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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주사위 놀이」는 거부되는가?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

자연세계의 객관성을 굳게 신봉하는 아인슈타인과 인식 주체를 중시하고 통계적 해석을 내리는 양자역학의 신봉자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는 아인슈타인(A. Einstein) 이 보어(N. Bohr)를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Copenhagen) 학파의 확률론적인 양자이론 해석을 거부하면서 했던 말이다. 즉 자연의 모든 현상과 법칙들이 확률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양자이론이 드러내 보이는 자연상 역시 거시세계의 뉴턴 물리학에서처럼,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과 결정론(determinism)을 그대로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7년 브뤼셀(Brussels)에서 열린 물리학자들의 제5차 솔베이(solvay) 회의를 시발점으로 하여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기나긴 논쟁'은 시작됐다. 한 세대 이상 진행된 논쟁은 주로 객관적 실재(존재론)와 이에 대한 양자론의 이론적 인식(인식론)간의 관계를 기본 쟁점으로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인식이론으로서의 양자론이 객관적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기초해서 물리학 이론은 객관적 실재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가가 중점적으로 거론됐다.
 

코펜하겐학파의 확률론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던 아인슈타인(1879~1955)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의 차이

아인슈타인과 보어 논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펜하겐 학파의 양자 이론에 대한 해석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양자이론은 대상계의 객관적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해석해 객관적 실재에 접근해 가는가.

대상계의 객관적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에 의해 고전역학과 양자이론은 엄밀히 구별된다. 뉴턴 역학으로 대표되는 고전 역학이론은 대상계의 상태를, 구성입자 각각의 위치와 속도(또는 운동량)의 값들로 규정한다. 이들은 실질적 의미를 갖는 물리적 실체들로서, 외부의 힘이 작용하면 뉴턴의 운동 방정식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구성입자 각각의 변화된 위치와 속도를 계산해내기만 하면 대상계의 변화된 새로운 상태를 일의 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즉 고전 역학의 인식체계와 객관적 실재는 직접적으로 일치된다.

양자이론은 고전역학과 달리, 대상계의 객관적 상태를 위치(또는 운동량)의 함수 형태로 표현되는 '파동함수'(wave function)라는 복잡한 수학적 개념을 통해 간접적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파동함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수학적 실체다. 따라서 이를 해석하는 특정한 방식에 의해서만 객관적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어 이후, 디락(P. Dirac)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그리고 파울리(W. Pauli) 등이 완성해낸 파동역학(wave mechanics)을 통해 수학적으로 보다 정교화된 양자이론은 이러한 해석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특정한 해석방식은 무엇이며, 객관적 실재를 얼마만큼 인식하는가. 이는 파동함수에 대한 해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파동이란 입자의 파동성을 암시하고는 있었지만 전자기파와 같은 실체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드브로이(De Broglie)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입장은 달랐다.

입자, 파동의 이중성 문제가 당시 명확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인슈타인이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 일정 이상의 에너지를 갖는 빛을 금속에 쪼이면 전류가 흐르게 되는 현상)를 통해 빛의 입자적 성질을 유추해 내자 역으로 드 브로이는 입자의 파동성(예를 들면, 전자의 간섭 실험에서 보여진 회절현상)을 주장하고, 위의 파동함수가 물질파(matter wave, 한 예로 파도)와 같이 그 실체가 존재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해석은 슈뢰딩거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이는 고전역학의 뉴턴 운동방정식에 비교되는 양자이론의 파동함수 운동방정식이다)으로 양화(量化)되고 체계화 됐다.

파동함수가 물질파로서의 실체를 갖는다는 드 브로이와 슈뢰딩거의 해석은, 곧바로 막스 보른(Max Born)의 반대에 직면한다. 보른은 1926년 드 브로이-슈뢰딩거 파동함수가 실체가 아니라, 단지 공간상의 그 지점에서 전자를 발견할 확률을 규정한다고 해석했다. 그 파동은 '물질'이 아니라 '확률'(probability)의 파동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입자들의 운동에 대한 기술은 확률적(파동함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해 확률적 해석을 제공)이며, 입자의 가능한 운동을 입증하는 것 이외에 그들을 정확하게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른은 주장한다.

마치 카드놀이에서 특정인이 카드를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확률)을 카드놀이의 이론에 따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나, 특정인의 카드내용이 무엇인지를 예측하기란 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경우와 마찬가지다.

