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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중부하면 흔히 아스테카문명 하나만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테오티우아칸 톨테카 아스테카가 모두 독특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나우아문명은 A.D.800년부터 1600년대 초엽까지 현 멕시코시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중부의 광활한 지역에 발달했던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 톨테카(Tolteca) 및 아스테카(Azteca)문명을 총칭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들 문명이 아스테카문명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아스테카가 스페인이 침략했던 1492년 당시까지도 방대한 지역에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세개의 부족들을 통틀어 나우아족이라고 한다. 이들은 같은 지방에서 같은 핏줄을 타고 난 부족들이었다.

나우아족은 당초 지금의 미국 서남부지방에 거주했으나 여러 부족들이 우에만(Hueman)이라는 제사장의 인도하에 지금의 멕시코 쪽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톨테카족은 멕시코의 툴라(Tula)란 곳에 정착하고 또 일부족은 테오티우 칸(현재의 멕시코시에서 30㎞ 떨어져 있다)에 자리를 잡았고 아스테카부족은 지금의 멕시코시 근방에 정착했다.

해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에 건립된 역사상 최초의 도시다. 이 도시는 신전과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인 신전 및 제단을 꼽으면 피라미데 델 솔(Pirámide del Sol, 해 피라미드), 피라미데 데라루나(Pirámide de la luna, 달 피라미드), 템플로 데 켓살코아 틀(Templo de Quetz alcoátl, 켓살코아틀사원) 및 템플로 데라아그리쿨투라(Templo de la Agricultura, 농업신사원) 등이 있다. 궁전에는 승려와 귀족들이 거주하고 도시외곽에는 농업 어업 수렵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나무 진흙 목초 등으로 지은 집에서 살았다.

해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는 그 크기가 이집트의 것보다 크나 높이가 2m 가량 낮을 정도다. 다만 이집트의 것은 묘인데 반해 멕시코 전역에 발달한 피라미드들은 제단이라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이곳 피라미드의 내부에는 통로는 있으나 결코 묘소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제단에서^테오티우아칸 신시의 재단. 내부에 있는 신이 거주하는 거실의 조각품들이 유명하다.


신정정치를 통해

테오티우아칸부족은 대단한 문화민족이었는데 특히 피라미드나 신전 건축에 솜씨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조각이 발달했다. 정치는 신정정치를 했는데 승려가 정치 종교 행정 산업 제조업 등 모든 것을 장악했다.

그러나 A.D. 850년 경에 발생한 전쟁 질병 반란 등으로 인해 국가의 힘이 크게 약해졌다. 결국 치치메카(Chichimeca)부족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전 도시가 불에 타 멸망하고 말았다. 그 거대한 도시가 스페인사람들이 멕시코를 점령했을 때는 흙과 숲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초기부터 적극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형의 건물도 짓고

한편 톨테카는 A.D. 800년부터 1200년경까지 멕시코의 툴라(Tula)지방에 자리잡았던 강력하고 호전적인 제국이었다. 톨테카왕국이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고 가장 찬란한 문화를 낳은 시대는 토필신(Topiltzin)왕대였다. 후에 아스테카와 마야에까지 전도되었던 켓살코아틀(Quetzalcoátl, 선과 문명의 신)종교가 이때 처음 생겼다. 지금까지도 자랑스러운 유적들을 수없이 남기고 있는 툴라는 토필신왕이 제국의 도읍으로 정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 거대한 조각기념탑들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금 은 동 등 금속의 사용법을 발달시켰고 건축술도 크게 장려했다. 큰 건물의 기둥 책상 왕좌 등의 다리를 조각물로 만들고 지주를 이용, 건물을 크게 짓고 내부를 넓게 확보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원형의 건물을 짓기도 했다. 아울러 멕시코 최고수준의 도자기 제조 기술을 후세에 남겼다.

아스테카족은 지금의 멕시코시의 서북방에서 남진(南進), 현재의 멕시코시로 이동해 왔다. 그들은 1267년 경에 멕시코시의 차풀테펙공원에 정착하게 된다. 그뒤 나라이름을 메히카(Mexica)로 개칭하게 되는데 이는 지금의 메히코(México)란 국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이 아스테카족을 정복했을 때는 메히코국이었다.

아스테카족은 1427년부터 1521년까지 강력한 왕국을 이룩하고 주변국가들을 정복, 그 영토를 거의 현재의 멕시코 전역으로 넓혔다. 그러나 1521년 8월 13일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Henán Cortés)에 의해 정복당하고 만다.

아스테카족은 초기에는 경작농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주로 수렵 어업 단순한 원예업 등에 종사했다. 그들은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뗏목 등을 연못에 띄우고 돌과 흙으로 메운 뒤 여기에 야채를 비롯한 여러 식물을 심어 길렀다. 아스테카사람들은 이것을 치남파스(Chinampas)라고 불렀다.

그러나 주변국들을 점령함으로써 영토가 확장되고 그에 따라 농토를 확보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경작에 종사하게 된다. 그들은 주로 옥수수 콩 호박 고추 고구마 토마토 용설란 담배 면화 등을 재배했다. 용설란으로부터 그들은 풀케(Pulque,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하다)란 술을 만들어냈고 망토 주머니 샌들 등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섬유를 추출해냈다.

달력을 통치의 도구로

아스테카족은 예술과 과학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원래 수렵과 어업으로 생활을 꾸려온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멕시코 분지에 확실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문화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개화된 부족들과의 접촉을 통해 자기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시켰다. 특히 당시 선진문명을 자랑했던 톨테카의 종교적 예술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피라미드식의 기초축대 위에 두개의 성전을 나란히 건립했다. 하나는 비를 비는 신전이고 또 하나는 아스테카족의 주신(主神)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아스테카의 최고걸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조각은 피에드라 델 솔(Piedra del Sol, 일명 Calendario Azteca 아스테카달력)이다. 이 달력은 그 정확성이 요즈음의 월력(月曆)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다. 당시 아스테카족은 이것을 달력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소원을 비는 비석으로 더 많이 활용했다. 실제로 이 달력은, 보통 인간과는 달리 승려들은 신과 통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승려들은 우기(雨期)와 계절 등을 평민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신의 섭리를 전달했다.

그들은 문학에도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연설을 하고 시를 읊는데 대단한 소질을 보여 주었다. 모든 행사와 의식에 앞서 연설을 하고 시를 읊었다.

 

롤테키족의 거석문화가 낳은 우상들^일종의 암자인데 얕은 피라미드 상층부분에 세워졌다. 높이가 약 3m인데 세개의 토막으로 돼 있다.


1년은 18개월

음악과 춤은 종교의식 결혼식 전승(戰勝) 축하 고위관리 취임 등 축제일에는 어김없이 행해졌다.

아스테카의 일력은 1년을 18개월(1개월은 20일)로 나누었다. 여기에 5일간의 보충일을 붙이게 돼 있었다. 대개 5일간은 새해를 맞이하는 준비기간이었다.

교육수준도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 특히 가정교육을 통해 순종과 절제생활을 가르쳤다. 또 연장자와 상급자를 존경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늘 일에 힘쓰라고 지도했다.

평민교육은 신체단련 전쟁하는 방법 종교의식 등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뤄졌다. 학생들은 노동을 하고 단식을 하면서 신에게 봉사하는 정신을 길렀다.

고등교육은 칼마칵(Calmacac)이라는 학교에서 담당했다. 여기서는 귀족 성직자 무장 들을 길러내는 교육을 했다.

특수교육이 실시되기도 했다. 예로 수공업자 예술가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멕시코 티바스코 지방의 문화유적
 

199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우덕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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