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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각자의 시간 속에서



1

전차 안에는 운전사와 미나를 빼고도 아직 다섯 명의 승객들이 남아있었다. 시골에서 처음 올라왔는지 창에 얼굴을 박고 신기한 듯 주변의 콘크리트 건물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전통의상 차림의 남자 노인 두 명, 태블릿으로 지루해보이는 서류들을 건성으로 체크하고 있는 회색 공무원 제복 차림의 여자, 비파 케이스를 짊어지고 전통어와 표준어를 번갈아 쓰면서 소곤거리고 있는 노란 교복 차림 여자아이 둘.

차가 광화문 정거장에 서자, 미나는 읽던 책을 코트 주머니 안에 넣고 여자아이들의 뒤를 따라 내렸다. 순환 전차는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새 승객 여섯을 더 태우고 다음 정거장을 향해 떠났다. 잠시 새로 짓는 5층짜리 상가건물 공사 현장과 주변에 널린 노점들, 까불거리며 시청 반대 방향으로 몰려가는 노란 교복 아이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미나는, 뒤에서 누군가가 표준어로 그녀를 부르자 움찔했다.

“시간인이신가요?”

그 누군가는 아까 전차에서 같이 내린 공무원이었다. 여자의 특징없는 동그란 얼굴은 미나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차 있었다. 추운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발을 구르던 여자는 미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씨익 웃었다.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시간인들은 대부분 과거 사람들보다 키가 컸지만 미나는 이곳 사람들과 비교해도 특별히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시간대에서 온 사람들은 아무리 그럴싸하게 위장을 해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이 시간대는 그럭저럭 평준화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미나가 이곳 옷차림, 태도, 말투까지 몽땅 모방할 수는 없었다.

“네.”

미나가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전 한양 시청에서 일하는 여울 소리라고 합니다. 이곳에선 시간인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등록하게 되어 있어서. 아셨는지요.”

“몰랐어요. 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 도약 중에 휴대전화도 망가졌고요.”

“이 시간대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요?”

“잘은 몰라요. 서기 1507년이란 것밖엔.”

“맞아요. 1457년에 시간침략을 받았지요. 50주년 기념일이 이틀 전이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린 꽤 잘 해냈습니다. 우리 만의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요. 자, 따라오실까요?”

미나는 여울 소리와 함께 시청을 향해 걸었다. 도자기 모양의 원통형 유리 건물 디자인이 낯익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한양 시청 중 열의 셋 정도가 저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내부도 익숙할 것 같았고 들어가보니 정말 그랬다.

여울 소리는 4층의 시간 관리부로 미나를 안내했다. 뚱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미나의 신분증을 만들어주었고 새 휴대전화를 넘겨 주었다.

미나는 새 휴대전화를 뇌의 보조 입력장치에 연결해 이 세계의 역사를 검토했다. 특이한 것은 없었다. 이곳을 침략한 시간군대는 세조찬위 전후의 혼란기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세조는 시간침략자들이 훈련시킨 노비 군대가 몰던 기관차에 깔려 죽었고, 복위되어 아직까지 살아있는 단종은 허수아비왕이었다. 문명화는 한반도를 넘어서 일본과 중국, 인도, 태국을 향해 퍼져가고 있었다. 유럽과는 교류 준비 중이었고 (온라인에 공개된 보고서 부록엔 “유럽과 서아시아의 종교는 보다 섬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라고 나와 있었다) 얼마 전엔 첫 번째 함대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다른 시간침략자들이 건드린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모를 일이었다.

“시간 터널은 어디에 만드셨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아, 인천 근방에요. 지금은 소멸되었을 거예요.”

“전에 계셨던 곳은 어땠습니까?”

어떤 곳이었냐고? 미나는 그곳에서 한 보름 정도만 머물렀을 뿐이다. 문명화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 시간침략의 영향을 받았을 1765년에서 1766년 사이의 한반도였다. 영향을 안 받았을 리가 없는 게, 아직 고려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만주 상당부분을 커버한 땅덩이는 미나가 온 시간대 조선의 세 배였다. 미래에서 온 민족주의자 집단이 어딘가에 숨어서 자기들만의 판타지를 구현하고 있었다.

미나가 지금까지 거쳐온 변종 역사는 수백 종에 달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 정도는 여기와 비슷했다. 성급한 문명화를 거친 시대착오적 과거였다. 역사를 갖고 노는 재미에도 한계가 있었다. 빨리 적응하고 문명의 안락함을 구현하는 게 먼저였다. 전기와 상하수도, 전차와 비행기, 인터넷과 휴대전화에게 영광이 있으라.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나는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미나!”를 외치는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유리였다.


2
미나는 시청 스카이라운지 종업원이 내려놓은 핫초코를 한 모금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합성이 아닌 진짜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가지 못했다니 다른 시간대에서 가져온 물건일 것이다.

유리의 얼굴은 좋아보였다. 최근에 회춘 치료를 받았는지 피부는 어린아이처럼 맑았고 키도 좀 자란 것 같았다. 몇 살일까. 그리고 내가 만난 몇 번째 유리인 걸까.

“69살. 넌 몇 살인데?”

미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

“54살.”

“아, 아직 아가네.”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에게 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8년 정도. 백악기로 가려던 시간침략자 무리를 따라가려다가 겁먹고 주저앉았어. 이곳 사람들에게 새 시간인들이 더 필요하기도 했고. 하긴 거기까지 가서 뭐하겠어. 제대로 된 꽃도 과일도 없는 곳인데.”

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거기까지 가는 게 가능해?”

