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때부터의 연구와 세미나 참여를 통해 분자생물학에서 최근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파악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내가 과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다. 혼자서 방안에 조그마한 실험실을 차려놓고 물고기 개구리 등을 해부 해보기도 하고 라디오 경보기 무전기 등의 부품을 조립해 완성해보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하며 항상 과학자가 되겠다고 떠들고다녔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한국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겪듯이 주위의 권유때문에 법관 의사 정치가등 여러가지 분야에 귀가 솔깃해서 이렇다할 특징없는 세월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심사숙고 끝에 이과를 선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연과학에 대한 애정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의사의 길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다음으로 남은 중요한 선택은 과연 자연과학 중의 무슨 과목을 선택하느냐에 관한 문제였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1980년대 초기부터 선풍적으로 일어났던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 내지는 생명과학(life science) 연구 붐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외할아버지의 별세로 캐나다에서 일시 귀국 하신 막내이모부의 영향도 막대했다.
이모부는 캐나다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하시다가 분자생물학의 마력에 이끌려 분자생물학 연구로 관심분야를 바꾼 분이었다. 이모부는 당시 한국의 기초과학 및 연구환경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내게 인식시켜 주셨고, 특히 한국의 분자생물학 연구가 얼마나 미약한지도 설명하셨다. 또한 영리만을 목적으로하는 산업으로서의 유전공학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생명현상의 신비 규명에 목적을 둔 분자생물학에 관심을 둘 것을 권유하셨다. 덧붙여 당신이 나이가 들어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언어습득에 고생한 점, 새로운 문화로의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점 등을 들어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일찍 자연과학선진국으로 유학갈 것을 적극 권하셨다. 그래서 필자는 분자생물학을 공부하겠다는 것과 유학을 가겠다는 것을 거의 동시에 결심하게 됐으며, 그후 분자생물학에 대한 정열이 하루도 식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유학보내는 것을 망설였던 부모님께서도 곧 내 뜻에 적극 협조해 주셔서 나는 그 당시 가까운 친척은 별로 없었으나 자연과학이 가장 발달한 미국으로 유학갈 것을 결심하게 됐다.
연구와 수업 병행
내가 학부과정때 몸담았던 대학은 UCSD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였다. 이 대학은 한국에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지만 UC. Berkeley와 함께 캘리포니아주의 주립대학중 하나이며 이공계에 있어서는 혜성같이 떠오르고 있는 신흥명문중의 하나다. 1987년에 노벨의학상을 받은 일본인 분자생물학자 도네가와 스스무 박사도 바로 UCSD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캠퍼스 부근에는 솔크 연구소(Salk Institute), 스크립스 클리닉 연구소(Research Institute of Scripps Clinic)등 세계적인 분자생물학연구소 및 생명공학연구소와 유전공학연구소들이 즐비해 샌디에고는 베이 지역 (UC. Berkeley UC. San Francisco, 스탠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발달한 샌프란시스코 근교지역), 뉴잉글랜드 지역(MIT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등 전통적인 동부명문대학을 중심으로한 지역)등과 함께 미국내 분자생물학의 3대 메카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UCSD와 토리파인스가라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는 솔크 연구소는 소아마비백신을 발명한 미국의학계의 거성 솔크(J. Salk)박사가 미국정부의 지원으로 설립한 연구소로서 노벨상 수상자가 4명이나 있어 단일연구소로는 세계최다수의 노벨상수상자를 보유하고 있다.
나는 이 곳에서 웅비를 꿈꾸었다. 사람들은 '미국은 기회의 나라'라고들 말했다. 나역시 그말을 신조로 삼고 매일같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기회가 다가서기만하면 포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보다 더 많은 과목을 택하며 더 열심히 공부하고 조금 덜 자면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첫해부터 올A학점과 여러과목에서 으뜸의 자리를 획득해 냈고 교수들로부터 받은 칭찬과 격려는 나를 더욱 용기백배하게했다. 처음엔 그렇게 높게만 보이던 언어의 장벽도 하루하루 조금씩 허물어졌다.
