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1 애플에서 매킨토시로 좁스의 비전과 제록스의 아이디어

애플의 역사는 개인용컴퓨터(PC)의 역사와 같다. PC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애플은 1981년 IBM PC의 등장으로 왕좌의 자리를 빼앗겼으나, 1984년 '매킨토시'를 개발해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개인용 컴퓨터들은 사업기획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애플은 꿈으로 시작했다. 그 꿈은 사업가 학생 교육자 그리고 개발자 등, 모든 애플 공동체(Apple community)를 묶는 것이다. 그 꿈은 모든 언어 장벽과 문화의 경계 그리고 국경을 뛰어 넘는다. 그 꿈은 십여년 전보다 오늘날 더욱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한사람에 하나의 컴퓨터를'(One person, one computer)이라는 비전은 언제나 애플의 정신이 되어 줄 것이다." 현재 애플사 회장으로 있는 존 스컬리의 말이다.

애플.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이름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가히 전설적이다. 그들은 언제나 화제거리였고, 뉴스와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온화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애플신화를 창조해낸 두 젊은이 스티브 좁스와 스테판 워즈니액. 그러나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한 두 젊은이는 이들이 최초는 아니다. 휴렛과 팩커드는 1938년 팔로알토의 한 차고에서 휴렛팩커드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휴렛팩커드는 현재 굴지의 컴퓨터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반세기를 넘긴 이들의 역사는 애플만큼 화려하지도 전설적이지도 않다.

폭스바겐과 전자계산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의 '컴'자도 구경못하던 시절, 1950~60년대에 컴퓨터는 방 하나 크기만했고, 수십개씩 돌아가는 테이프와 전선 그리고 번쩍이는 전구들로 가득차 있었다. 좁스와 워즈니액은 학생시절부터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선사했듯이 컴퓨터의 무궁무진한 능력을 대중들에게 선사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고, 이윽고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26세의 워즈니액은 장난삼아 애플Ⅰ를 만들었다. 그보다 나이가 어렸던(21세) 좁스는 먼저 워즈니액에게 조립한 애플Ⅰ의 회로를 팔자고 제안했다. 애플사의 서막은 바이트컴퓨터 상점이 50대의 애플Ⅰ를 산 것을 계기로 시작된다.

회사를 세우기 위해 좁스는 자신의 폭스바겐을 팔았고, 워즈니액은 공학도에게 필수적인 휴렛팩커드의 프로그래머블 전자계산기를 팔아야 했다.

'한사람에게 하나의 컴퓨터를'이라는 표어는 15년전보다 지금이 더 현실적이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컴퓨터의 능력을 활용하고 있다. 컴퓨터는 누구나 가지고 사용할 수 있도록 더 값싸고 가볍고 작아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 광들은 몇시간이고 부품을 땜질해야 했고 며칠이고 부품상을 찾아 헤매야 했다. 그리고 회로상의 문제와 부품에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몇달을 투자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달에 한번씩 대륙을 가로질러 컴퓨터 클럽 미팅이 있을 때 자랑스럽게 자신이 만든 마법의 상자를 전시하곤 했다. 워즈니액도 이들중 한사람이었다.

20달러에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샀을때, 그는 앉은 자리에서 그 주위에 들어갈 회로를 디자인했다. 그리고 이것을 홈브류 컴퓨터 클럽에 가져가서 내보였다. 그후 워즈니액은 여기에 기능들을 추가해 나갔다. 좁스가 찾아온 것은 이로부터 한달도 채 안되어서였다. "이봐, 자네는 컴퓨터 회로를 클럽에서 나누어 주고 있는데, 누구나 그것들을 만들기 원할거야. 왜 그것을 우리가 만들어 그들의 수고를 덜려고 하지 않지?" 워즈니액은 이들 보다가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우리는 돈을 날릴지 몰라. 하지만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우리의 회사를 가질 수 있을거야."
 

매킨토시 이전의 애플컴퓨터. 좌로부터 애플Ⅰ, 애플Ⅱ, 리사


한장의 보드로 만든 컴퓨터

이렇게 해서 워즈니액과 좁스는 사업을 시작했고 차고에서 만들어진 애플Ⅰ(그때 6백66달러)은 크게 히트했다. 많은 컴퓨터 광들이 애플Ⅰ를 사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컴퓨터 광들은 스태틱(static)메모리를 사용하는데 반해 워즈니액은 다이나믹(dynamic)메모리를 사용했으므로 값싸고 신뢰성이 있었다. 그리고 전력을 적게 소모하고 더 많은 메모리를 사용했다.