이 해석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은 뉴턴에 이어 아인슈타인이 강조하고 슈뢰딩거 역시 전제로 삼았던 자연세계의 객관성과 결정론을 거부하는 것이며 '신의 주사위 놀이'를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양자이론은 보른의 확률적인 해석을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양자이론에서 객관적 실재에 관한 인식론적 문제, 즉 양자이론의 해석문제가 명료하게 부각됐다. '양자이론은 객관적 실재를 완전하게 기술하는가' '양자이론의 파동함수는 객관적 실재를 반영하는 개념인가, 아니면 단순한 도구론적 개념인가' 그리고 '우리는 양자이론을 통해 객관적 실재에 얼마나 접근해 갈 수 있는가'등의 문제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파동함수에 대한 보른의 확률적 해석에 기초해서, 양자 이론의 '코펜하겐 해석'에 핵심적인 두 원리를 정립했다. 그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와 보어의 '상보성 원리'(principle of ornplementarity)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다음의 두 관계식으로 나타난다.

(△χ)x(△p)≧h
(△E)x(△t)≧h

여기서 χ p E t는 각각 위치 운동량 에너지 그리고 시간을 가리키며 h는 운동의 불연속적인 양의 척도를 나타내는 플랑크 상수다. 이는 비결정론적 해석에 대한 수학적 정식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관계식은 한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 (혹은 에너지와 시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보어의 비결정성(indeterminacy) 개념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총알이 발사되는 경우 총알이 총을 떠나는 순간에 총알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초기 측정의 불확정한 정도까지만 총알의 미래궤적이 결정되므로,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총알의 미래궤적을 통계적 확률적으로 기술하는 것 뿐이다.

결정론의 포기가 핵심

총알 대신 전자(electron)를 택하게 되면, 운동의 확률적 기술은 더욱 강하게 요구받게 된다. 결국 입자의 운동에 대한 기술은 결정론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라, 확률적이며 통계적이라는 것, 즉 결정론의 포기가 이 원리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객관적 실재와 관련된 문제, 즉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 입자에서 운동량과 위치가 객관적 실재로서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하는가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양자이론이 직면한 이같은 객관적 실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한다. 보어는 먼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기존의 인식, 즉 인간의 의식 혹은 제3의 인식주체(예를 들면 측정장치)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개념을 거부한다. 바로 이점에서 아인슈타인과 대립한다.

보어는 물리학의 과제가 '자연이 어떠하다'는 것을 찾아내는 것(아인슈타인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기술해 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미시세계와 측정장치간의 상호작용(거시세계와 달리 미시세계에서 이는 무시될 수 없음)에 대한 명시, 즉 무엇을 측정할 것인가와 관련한 측정장치와의 결합없이 객관적 실재의 상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객관적 실재를 인식함에 있어서 대상객체와 인식주체가 상보적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기초하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다른 측정장치에 의해 동시에 측정되고 각각의 결과가 객관적 실재가 되어 한 입자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보어는 또한 측정이 없는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객관적 실재에 대해 확률적인 해석을 제공했던 파동함수가, 측정 이후에는 측정장치와 결합되어 객관적 실재를 결정론적으로 규정하게 됨을 강조한다. 이를 '파동함수의 붕괴'라고 하는데, 측정 이전 여러 가능한 파동함수들의 기대값으로 주어진 객관적 실재에 관한 확률분포가, 측정 이후에 어느 특정의 상태만을 확률적이 아닌 결정론적으로 규정하는 특정의 파동함수로 붕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자연세계가 인식주체의 측정이나 관찰을 통해 비로소 객관적 실재를 현상할 수 있다는 보어의 주장을 수학적으로 뒷받침 해준다.

여기서 결정론은 물론 고전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의미의 결정론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다음의 문제들을 제기한다. 측정 이전 대상계의 상태가 파동함수에 의해 확률적으로 해석된다고 할 때 이 파동함수는 측정 이전의 객관적 실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파동함수의 붕괴'는 신비스런 현상이 아닌가. 아인슈타인은 이를 자연세계의 객관성과 결정론을 포기한 결과라고 보았다.

상보성 원리가 양자이론에서의 객관적 실재의 문제에 부여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측정하려는 실험적 구성에 대한 명확한 규정없이 대상의 객관적 실재성과 물리적 성질들을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객관적 실재는 관측자에 의해 부분적으로 '창조된' 실체라는 것이 된다. 보어 자신의 견해가 이와 같은 강한 주장을 포함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우리와 무관하게 객관적인 물리세계가 존재한다는,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함축한다.

