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뉴욕의 한복판 맨하탄에 위치한 컬럼비아(Columbia)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2년 반이 다 되어간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후 내 앞에는 몇가지의 진로가 놓여 있었다. 취직을 할 것이냐, 아니면 더 공부를 할 것이냐. 또 계속해서 공부를 하기로 한다면 한국에서 박사과정에 응시하느냐, 유학의 길을 택할 것이냐 하는 등의 몇가지 선택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결국 나는 더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유학의 길을 택하게 됐다. 미국 유학의 길을 선택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자연과학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너무나도 열악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단순한 실례로, 한국의 대학에서 화학실험실(대학원생이 4,5명 정도 있는)을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 1년에 2천만원 정도가 투자되면 부자실험실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실험실에서도 최소한 2억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 적게 봐서 10배, 크게는 1백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과 미국의 경제규모를 비교하지 않고 무턱대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근간에 이룩한 한국경제의 성장에 비춰 볼 때 자연과학분야에 투자하는 비율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의 관료들이 왜 그토록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가를 생각하면 솔직히 분통이 터진다.
'바퀴벌레'를 공부하면서
미국에서 공부하면 몇가지 이득과 아울러 그에 상응하는 손실도 따른다. 값비싼 화학기구와 시약을 손쉽게 구입해 쓸 수 있는 반면, 문화와 사고방식, 특히 언어가 다르다는 점은, 유학생들이 뿌리치기 힘든 공통적인 핸디캡이다.
필자가 처음 컬럼비아대학에 응시할 때부터 느끼기 시작한 영어에 대한 두려움은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컬럼비아대학을 포함해 미국의 모든 대학들은 외국인 유학 지망생들에게 토플(TOEFL)과 GRE 성적을 요구하고 있다.
토플의 경우, 여러 번 시험본 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제출하면 되는데 최소한 5백50점 이상은 받아야 한다. 대학에 따라서는 5백80점이나 6백점 이상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근간에는 토플 성적에 대한 비중을 과거보다 높이 두는 것 같다.
GRE는 미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대학원(박사과정)을 응시하는 모든 학생들이 꼭 거쳐야만 하는 필수과정이다. GRE중에서도 버벌(verbal)이라 불리는 부분을 준비해 나갈 때 굉장히 애먹었던 기억이 난다. 쉽게 말해 버벌부분은 미국대학을 졸업한 미국인들의 언어능력 테스트다. 그들과 비슷한 어휘력을 갖기 위해(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없지만) 'GRE 3300'이란 책을 외워 나가면서 무척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GRE 3300'을 펴면 매장마다 영어단어가 빽빽이 적혀 있었는데, 마치 바퀴벌레가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것 같아 친구들끼리는 이 책을 '바퀴벌레'라고 부르곤 했다. 영어준비하느라 고생했던 생각이 문득 들어 먼저 GRE와 토플을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대학교 대학원 성적과 교수님들의 추천서, 그리고 화학의 어떤 분야에 특히 관심이 있는지를 기록해야 하는 개인진술서(personal statement) 등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미국대학으로 보내면 그곳 교수들의 심사를 거쳐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미국의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학생들은 자연과학이나 공과대학을 택하기 보다는 의과대학에 가는 것을 원하고 있다. 연구실에서 자연과 씨름하는 복잡한 게임을 하느니 보다는 쉽게 돈을 벌어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자본주의 논리를 대변한다고나 할까. 덕분에 인력이 필요한 화학 물리 수학 등의 분야에서는 장학금을 주어가며 우수한 인력을 외국(주로 한국 중국 인도 등)에서 구하려고 애쓰고 있다. 특이한 것은 유학생 중에 일본인은 거의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컬럼비아대 화학과의 경우 미국인과 타국인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라는 사실이 방금 내가 한 말을 입증해 준다. 대부분의 미국내 다른 대학 화학과들처럼 컬럼비아대학 화학과에서도 모든 대학원생들에게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포함한 장학금을 주고 있다.
한국학생은 14명
필자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첫 학기를 공부하면서 인상깊게 느꼈던 것중 하나는, 과제물이 한국에서 보다 엄청나게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1주일에 대여섯개의 리포트를 써 내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또 흑판에 써내려가지 않고 강의해나가는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는 식은 땀이 절로 났다. 내가 혹시 잘못 들어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수업 후에 참고서들을 이것저것 뒤져가며 재확인하느라, 미국학생들에 비해 두서너배의 시간을 잡아먹곤 했다.
미국인 학생들과 외국인(주로 동양계) 학생들의 수업을 듣는 태도에는 사뭇 다른 차이가 있다. 교수님이 실수해 흑판에 잘못 썼을 때, 동양계 학생들은 알고도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학생들은 서로 먼저 손을 들어 지적하느라 야단법석이다. 화학문제를 풀어나가다가 의문이 생기면 참고서를 뒤져서 스스로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동양계 학생들의 습성이라면, 조교나 교수를 찾아가 직접 물어보는 것은 미국학생들의 방식이라 하겠다. 언어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컬럼비아대 화학과에서 연구하는 분야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레이저(laser)나 분자광선계측기(molecular beam)를 이용해 화학반응을 분자수준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분자동력학(molecular dynamics), 기체와 액체 또는 액체와 액체 사이의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10}^{-12}$초(pico sec)시간 단위로 연구하는 초고속분광학, 고체표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연구하는 표면화학(surface chemistry)이 물리화학분야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유기화학 분야에서는 복잡한 천연물이나 생화학물질을 합성하는 유기합성(organic synthesis)과 그 모델링을 다루고 있다. 또 무기화학분야에서는 전자현미경(STM)을 사용, 원자를 하나씩 구분해 측정하는 연구와 초전도체의 합성 및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 컬럼비아대 화학과에는 15명의 교수와 1백80여명의 학생들이 적을 두고 있다. 그중 한국학생은 박사과정에 8명, 그리고 포스트 닥터(post doctor)로 6명이 와 있다.