교수들 사이에서 가끔 나의 이름이 거론돼서였던지 화학과의 교수 한분이 나를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로 고용할 결정을 했다. 어느날 나는 화학과의 윌슨이라는 교수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며 그날밤 교수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다. "곽군, 나는 수용액상태에서의 화학반응의 본질을 컴퓨터모의실험(computer simulation)을 통해서 연구하는 사람이요. 생체내에서의 모든 화학반응도 수용액상태에서 일어나는만큼 앞으로 단백질, 핵산 등 생명체의 분자(biological molecule) 화학반응도 연구할 예정으로 있소. 어때, 같이 연구해보지 않겠소" 물론, 나의 대답은 "예스!"였다. 그것도 대단히 감사한 마음으로 외친 "예스!"였다. 드디어, 내가 찾고있던 첫번째 기회가 온 것이다. 햇병아리 학부학생에게는 드물게 주어지는 멋진 기회였다.
윌슨교수 연구실에서 나는 과학연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연구시작후 나는 먼저 현대과학은 너무나도 세분화돼 있어서, 예를 들어, 분자생물학이라는 과목 하나 내에도 수없이 많은 연구분야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어느 한 인간이 현대의 분자생물학이라는 분야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연구에 통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한 분야에 있어서 정말로 핵심적인 문제를 포착하여 연구과제로 삼을 수 있는 것만해도 대단한 통찰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첫 시행착오를 수정하게 했다. 나는 학부생활 초기엔 전공인 분자생물학은 물론이고 화학 물리학 수학 등에 관해서도 통달해 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깨달음이 이런 야망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시켰고 좀 더 선택적이고 현명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학부때 전공은 분자생물학과 화학 두가지로 복수전공을 하되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정말 관심을 끄는 분야만 더욱 깊이있게 공부하기로 했다.
윌슨교수 밑에서 1년 반 정도를 연구한 후에도 현재 예일대학의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나는 2개의 분자생물학 실험실을 더 거치며 다양한 연구경험을 쌓아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과목만 택하고 있을때 남보다 더 많은 과목을 택하며 연구실에서 연구도 해나가는 생활이 무척 힘들고 벅찰 때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보람이 더 컸다.
필자에게 주어진 두번째 기회는 UCSD캠퍼스와 솔크 연구소 등 인근의 유수한 연구소에서 열리는 세미나였다. 일주일에도 몇번씩 미국내 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의 과학자들이 초청돼와서 자기 분야의 동향 및 자기연구실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결과를 이야기 해주는 이런 세미나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비롯한 정상급 과학자들이 참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세미나를 통해서는 미처 학술잡지에도 실리지 않은 실험결과나 각 분야의 며칠전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고 토론도 가능하므로 최신지식과 과학자들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다. 학부시절 초기에는 무엇이 좋은 세미나고 무엇이 그저그런 세미나인지를 잘 몰라서 닥치는대로 참석했었다. 너무 전문적인 내용을 얘기할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차차 실력이 쌓여감에 따라 귀가 트이기 시작했고 토론에 참석할 때도 있었다.