사업이 번창하자 좁스는 그와 워즈니액을 위해 새로운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은 사업을 이끌어 나가기에 너무 젊었다. 인텔의 영업담당이었던 마이크 마크쿨리가 들어와 경영을 맡고, 좁스와 워즈니액은 새로운 상품개발에만 전념했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컴퓨터가 이름하여 애플Ⅱ.
애플Ⅱ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장의 보드에 많은 부품을 넣었다. 그러나 애플Ⅰ과는 달리 당시 찾아볼 수 없었던 많은 메모리와 그래픽, 사운드, 내장 베이직 인터프리터와 표준 타자 자판을 사용했다. 이것은 일반 사용자들을 배려한 것이었다. 포장도 아주 독특했다. 다른 컴퓨터가 무겁고 둔탁한 것에 비해 얇고 색깔이 입혀진 플라스틱 케이스는 사용자들의 시선을 끌만했다.

좁스와 워즈니액의 유일한 논쟁은 슬롯(slot)이었다. 워즈니액은 여덟개를 원했고 좁스는 두개를 원했다. 그래서 협상을 했는데, 워즈니액은 슬롯이 여덟개가 아니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결국 워즈니액은 원하는 슬롯을 얻었고, 좁스는 원하는 컴퓨터를 얻었다.

1977년 6월 4KB 표준 메모리에 두개의 게임 패들(paddle)과 데모 카세트를 포함한 애플Ⅱ가 1천2백98달러에 팔렸다. 모니터는 TV를 사용하고 외부 기억장치로는 오디오 카세트를 사용했다.

애플 컴퓨터는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첫째로는 컴퓨터 그래픽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컴퓨터는 텍스트 방식으로만 동작했다. 게임조차도 텍스트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애플 컴퓨터는 최초로 컬러를 지원하는 고해상도 그래픽 모드를 첨가해서 게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하게 했다. 이 그래픽 모드를 사용한 프로그램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는 기법들이 향상되었다. 둘째로는 사운드기능이다. 아주 미약하기는 해도 스피커를 연결해서 음을 발생시켰다.

셋째로는 디스크 드라이버 같은 대량 기억장치를 도입했다. 이전까지는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해서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저장했는데 이 장치는 읽고 쓰고 찾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디스크 Ⅱ는 1백KB가 넘는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기억시킬 수 있고 읽고 쓰는 시간도 절약되었다. 넷째로는 슬롯을 사용해 많은 주변 장치를 추가할 수 있어서 성능 확장이 간편했다. 8개의 슬롯에는 각종 카드들을 넣어서 음악기능과 그래픽용 디지타이저, 램카드, 비디오 카드, CP/M카드 등의 기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국내에는 1980년 애플 컴퓨터가 들어오기 시작해서 1985년 무렵 절정기를 맞이했다.
 

애플신화의 세주역. 왼쪽으로부터 스테판 워즈니액, 스티브 좁스, 존 스컬리


IBM에 왕좌를 빼앗기다

1981년 드디어 IBM PC가 등장했다. 애플사는 이를 환영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발표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16비트 칩으로 무장한 IBM 제품들은 순식간에 컴퓨터업계를 장악했다. 특히 강력한 계산 속도로 기업체에 빠르게 확산됐다. IBM PC의 등장은 컴퓨터 업계에 커다란 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도스(DOS, Disk Operating System)라고 이름붙여진 새로운 운영체제를 사용했다. IBM PC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리고 이 운영체제는 곧 16비트 컴퓨터의 표준이 되었다.

그리고 IBM PC는 미국 정부와 세계 각국의 표준 모델로 지정되었으며, 거의 모든 업체에서 IBM PC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애플시절부터 있었던 워드스타 등 워드프로세서와 비지칼크같은 스프레드시트 그리고 디베이스같은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들에 힘입은 결과이기도 했다. 실험실에도, 학교 교실에도, 가정에도 IBM이 들어앉게 되었다. 바야흐로 세계는 IBM PC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애플을 파는 컴퓨터 가게는 문을 닫거나 IBM PC를 팔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애플의 몰락을 예상했다. 애플의 잡지와 유저그룹들이 차례차례로 문을 닫고 많은 사람이 다른 직종으로 이직했다.

1983년 1월, 애플은 리자를 내놓았다. 이것은 후일에 나올 매킨토시의 초기 타입이었고, 꿈의 시작이었다. 매킨토시는 좁스의 새로운 비전이었고, 그는 컴퓨터가 50년대와 60년대의 대중 교통수단이었던 폭스바겐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애플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창조적인 작업으로 리자를 만들어 냈지만 리자는 또한 1970년대 제록스사 팔로알토연구소의 연구결과이기도 했다.

