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인 퍼지와 서양적인 신경회로망이 융합, 새로운 퓨전시대를 열고 있다.
최근 매스컴을 통해 퍼지(fuzzy)에 관한 기사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어떤 가전제품회사에서는 세탁기에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대담하게 '퍼지세탁기'를 개발했다는 광고를 내보내기도 한다. 과학잡지나 신문에도 퍼지이론에 관한 글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거의 붐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퍼지가 요즘 갑자기 여러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국내의 가전업체들은 지난 해 초부터 일기 시작한 퍼지붐을 한껏 이용하고 있다. 잇따라 내놓고 있는 세탁기가 퍼지응용제품의 첨병이다. 이 퍼지세탁기는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삽시간에 수많은 소비자를 확보한 퍼지의 열풍이 국내에도 불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제품보다 기능이 월등 다양해졌고, 에너지절약에도 도움을 주며, 값도 비슷하기 때문에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문가 시스템의 도움으로
그렇다면 퍼지가 기존의 방법에 비해 좋은 결과를 나타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탁기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어떤 가정주부가 기존의 세탁기를 사용해 세탁할 경우, 우선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세탁물의 양이나 옷에 묻은 때의 정도에 따라 세제와 물의 양을 결정해야 한다. 동시에 세탁의 강도도 선택해야 한다(약하게 보통으로 강하게 중에서 한가지를 택한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신경을 쓴 다음 세탁기를 작동시켜야 제대로 옷을 세탁할 수 있다.
그 주부가 선택한 것들, 즉 세제의 양, 물의 양, 세탁의 강약이 과연 최적의 선택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탁에 관한한 내로라하는 전문가가 선택한다면 보다 최적에 가까운 세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몇명의 전문가가 각 가정을 가가호호 방문, 세탁일을 도와줄 수는 없다.
이제 어떤 방법이 남아 있을까. 여기서 인공지능연구의 부산물인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을 활용하는 방법이 등장한다. 이 방법의 요체는 세탁기에 미리 전문가의 지식을 기억시켜 놓는 것이다. 그리고 센서를 통해 세탁물의 성질을 알아낸 뒤 그 정보를 전문가의 지식이 기억돼 있는 마이컴에 보내 그곳에서 최종결정을 하게 한다. 그러면 전문가가 직접 선택한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의 빨래를 할 수 있다.
퍼지의 한계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 만든 세탁기가 기존의 세탁기에 비해 좋은 성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리 기억시켜 놓은 전문가의 지식이 부족, 처리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상황이 생기면 '식은 땀'을 흘리게 된다. 결국 전문가의 지식을 얼마나 많이 기억시켜 놓았느냐가 그 세탁기의 성능을 좌우하게 된다.
이 기억저장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의 담당연구원들이 발생가능한 모든 경우를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충분한 실험을 통해 되도록 많은 지식을 마이컴에 전달해주어야 한다. 여기 소요되는 시간은 보통 수년이 걸린다(경우에 따라서는 더 적게 소요되기도 하지만). 이 방면의 기술이 뛰어난 일본도 4,5년이 걸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소 과속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퍼지이론이 소개된지 몇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제품이 나왔다 하니, 비록 그 제품이 퍼지 알고리즘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일본제품보다 성능이 좋을 리 없다.
퍼지이론은 전문가의 사전지식이 요체다. 전문가의 사전지식이 없으면 퍼지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문가의 지식이 많이 적용되면 적용될수록 좋은 성능을 보인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전문가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일단 저장된 지식은 고정돼 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역시 예측하기 힘든 결과를 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존의 퍼지 알고리즘이 지닌 한계다.
미국을 중심으로 연구돼온 신경망(Neural Network, 보통 NN이라 줄여 부른다)은 기존의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과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돼왔다.
