렌즈를 사용하지 않는 한 그 모습을 한 컷에 담을 수는 없었다. 복도에 걸려 있는 1938년 포터(Porter)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 걸려져 있다.
아리조나 대학 천문학과 3학년 멧캘프(Metcalf) 군이 연구실에 앉아 코르디스 박사가 관측한 결과를 처리하고 있었다. 비록 아르바이트이긴 하지만 이미 학부 때부터 이처럼 유명한 천문대에 와서 직접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의 모습을 보니 우리 천문학교육에 대하여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방문자 센터에는 여러 가지 천문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팔로마 천문대에는 헤일 망원경 말고도 다른 장비들이 있는데, 유명한 슈메이커-레비(Shoemaker-Levy) 혜성도 바로 이곳 슈미트 망원경에 의해 발견되었다.
(3) 그리피스 전문대(Griffith Observatory)
- 시민의 천문대
그리피스 천문대는 미국 LA 시내 한복판에 있는 그리피스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매년 1백50만의 방문객이 다녀가고 있는데 이는 그랜드 캐년 방문객의 절반에 해당한다. 할리우드 산 남쪽 산정에 있어 유명한 입간판 'HOLLYWOOD'가 보이고, LA 시내가 잘 내려다 보여 특히 야경이 유명하다.
이 천문대는 그리피스 대령(1852-1919)의 기증으로 1935년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중앙에는 플라네타리움이 있는 커다란 돔이 있고, 양 옆에 천체망원경을 위한 두개의 작은 돔이 있다. 하계에는 평일 12시 반에 문을 여는 데, 플라네타리움은 하루 3번씩 상영된다. 6월 27일 12시쯤 입장하여 안을 둘러보았다. 내부에는 허블망원경을 비롯하여 많은 전시물들이 세련되게 자리 잡고 있다. 맑은 날 공개되는 오른쪽 돔의 망원경은 생각보다 큰 지름 30㎝ 짜리였다.
그리피스 천문대는 LA 시민과 함께 하는 '시민의 천문대'이기도 하다. 우리의 안내를 맡았던 중국계 미스터 소(So)는 LA시에 속하는 공무원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자치 선거에서 시민이나 도민의 천문대를 세우겠다고 공약하는 후보가 나오면 어떨까 한번 생각해 보았다. 예를 들어 광주 시장 후보가 "우리도 무등산에 천문대를 세웁시다"하면 안 되느냐 말이다. 작년 슈메이커-레비 혜성이 목성과 충돌할 때 이곳에는 무려 5만에 가까운 인파가 모여 들었다고 한다. 우리 국민은 그때 어디로 갔었나 생각해 보았다.
그리피스 천문대는 유명한 영화 '이유없는 반항'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주연이었던 제임스 딘의 흉상이 광장의 한 구석에 놓여 있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천문대 광장 중앙에 있는 탑 주위에는 근대 천문학을 이끈 6명의 천문학자, 즉 코페르니쿠스 히파르코스 허셸 뉴턴 케플러 갈릴레이의 동상이 뺑 둘러 세워져 있었고, 탑 꼭대기에는 천구가 놓여 있었다. 탑 뒤에 놓여 있는 해시계가 정확히 그 때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나갈 때쯤 노란색 학교버스 4대에서 유치원 어린이들이 재잘대며 내리고 있었다.
(4) 국립 광학 전문대(NOAO, National Optical Astronomy Observatory)
다양한 돔 전시장
NOAO는 아리조나주 투손 근처 인디언 구역 내의 키트 피크(Kitt Peak) 산 정상에 있다. 거기에 자리를 잡은 까닭은 물론 비가 안 오는 사막지역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들은 1950년대 인디언 추장에게 소형 천체망원경으로 달을 보여 주고 그 땅을 거저 얻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주는 미국 천문학자들의 관점은 우스개 소리라기 보다는 순수한 연구를 한다면 재산도 성큼 내놓는 인디언 추장의 결정을 존중하는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6월 28일 우리는 NOAO로 향했다. 투손에서 서쪽으로 곧게 뻗은 86번 도로를 달려 천문대 입구 지점에 이르니 NOAO의 4m 망원경 돔이 멀리 산 위에 조그맣게 보였다. 산길을 오르자 마침내 18층 건물 높이의 웅장한 모습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산에서 15년째 일하는 빈커트 기술원의 안내를 받아 돔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 본 필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보이는 돔의 개수가 열대 여섯개는 족히 넘었다. 물론 그 안에는 모두 지름이 2m 가량되는 망원경들이 있는 것이다. 그 중 태양망원경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어 널리 알려져 있다. 빈커트에게 "돔이 전부 몇 개냐"고 묻자 "최근에는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답한다. 계속 세우고 부수고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지름 1.3m 짜리들을 '작다고' 철거하는 중이었다.