실패로 끝난 「리사」

사실 매킨토시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VI)는 애플이 최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제록스의 팔로알토연구소에서는 사용자가 쉽게 배울 수 있는 컴퓨터를 개발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들은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를 만들고 있었고, 그곳을 방문한 좁스는 이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제록스는 좁스가 구상했던 비전을 갖고 있지 못했고 따라서 기술 개발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컴퓨터에 관한 많은 개념들이 몇몇 연구소에 묻혀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하드웨어의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대용량의 메모리와 아주 빠른 처리속도가 필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2000년대에야 이런 종류의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대용량 메모리 칩이 개발되고, 빠른 처리속도를 가진 칩들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이러한 개념들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리자는 모토롤라의 이68000라는 16/32비트 CPU를 장착하고, 당시로는 획기적인 1메가바이트(MB)의 램, 16KB의 롬, 두개의 5.52인치 8백60KB 용량의 플로피 디스크와 5MB의 하드디스크, 12인치 흑백 720×364 화소를 가진 디스플레이, 그리고 마우스를 가진 아주 값비싼 기계였다. 이때 대중들에게 선보인 마우스라는 입력장치는 대단한 관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리자는 뛰어난 기능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가격으로 인해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리자는 매우 느렸고 1만달러라는 엄청난 가격표가 붙어있어서 아마도 세일즈맨들이 팔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1만대 판매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예상에 훨씬 못미쳤고, IBM PC와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개인용 컴퓨터시장에서 애플은 IBM에게 왕좌의 자리를 빼앗기게 됐다. 애플은 비즈니스 사회에서 좋게 평가받지 못했고, 경쟁은 예상외로 힘들어졌다. 판매량은 급속히 떨어졌다. 만약 애플Ⅱ의 계속적인 판매가 없었더라면 애플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애플에게는 애플을 사랑하는 많은 애플 유저들이 있었고, 그들이 희망을 불어 넣어주었다.

변화되는 매킨토시 철학

그후 애플사내에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책임질 소그룹이 생겼는데, 이를 위해 매킨토시빌딩이 건설됐다. 여기에서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가까이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으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이곳에는 온종일 신선한 과일주스와 피곤해진 엔지니어들을 위한 마사지 서비스가 제공되며, 긴장을 풀기 위해 피아니스트들을 초청해서 연주회를 갖기도 하면서 공유와 협동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곳은 60년대 히피족이 말하던 니르바나(Nirvana, 열반의 세계였다. 풀 수 없을 것같이 보이는 문제들이 매킨토시 그룹안의 건전한 경쟁으로 풀려나갔고, 독특한 해답을 찾기 위해 경쟁은 장려되었다.

리자 프로젝트는 원래 좁스가 이끌어 가기를 원했는데, 개인적인 의견 대립과 관리의 부실로 원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좁스가 직접 지도했고, 모든 사람이 새로운 컴퓨터에 대한 비전과 영감을 갖고 있었다. 좁스는 모든 사람들이 사용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쉽고, 다루기가 편리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사용자에게 친근한 것을 만들려고 했다.

1984년 매킨토시가 드디어 등장했다. 매킨토시를 개발한 팀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이에 알맞는 캠페인을 벌였다. 텔레비젼 광고에 1백50만달러가, 그리고 슈퍼볼에 앞서 벌어진 쇼에도 똑같은 비용이 들어갔다. 초당 2만7천달러의 광고비가 들어간 셈이다. 1월24일 전국에 방영된 텔레비전 광고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광고의 시작은 조지 오웰의 1984년과 같이 사람들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마치 기계처럼 터널 속을 걸어가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대형 화면이 있는 커다란 강당에 멍하니 앉아서 화면속 빅브라더(big brother, 독재자)의 통제를 받고 있을때, 뒤쪽으로부터 여자 육상선수가 해머를 들고 달려오면서 이 해머를 던져 화면을 부숴버린다는 내용이다.

매킨토시 개발자들은 사용자들이 매킨토시의 내부를 알 필요도 없고, 더 추가할 필요도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때문에 초기의 매킨토시 제품은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열 수 없었다. 사실 매킨토시 컴퓨터는 확장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매킨토시의 용량 및 능력을 확장시키라는 사용자들의 요구에 의해 이러한 매킨토시의 철학은 변화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애플사의 생산라인. 공장자동화시스템의 도입으로 26초만에 1대의 매킨토시가 생산된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상원 회장

🎓️ 진로 추천

  • 컴퓨터공학
  • 전자공학
  • 소프트웨어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