「유명인사」를 피하라
이러한 학부때부터의 세미나참여는 오늘날 여기 예일대학 박사 과정에 들어와서도 지도교수와 연구과제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다른 학생들에 비해 필자를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했다. 우선 박사과정때는 지도교수와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지도를 받고 연구방향의 설정 및 수정을 해나가야 하기때문에 노벨상 수상자등 유명교수들을 피하는게 낫다는 지혜를 터득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1년의 반 이상을 방방곡곡의 세미나나 학술회의에 초청돼서 다니므로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쏟을 시간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지도가 덜 필요하고 생산성이 높은 포스트 닥(post doc, 박사학위를 이미 취득한 연구원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위 Big Shot (유명인사)들 보다는 젊고 열성적이며 과학활동이 한창 절정기에 올라, 박사 과정의 학생들에게도 시간을 할애할 용의가 있는 교수들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필자가 몸담고있는 예일대학은 1701년도에 창립돼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중의 하나다. 배출해낸 노벨상 수상자만해도 20여명 되고 현 미국대통령인 조지 부시 등 특출난 동문들도 많다. 예일의 도서관시설은 미국내에서 거의 최고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어 예일에서 찾지못한 문헌은 아마 딴곳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라고 사람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한다. 생물 학과는 Kliner Biology Tower 라는 12층짜리 건물에 약 40여개의 연구실과 걸어서 약 10분 거리인 거대한 의과 대학속에 40여 연구실, 그외에 화학과와 물리학과 건물에도 몇몇 생물학연구실 들을 갖고 있다.
이제 분자생물학에서 미국학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연구활동이 활발한 분야들을 필자 나름대로 선택하여 간단히 언급해 보기로한다. 우선 최근에 이러한 연구분야들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능케한 혁신적인 유전자조작기술(gene manipulation method)을 간단히 설명해야겠다. 첫째로, 1970년대 초 DNA를 자르는 제한효소(restriction enzyme)의 발견(이 공로로 1978년 아버 스미스 나산스 등 노벨의학상수상)과 DNA조각을 연결시켜주는 DNA 리가제효소의 발견으로 유전자를 개별적으로 분리하여 재조합하는 유전자재조합기술(recombinant DNA technology)이 가능해졌다. 이 기술을 바로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이라하며, 오늘날 웬만한 미국의 분자생물학 연구실에서는 항시 사용되고있다. 이 유전자재조합기술이 상업적인 목적을 띄고 인슐린등의 유용한 단백질의 대량생산에 이용될때 유전공학에는 단순한 유전자조작기술이 아닌 공학으로서의 의미가 부여된다.
둘째로, 1970년대 후기에 영국의 프레데릭 생거와 미국의 W. 길버트가 각각 독립적으로 DNA염기서열분석방법(DNA sequencing method)을 개발했다(이 업적으로 그들은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유전자조작기술들의 개발은 그전까지 손도 대지 못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했다.
이러한 기술적인 혁신의 배경을 염두에두고, 분자생물학의 몇개 중요분야에 관해 소개해본다. 첫째로 분자면역학(molecular immunology)이라는 분야가 있다. 여기에 바로 암이나 AIDS에 관한 연구가 포함된다. 암이란 워낙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한 질병이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내에 모든 종류의 암을 정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암은 세포내의 어떤 중요한 조절기능이 고장이 나서 끊임없이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세포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이해가 훨씬 나아지지 않는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인 온코진(oncogene)이 20개이상 발견되었으므로 불과 7~8년전에 비해서도 우리의 암에 관한 이해는 훨씬 심화됐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1986년 말에 클론(clone)된 유전자인 레티노블라스토마(retinoblastoma)는 암유전자의 활동을 억제해주는 것으로 밝혀져서 암치료에 큰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이미 1988년에 생쥐를 이용한 동물모델실험결과 이 레티노블라스토마 유전자가 생쥐의 암조직세포들을 정상화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과학계와 의학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으며, 인간의 암조직 치료에도 곧 응용돼 몇년내에 최소한 몇가지 종류의 암은 치료에 큰 진전을 볼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1990년 8월 미국의 NIH(국립건강연구소)에서 그간 사회적인 논란을 이유로 금지해오던 인간을 대상으로하는 유전자치료법(gene therapy)을 선택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으므로 연구기간이 단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AIDS에 관한 연구는 백신 개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데 돌연변이율이 엄청나게 높은 AIDS바이러스의 껍질단백질(coat protein) 대신에 돌연변이율이 거의 없는 구심단백질(core protein)을 대상으로한 백신개발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유전공학이 가져온 혁명