학부과정은 한국이 앞서
필자는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이곳으로 왔다. 한국의 실험실에서 보낸 기간이 2년, 여기서도 2년 약간 넘는 기간동안 실험실에서 보냈기 때문에 어렴풋하게 나마 양국의 몇가지 차이점을 느낀다. 미국에서는 값비싼 기계와 화학약품을 손쉽게 쓸 수 있다. 부러운 일이지만 우리도 곧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그밖의 몇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계속되는 과 세미나를 통해 다른 대학 화학실험실의 연구현황과 그 방법들을 접할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는 것이 그 하나다. 활발한 정보교환을 통해 경쟁자들이 무엇을 얼마나 진행시키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용이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지도교수 연구실과 학생들의 실험실이 서로 붙어 있어 교수 학생간의 계속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다른 점이다. 또 각 과별로 조그마한 도서관이 따로 있어 화학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면 언제든지 도서관에 가서 이것저것 뒤져보는 것이 용이하다.
미국의 이공계 대학들은 대부분이 대학원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부과정에서는(한국에 비해) 전공과목을 그리 많이 수강할 수 없다. 따라서 대학에서 같은 4년을 공부한 한국과 미국의 대학생을 비교하면 한국학생이 훨씬 앞서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컬럼비아대학 화학과에서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1940년과 50년대 사이에 화학노벨상을 받은 유레이(Urey)라는 화학자가 컬럼비아대학에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수소(H)보다 질량이 두배 무거운 중수소(D)라는 동위원소(isotope)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중수소는 자연계 항상 0.015% 존재하는데 (즉 수소가 9만9천9백있을 때 중수소 15개 존재), 당시에는 수소와 중수소를 분리할 수 없었다.
유레이박사는 물의 밀도(density)를 정확하게 알아내고 싶어 박사과정의 학생에게 증류(distillation)를 통해 얻어낸 물의 밀도를 여러 차례 측정하게 했다. 그런데 증류를 하면 무게가 무거운 중수소는 항상 비커 속에 남고(${D}_{2}$O 혹은 ${H}_{2}$O로) 가벼운 물(${H}_{2}$O)만이 증류돼 측정할 때마다 매번 서로 다른 실험값을 얻었다고 한다. 학자의 직감으로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낀 유레이박사는 그것이 수소의 동위원소(isotope)인 중수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둘을 분리해 낼 수 있을까. 그는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구, 마침내 분리를 해냈고 그 업적으로 노벨상을 탈 수 있었다. 무심코 넘겨 버릴 수도 있는 문제를 차분히 파헤쳐 대발견을 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미국의 화학계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다. 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유학의 길을 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우수한 두뇌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한국이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젊은 과학도들이 끊임없이 탐구해 나갈 때 과학한국의 앞길은 밝으리라. 한국 과학도의 위상은 어느 곳에서 연구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때 올바로 정립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함축돼 있어
또 한가지 필자가 미국에 온 이후 느꼈던 인상을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는 학문의 깊이가 학문의 연륜에 비례하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건, 연구소 실험실에서 일하건간에 화학에 대한 지식이 시간에 비례해 깊어지는 선배화학자를 거의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극히 미약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한편의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지 않을까.
미국의 화학과 교수들의 경우, 나이가 든 노교수일수록 더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교수의 해박한 지식과 적극적인 연구정신 앞에서 한 한국유학생은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화학'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정의를 내릴 것인가. 한마디로 이렇다 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분야다. 화학으로 평생을 보낸 선배화학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질문이라 할 수 있는데, 나같은 초심자에게는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정의를 내리려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으리라.
서로 다른 두가지 물질, 가령 A와 B가 합쳐져서 초기의 성질과는 전혀 다른 C라는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화학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캐내고자 노력하는 학문이 바로 화학이라고. 화학은 물리 생물 지학 등과 더불어 자연과학의 핵심 문제를 다루는 아주 근본적인 학문이다.
필자가 화학의 세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한 이후 부터다. '화학'이라는 낯선 단어를 선택하면서 펼쳐진 나의 화학인생은 벌써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문학과 철학과 예술의 길에 끝이 없듯이 화학의 길에도 끝이 없다는 생각을 여러 번 가진다. 오묘한 자연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보았을 때의 기쁨과 희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인류가 탄생한 이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사람 아닌 나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할 때의 그 기분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실험실 속에서 맛볼 수 있는 대단한 흥분이요, 가슴 설레임인 것이다.
그러한 기쁨은 자연과학도들의 보편적 입문동기라 할 수 있다. 우주와 입자의 근본을 파헤치는 물리학도들, 생명의 본질을 추적하는 생물학도들, 그 과정의 자세한 메커니즘을 들여다 보고자 하는 화학도들, 모두의 공통된 느낌인 것이다.
화학을 하려면, 좀 더 정확히 얘기해서 모든 자연과학을 하려면 연구실 안에서 끙끙거리며 몇가지 데이터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매달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애를 쓰면 자연은 우리에게 몇가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때때로 거기에는 철학이 깃들어 있다.
화학의 중요한 개념중 하나인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는 일상생활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자신의 독자적 목청을 내고 있다. 스티븐 호킹에 의해 제시된 우주론은 신과 인간의 근본적 문제점을 진동시키기도 한다. 현재의 과학과 동양철학과의 만남은 비교적 순조롭다. 치열하게 상충되지 않고 서로를 보충해 주는 무수한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