요약하면 양자이론에 대한 코펜하겐의 해석은 고전적 결정론을 거부한 대신 실재에 대한 확률적 해석을, 엄밀한 객관적 실재성을 거부하는 대신 측정 행위에 의해 현상화한 사건만을 객관적인 실재로 승인하는 상호 주관성을, 더나아가 물리적 세계의 구조가 인간의 의식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광자상자」사고실험

이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반대는 매우 강경했다. 양자이론 내에서 파동함수의 객관적 실재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그 논쟁의 주제에 따라 크게 두단계로 구별된다. 첫째 단계는 5회와 6회의 솔베이회의 시기로서 논쟁의 핵심이 양자이론의 모순성, 즉 이론적 결함에 집중되었던 단계이다. 이 때에 아인슈타인은 '광자상자'(photon box)라는 사고(思考)실험으로 양자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둘째 단계는 아인슈타인이 양자이론의 모순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철회하는 대신, 양자이론의 불완전성(incompleteness), 즉 양자이론은 객관적 실재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던 시기다. 전자가 물리학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반면, 후자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철학적 인식론적 성격의 논쟁이다. 이들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6회 솔베이 회의(1930)에서 아인슈타인은 '광자상자'라 불리는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빛이 새지 않고 매우 빨리 열리고 닫히는 창문을 설치한 상자속의 시계를 상상하자. 상자의 창문이 열렸을 때 한개의 광자가 빠져 나오도록 하고, 창문이 열리기 전후에 저울로 상자의 무게를 측정해 빠져나간 광자의 질량(에너지)을 측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과적으로 빠져나간 광자의 에너지와 시간을 임의로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 (△E)x(△t)≧h를 위반한 것으로, 양자이론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결론에 대해 보어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광자가 상자에서 빠져 나올 때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 상자에 일정량의 운동량이 전달되면 무게를 재는 중력장에서 상자의 위치가 변하게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의 속도는 중력장이 작용하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시계의 변화된 위치 만큼에 해당하는 시간측정의 불확실성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하이젠베르크의 에너지-시간 불확정성 관계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일반 상대성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에 의해 오히려 확인되고 강화된 셈이다. 아인슈타인은 패배했다.

1차 패배 후의 재도전

이 논쟁 이후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모순성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양자이론이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갖는 불완전성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다. 즉 고전적 결정론과 자연세계의 객관성을 거부하는 양자이론에 대한 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은 불완전한 것으로 더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의 대다수는 사실상 후자의 문제에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1935년에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 등은 흔히 EPR 역리(paradox)라 일컬어지는 논증을 제시했다. 여기서 이들은 양자 이론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과 자연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은 상호 양립할 수 없으며 객관적 실재성은 포기될 수 없는 것이므로, 지금 그대로의 양자이론은 불완전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양자이론이 명시하고 있지 못한, 객관적 실재의 또다른 요소가 존재하여 이를 완전히 기술해 내기 위해서 기존의 양자이론에 '숨은 변수'(hidden variable,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의미)의 도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EPR 논증의 전제는, 첫째 세계가 우리의 관측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객관적 실재성의 가정이며, 둘째는 멀리 떨어진, 즉 엄밀하게 말해서 상대성이론 안에서 '공간성의 간격(space-like interval, 빛보다 빨라야 상호 정보 전달이 가능한 원거리)의 사건들 간에 즉각적(순간적)인 영향(빛의 속도보다 빠른 정보전달)의 주고 받음이 있을 수 없다는 국소성의 원리다. 국소성의 원리는 정보 전달 속도가 빛의 속도를 초과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원리로 부터 나온 인과율이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유도된 결론은, 객관적 실재성의 기준에서 볼때 양자이론은 국소성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 논증을 자세히 살펴보자. 두입자가 q₁ q₂의 위치에 가까이 있다가, 어떠한 반발력에 의해 각각 p₁ p₂의 운동량을 가지고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관계는 개별 경우와는 달리 운동량의 합인 p=p₁+p₂와 두 입자들 간의 거리인 q=q₁+q₂를 동시에 측정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p와 q는 동시에 측정된다.

이제 두 입자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순간적인 정보전달이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를 상상하자(국소성의 원리). 이 경우 입자 1의 운동량을 측정하면 운동량 보존 법칙에 의해 입자 2의 운동량을 정확히 추론해내고, 입자 1의 위치 측정 역시 입자 2의 위치를 정확히 추론해낼 것이다. 이 때 입자 1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배제되지만, 입자 2의 운동량과 위치를(추론에 의해) 동시에 결정하는 것은 국소성 원리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입자 1의 운동량과 위치간의 불확정성 관계가 국소성의 원리에 의해 입자 2에는(순간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입자 2에 대해서 불확정성 원리는 성립하지 않게 되고, 양자이론은 국소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불확정성의 관계가 입자 2에서 가능하려면, 빛의 속도보다 빠른 정보전달매체(우리는 흔히 이러한 가상적인 입자를 '타키온'이라 부름)가 있어서 아인슈타인의 국소성 원리가 붕괴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특수 상대성원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보어의 대응

EPR논증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양자이론에 대한 코펜하겐의 해석 전체가 무너지는 듯했다. 보어는 이 논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보어에 있어서의 객관적 실재란 측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이 전제했던 객관적 실재성의 가정, 특히 입자 2의 위치와 운동량이 실제의 측정 없이도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주장을 보어는 지지할 수 없었다.