AI의 여러 분야중에서 실제로 응용되고 있는 전문가시스템이 전문가의 사전지식을 이용하고 있는데 반해 NN은 그 시스템 자체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적응해 나간다. 다시 말해 미리 저장된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전문가의 지식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를 학습(learning)이라 한다. 따라서 NN은 퍼지이론이나 전문가시스템에 비해 환경에 보다 유연한 성질을 갖는다.
이런 환경적응성을 확보하려다 보니 NN은 불가피하게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된다. 학습을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게다가 아직 연구의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NN이론을 일반적인 범위까지 적용하기 어렵다.
NN이론은 퍼지나 전문가시스템에 비해 보다 이론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퍼지나 전문가시스템은 전문가의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어떤 전문가의 지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체 시스템의 성격이 결정된다. 또한 전문가의 지식이 가장 최고의 지식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NN은 다르다. 아직까지는 다소 미흡하지만 최고의 성능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있다. NN이론이 계속 발전된다면 특정분야에서는 최고의 성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지금까지 퍼지와 NN이 갖는 장단점을 살펴 보았다. 퍼지는 일본에서 활발하게 연구되었고, NN은 미국에서 주로 연구하고 있다. 퍼지가 주관적이고 경험적이라면 NN은 객관적이다.
퍼지가 동양적인 사고를 그 배경으로 갖는다면 NN은 서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퍼지가 현실적이라면 NN은 이론적이다. 퍼지가 귀납적이라면 NN은 연역적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면을 가지고 있는 두 이론이 서로 공존할 수는 없을까. 한쪽의 부족한 면을 다른 쪽에서 채워줄 수는 없을까. 양쪽의 연구자들은 퍼지와 NN의 결합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이 상호보완전략은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퍼지의 단점을 NN을 활용해 해결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이렇게 퍼지와 NN이 만나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더욱 보강시킨 이론이 바로 퓨전(fusion)이론이다. 둘 사이의 융합을 뜻하는 퓨전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차세대의 첨단기술로 최근에 등록한 퓨전이론을 응용한 제품은 아직 없다. 하지만 멀지 않아 퓨전이라는 수식어도 우리 귀에 익숙하게 될 것이다. 요즘의 퍼지처럼.
최초의 퓨전관련 논문은 입력 출력이 여러 개인 NN에 퍼지의 특징을 적용한 것이었다. 퍼지이론은 일반적으로 논리적인 표현을 해야 하는 분야에서 큰 효과를 나타낸다. 인간이 지니는 논리를 기존의 수식을 사용해 표현하려면 복잡한 수식이 동원돼야 하지만 퍼지논리를 활용하면 이를 쉽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복잡한 고차연산을 쉽게 나타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퍼지는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없다. 유연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제한된 범위내에서는 좋은 유연성을 보이지만 범위가 넓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예상밖의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퍼지세탁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리 저장돼 있는 처리범위를 벗어나면 그 결과를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 것이다.
이에 비해 NN은 그 구조적 특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퍼지에 비해 좋은 유연성을 지닌다. NN의 유연성은 학습에 의해 구현되는데 학습이란 외부의 상황을 스스로 습득하는 것을 말한다. 학습이 잘 되면 될수록 예상하기 힘든 외부의 환경변화에 대해서도 스스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커진다. 따라서 NN은 입력되는 대상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변화가 많을 때 퍼지에 비해 보다 효율적이다.
이런 분야중 대표적인 예가 패턴(pattern) 처리분야다. 패턴처리 또는 패턴인식이란 인간이 눈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NN을 통해 또는 기존의 인공지능(AI)방법을 이용해 구현하려는 학문의 한 분야다. 따라서 입력되는 대상이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정보자체도 시간에 따라 여러 형태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이 눈을 통해 '사과'를 인식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사과는 그 종류도 많을 뿐더러 모양이나 색깔 등도 모두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이 사과임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높은 유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학습을 통해 사과의 공통점을 알고 있으므로 고도의 유연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NN은 패턴처리 같은 분야의 일을 할 때 좋은 성능을 나타낸다. 따라서 퍼지와 NN의 두 장점, 즉 논리적 표현(퍼지)과 유연성(NN)을 결합시키면 효율이 높은 지식처리가 가능해진다(지식처리란 논리적 표현이나 논리적 추론 등을 말한다). 즉 논리적 표현은 퍼지를, 논리적 추론은 NN을 이용한다면 기존의 두 이론보다 이를 결합시킨 융합(fusion)이론이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 두 이론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간단히 살펴보다.