커다란 방문자 센터는 방문자를 위한 돔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천문상품은 물론 인디언들의 상품도 많이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 이채로웠다. 점원도 인디언 처녀였다. 놀라운 사실은 1달러짜리 지폐와 동전이 가득 든 헌금통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사막이지만 여름이 되면 지형성 소나기가 내려 6주 정도 문을 닫는다고 한다. 필자도 몰려오는 소나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실로 장관이었다. 천문대 식당은 일반 식당과 전혀 다를 바 없을 만큼 메뉴가 좋았다. 소백산에서 찬 없는 밥을 먹는 우리 직원들이 생각났다. 짐을 푼 개인숙소 또한 고급 모텔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책상에서는 연구도 잘 될 것 같았다.
그날 밤 4m 돔 아래에서 아름다운 저녁놀을 지켜보며 서너 시간을 한국 천문학의 한심한 현주소를 생각하며 보냈다. 천문학자 헤일의 위대함도 되새겨 보았다. 밤이 되자 평생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은하수가 떠올랐다. 목성이 정말 주먹만하게 보였다. 얼마 전 한국에서 목성이 달에 접근한다고 뉴스를 내보냈다가, 대도시에서 전혀 안 보인다고 항의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분명히 6등성까지 보이는 밤하늘이었다.
멀리 동쪽에 투손시의 불빛이 보였지만 어두웠다. 온 시민들이 NOAO를 돕기 위하여 어두운 나트륨 가로등을 쓰고 전등에 갓을 씌운 결과다. 착륙하려는 밤 비행기들만이 어렸을 때 본 반딧불처럼 이리저리 상공을 날고 있었다. 보현산 천문대 주위의 우리 국민들도 잘 협조해 줄지 걱정이 되었다.
다음날인 6월 29일 투손 시내 아리조나대 옆에 있는 NOAO 본부에 들린 우리는 또 한번 놀랐다. 그곳은 거대한 공장이었다. 부대장 그린(Green) 박사 안내로 둘러보니, 천문학자는 물론 망원경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10명,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는 사람들이 10명, 도면대로 부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10명, 전자공학 기술원들이 30여명,… 이런 식으로 모두 4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커다란 건물들 안에서 일하고 있었다. 모두 80여명에 불과한 우리 천문대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음은 물론 우리는 평생 이렇게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마저 들었다. 특히 여행 중 미국 방송을 통해 들은 삼풍백화점 뉴스는 더욱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었다.
조상을 뵐 낯이 없다
우리나라 천문기관은 첨성대 서운관 관상감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국가를 대표하는 독립된 천문대가 없는 시대는 일제침략기와 지금이다. 천문학자로서 조상을 뵐 낯이 없을 뿐이다. 현재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부설 천문대'를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천문대'로 독립시켜 달라는 천문학자들의 주장이 '이유없는 반항'으로만 해석되는 과학기술계의 현실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우리 민족은 우주와 하늘의 섭리를 이해하고 따르려는 선비 정신을 간직한 '우주 민족' '하늘 겨레'다. 우리나라 태극기가 어떤 국기인가. 유일하게 우주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는 국기가 아닌가.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이 이겼다고 신이 나서 휘두르는 국기가 '우주론'인 것이다.
왜 우리 민족은 조그만 주택을 짓든 빌딩을 짓든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낼까 생각해 보자. 비가 안 온다고 장관이 돼지머리에 절을 하는 장면이 TV에 왜 나오는가. 우리 민족이 미개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뿌리 깊은 우리 민족의 제천행사가 남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은 하늘에 빌지 않으면 마음의 한구석이 허전하여 못 견디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가장 무서워 하는 벌도 바로 천벌 아닌가.
세종대왕은 장영실 등으로 하여금 칠정산과 같은 독자적인 천문역법을 완성시켜, 중국을 통하여 입수된 천문학을 가지고는 우리나라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현상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던 폐해를 시정했다. 그 결과 '하늘이 내린' 제왕의 권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현재의 우리나라 성인들은 천문학, 나아가 과학에 관심이 없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인구 1천만의 수도 서울을 담당한 서울 과학관.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70년대 중반이나 지금이나 전시물이 그대로다. 이는 서울시의 책임도, 과기처의 책임도, 교육부의 책임도 아니다. 서울 시민 모두의 책임이다. 근본적으로 서울 시민들이 과학이나 과학문화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솔직히 이 글을 읽어 줄 정치가나 경제인이 과연 있기나 할지 의심스럽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천문학의 발전은 범국민적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 대덕연구단지 안에 있는 천문대 본대나 보현산천문대 주위에 천문 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하는 대기업이 있다면, 그 기업은 무엇보다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수적으로 홍보 효과도 클 것이다. 하지만 별을 보는 일에는 어느 대기업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키트 피크 산정을 쾌척한 인디언 추장과 같은 사람은 과연 우리나라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