만약 입자 2에 대해서도 측정이 수행된다면, 그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어는 양자이론의 완전성이 손상되지 않고, 특수상대성 이론을 부정하는 비국소적 작용의 존재라는 아인슈타인의 결론을 피할수 있었다.

그후 30년 이상, 물리학자들은 EPR논증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여왔다. 물론 논의의 전개는 양자이론이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 즉 소립자물리학 원자핵. 고체물리학 화학 분자생물학 천체물리학 우주론 등에서 실천적 기반을 더욱 강화해 가고 있는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양자이론이 다방면에서의 실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술하는 객관적 실재가 불완전한 것이라면, 보다 엄밀한 객관적 실재는 숨어 있는 것인가. 1965년 제네바 근처에 있는 CERN(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소)에서 일하던 이론 물리학자 벨(J. Bell)이 이 문제에 뛰어 들었다. 벨은 사고실험이 아니라 직접적인 물리실험을 이용해 EPR 논증을 검토했다. 먼저 벨은 '숨은변수 이론'을 도입해 세계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또다른 물리적 정보들을 숨은 형태로 규정하는 '새로운 양자론'의 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이 안에서 숨은 변수들을 알게 되면 결과의 여러가지 확률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측정의 결과(카드놀이에서 특정인이 특정한 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예측할 수 있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결과들은 '벨의 부등식'으로 종합화돼 나타났다.

그러나 벨의 부등식은 최근에 이르러 많은 실험들에 의해 무너졌다. EPR 논증은 거부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이 주장해온 객관적 세계의 실재성은 부정되는 것인가. 자연의 본성이란 확률적(비결정론적)인 것이며, 자연에 대한 우리의 기술(description) 역시 확률적일 수밖에 없는가. 양자이론이 완전하다면 객관적 실재성과 국소성의 원리가 양립할 수 없게 된다는 아인슈타인의 지적은 더이상 논의의 가치가 없는 것인가.

이러한 점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논쟁의 핵심적인 주제들이다. 현재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인과율, 즉 국소성 원리가 깨지지 않는 범위내에서 '제한된' 비국소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양자이론을 옹호하고 있다. 즉 양자이론이 역학적 성격의 아인슈타인의 인과율(두 사건간의 정보전달이 역학적인 상호작용에 의거함)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비역학적 성격의 비국소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양ㄹ자이론의 기초를 세운 보어(1885~1962)


세계관의 대립

이상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우리는 아인슈타인과 보어간의 논쟁의 핵심이, 양자이론이 기술하는 자연의 객관적인 상이 완전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인식론 문제에 쏠려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자이론은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을 승인한다는 측면에서 실재론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를 거부 혹은 부분적으로 승인한다는 측면에서 도구론적인 이론인가에 모아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견해의 대립 (세계관의 대립 )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노출돼 왔던 것이다. 그 하나는 존재론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 인간과 독립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은 승인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다.

이는 현대판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인 것처럼 보인다. 아인슈타인이 '신의 주사위 놀이'를 거부함으로써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을 미시세계에 대해서도 명백히 승인하고 있는 반면, 보어는 미시세계에 관한 한 인식 주체로 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실재성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보어가 미시 대상계 자체만이 아니라 이를 측정하는 측정장치를 포함하는 복합계를 실재(reality)의 단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문제에 인식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과 존재의 단위를 개체로 보지 않는 전체론적 존재론의 성격과 관련돼 있다.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에 있어서 인식(인식내용)의 객관성이란 실재의 객관성으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며, 인식주체의 주관성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보어에게 그것은 주관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는 상호주관성의 개념으로 약화되어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어의 상보성원리는 객관적 실재를 인식함에 있어서 측정장치(인식주체)의 명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인식주체가 단순히 인식과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인식의 내용까지도 규정하는 적극적인 요인으로 작용함을 뜻한다. 그 결과 진리의 객관성의 기준은 진리의 상호주관성, 즉 동일한 측정장치하에서의 동일한 실험은 동일한 대상계에 대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진술들을 이끌어낸다는 견해로 전환해버린다. 이는 현대 인식론에서의 내재론적 입장과 외재론적 입장간의 대립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철학적인 견해의 차별성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인간은 진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상호 주관에 반영된 것만을 진리로 인식할 뿐인가.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이 갖는 가장 큰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이 오래된 인식론의 문제들을, 자연을 가장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물리학에 던져준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와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리학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보다 완전한 실재에 접근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간직한 채.

'현대 물리학은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는가.' '인정한다면, 무엇을 객관적 실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현대 물리학은 객관적 실재에 대하여 얼마나 알 수 있는가.'

1990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중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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