퍼지이론은 멤버십(membership)함수부터 추론을 시작하고 있다. 멤버십함수는 퍼지이론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내용으로 애매함의 정도를 나타내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3에 가까운 수'를 표현한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3'은 3에 완전히 가까운 수(바로 자신이므로)이므로 애매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2'나 '4'는 3에 가깝기는 하지만 '3'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이나 '5'는 '2'나 '4'에 비해 더 그렇다. 따라서 각 수에 대해 그 적합성을 따져보면 (그림)처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즉 3에서 멀어질수록 그 값은 줄어들며 3에 가까울수록 그 값은 커진다.
이처럼 멤버십함수는 입력값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때 중요한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어떻게 멤버십함수를 정해야 하는가'다. 그림에서는 '2'나 '4'에 대한 값을 0.7로 정했지만 어떤 사람은 0.8로 또 어떤 사람은 0.6으로도 정할 수 있다.
이 점이 퍼지가 주관적이고 경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NN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면 보다 객관적으로 타당성 있는 시스템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연구분야가 퓨전이론중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멤버십함수의 자동설계다.
인간과 기계의 가교로
멤버십함수의 자동설계 방법외에도 퍼지와 NN을 결합시키면 쓸모가 많다. 예컨대 지식획득(acquisition), 지식표현, 퍼지인지(cognitive), 지도제작 분류(clustering), 패턴인식(recognition) 등에 활용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NN과 퍼지를 직렬연결시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의 연구추세는 퍼지논리에 NN을 도입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장래의 중요한 연구분야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NN을 이용해 퍼지추론을 자동으로 하는 방법, 둘째 퍼지추론 규칙을 추론환경에 적응시키는 방법, 셋째 퍼지와 NN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 넷째 회로망(network) 구조를 이용해 퍼지추론을 근사적으로 빠르게 하는 방법, 다섯째 NN에 퍼지논리를 도입하는 방법, 여섯째 NN의 학습(learning)에 퍼지이론을 도입해 학습속도를 빠르게 하는 방법 등이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퓨전 연구는 아직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기초적인 이론의 방향조차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끝으로 퓨전의 여러 연구분야중 패턴인식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퍼지를 이용해 패턴인식을 할 때는 입력되는 물체의 몇가지 특징을 파악, 이 특징에 따라 구분해 나간다. 여기서 퍼지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특징 자체에 애매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특징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경우에는 이를 분류하는 기준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퍼지이론을 적용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때때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확실한 기준에 의해 분류되지 않고 인간의 통감적 지식에 의해 분류작업이 행해지기 때문에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경우 NN을 적용하면 특징을 추출해낼 때 보다 객관적으로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기준과 퍼지이론을 결합시킨 뒤 물체를 분류해 나가면 특징들이 변할 때에도 보다 유연하게 패턴분류를 할 수 있다.
인간사회에서 성공적인 상호교류를 하려면 따뜻함과 친절함, 우정 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미래에는 인간과 컴퓨터,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도 이러한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따라서 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동작되는 컴퓨터나 로봇 등이 요구된다.
퍼지나 NN은 앞으로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 이 둘을 묶는 퓨전이론이 더욱 널리 활용될 것도 불문가지다. 현재의 연구추세로 보아 퓨전이론은 빠른 시간내에 실행하기 다소 어려운 면도 있지만 특정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기대를 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