두번째로 소개하고자하는 분야는 분자발달생물학(molecular develop mental biology)이다. 인간을 생각해보자. 인간은 단 한개의 세포인 수정란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세포하나가 수없이 분열해서 하나의 완성된 인간이 탄생한다. 탄생한 인간은 수천 수만종류의 세포들로 구성돼 있다. 간세포 위세포 뇌세포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면 이렇게 전혀다른 세포들이 어떻게 단 하나의 수정란세포에서 출발했으며 왜 팔은 머리에 붙어있지 않고 왜 다리는 제자리에 붙어있는가. 이 오묘한 생명체의 비밀 속에는 선택적인 유전자의 발현(differential gene expression)이라는 원리가 숨어있다. 즉 모든 세포는 다 똑같은 유전정보(게놈, genome)를 갖고 있지만, 발달조절유전자(developmental regulatory gene)들의 역할로 인해 간세포내에서는 간에 필요한 유전자들만이 발현(expression)이 되고 뇌세포내에서는 뇌세포에 필요한 유전자들만이 발현되도록 조정되며 인간의 신체라는 3차원적인 공간내에 그리고 발달과정의 시간속에서 알맞은 곳에 알맞은 때에 이들 유전자들이 발현되도록 조정된다. 이들 발달조절유전자들은 'homeobox gene sequence'라는 비슷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1984년 윌리엄 맥긴스와 매튜 스콧에 의해 거의 동시에 발표돼 선풍을 일으켰다. 그후 이 homeobox gene sequence를 이용해 수많은 새로운 발달조절유전자들이 발견됐으며, 놀라운 속도로 연구가 진행돼 나가고 있다. 필자는 이 발견후 예일대학의 교수로 와있는 맥긴스의 연구실에 소속돼 이 분야에 관한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호르몬, 성장요소(growth factor), 신경전달물질 (neurotransmitter)을 매개로하여 세포간의 대화(cell-to-cell communication)를 연구하는 분야, 인간두뇌의 기억메커니즘, 의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여러종류의 화학물질이 인간의 두뇌에 영향을 끼치나를 연구하는 신경과학(neuro science)의 연구분야, 그리고 4천여개 이상 알려진 인간의 유전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들을 찾아내 유전 치료를 하는 분야에도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생물학이나 의학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견의 대부분은 생명현상의 이해와 규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선을 향해 돌진한 과학자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다. 페니실린의 발견이 그러했고 분자생물학의 도약과 유전공학으로의 문을 열어준 제한효소의 발견이 그러했다. 애당초부터 무엇을 발견하며 어떻게 응용해서 영리를 얻어야겠다는 계획하에 이루어진 혁신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혁신은 다른 연구를 하다가 우연히 나타난 새로운 생명현상을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파고든 과학자들의 집념의 개가였던 것이다.
한국이 진정한 과학입국을 하기위해서는 정부나 기업이나 '참을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명과학은 지금 워낙 양적 질적인 열세에 놓여있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이 눈앞의 이익만을 보지말고 조건없이 인재양성을 위해 투자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해나갈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젊은 과학자들은 생명 현상의 연구라는 보이지않는 전선에 뛰어들어 물론 때로는 실패도 하여 정부와 기업을 실망시킬테지만 때로는 금광을 발견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이상론이 아니다. 지금까지 과학선진국에서는 그렇게 해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해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투자와 지원을 해야하지 않을까.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때의 투자와 의욕으로 과학을 지원해 준다면 한국의 과학은 일취월장하여 멀지않은 세월내에 세계수준에 접근할 것이다. 88의 영광도 지나갔고 금메달의 영광도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가져올 영광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한국의 정부와 기업들은 우리의 젊은 인재들을 두둑한 노자와 성원하는 마음으로 자연과학의 미개척지인 보이지않는 전선으로 보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