“그 사람들은 가능하다고 했어. 기술이 거의 신에 가깝게 발전했더라고. 물리학 법칙이 막는 것도 아니고 다 에너지와 기술지원 문제니까. 수원탐사자들은 아니었어. 그냥 거기까지 거슬러가면 신의 간섭없이 인간만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봐. 그 시간선에서 신이 태어나도 우리가 아는 신과 다른 종류의 신이 되는 거지.”

“그래봤자 결국 신이잖아.”

“그렇겠지.”

유리는 수긍했다.

“여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모르겠어. 여기 계획은 신들이 직접 찾아오지 않는다면 1세기 정도 더 버틴다는 것이었어. 하지만 그게 별 의미가 없다는건 너도 알잖아. 여기 사람들은 종교 비슷한 것도 만들었어. 신들이 와도 대비할 수 있도록. 괜히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지.”

“그런 말을 하면서 우린 계속 과거로 달아나지.”

대화가 끊어지자 미나는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외모와 표정 만으로도 이곳 사람들의 계급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인, 시간인이 교육한 ‘문명인’, 아직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이들을 마법사들처럼 보고 있는 원주민. 모두가 서양식 (심지어 서양에서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문명인과 원주민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 세기의 시간 만으로는 이들 모두를 문명인으로 만들 수 없었다. 이들 중 몇 명은 끝까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특이점으로 건너 뛸지도 모른다.

저들 중 가장 행복해보이는 건 문명인이었다. 미래와 발전을 믿는 사람들. 심지어 그들에겐 다가올 종말도 행복한 약속일 것이다. 저들에겐 20세기 한국 기독교도들의 단순한 열성이 보였다. 하긴 둘 사이의 차이가 넓어봐야 얼마나 넓겠는가.

그에 비하면 그들이 떠받드는 시간인들은 그냥 게으르고 비겁해보였다.

“우린 여기 몇 명이나 돼?”

미나가 물었다.

“등록된 사람들만 너까지 포함해서 3012명. 최근 인구가 200명 정도 늘었어. 정복된 시간선에서 온 망명자들이야. 시 정부에서는 이른 감염을 걱정하고 있어. 여기 눌러 앉을 거라면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유리는 갑자기 생각이 생각났다는 듯 킥 웃었다.

“기억 나? 우리가 거문도에서 신성대영제국의 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먼저 선전포고를 했던 때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한 게 아니라 네가 했지. 그 멍청이들이 겨우 증기기관….”

“내가 한 게 아니야. 갈라진 시간선의 다른 내가 했지.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알아. 그 다른 나를 2년 전에 만났으니까. 여든 두 살이었어. 회춘 치료 결과가 지나치게 좋아서 내 조카처럼 보였지만.”

“아쉽다. 너랑 나눈 가장 멋진 경험이었는데.”

“기회가 또 오겠지. 시간도 많고, 세상도 많고, 너도 많고, 나도 많으니까.”


3
미나는 과거엔 별 관심이 없었다. 시간 여행 능력을 갖게 된 뒤로 그녀는 늘 미래를 갈망했다.

미나가 간 가장 먼 미래는 서기 3549년이었다. 1982년에 핵전쟁이 나 인류가 멸망한 시간선이었다. 주변엔 이끼와 쥐며느리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있었다. 인간이 없으니 신도 없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미래로 계속 갈 수 있었다. 계속 가다보면 태양이 적색 거성이 되어 지구를 집어삼킬 때까지 갈 수도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미나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미나가 보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미래였다. 그녀가 갇혀있던 21세기 초의 갑갑한 현재가 아닌 다른 시대. 더 개선되고 더 계몽되고 더 나은 시대.

그런 미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시간여행기술과,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의식대통합은 하나의 물리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시간여행기술만 발명되고 의식대통합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 이 사태를 막으려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가 결국 신을 만들었고 인간들은 그 속으로 사라졌다. 신들은 과거 인간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미래로의 시간 여행은 늘 벽에 막힐 수 밖에 없었다.

미나는 계속 과거로 달아났다. 아니, 과거들이다. 각각의 시간여행은 매번 새로운 시간선을 만들어냈고 그 시간선들은 또 다른 시간여행의 다리로 연결되면서 그물처럼 얽혔다. 시간여행에 감염되지 않은 시간선은 없었다. 얼핏 보면 순수해보였던 미나의 시간선도 자기네들을 ‘예언 수호자’라고 부르는 기독교 종말론자들이 몇 백 년 동안 개입한 결과 만들어진 조악한 연극이었다. 그것도 확인된 것만 그랬다. 그보다 과거에 어떤 무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누가 알랴.

순수한 시간선, 시간여행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첫 번째 시간선, 모든 역사의 수원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나 생각엔 그건 불가능했다. 시간여행이 만들어낸 시간선을 다 탐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미나가 지금까지 방문한 수천 개의 시간선들도 인간과 신이 만든 시간선들이 만들어낸 무한한 그물에 비하면 작은 점에 불과했다. 계속 가다보면 미나의 역사와 전혀 상관없는 과정을 거쳐 시간여행과 신에 도달한 시간선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 역사 역시 미나의 세계만큼이나 광대할 것이고 그 역시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에 찍힌 한 점에 불과할 것이다. 찾다보면 그 중 어딘가에 시간의 수원에 연결된 시간선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지금 미나의 고민은 보다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 시간선은 언제까지 신에게 감염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미나 자신의 경로는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최근에 거친 세 개의 시간선은 모두 비문명화된 곳으로, 신이 태어나거나 단시간에 감염시키기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다. 아까 시청 공무원이 깐깐하게 굴긴 했지만 미나의 척추에 이식된 일인용 시간 여행기가 만들어내는 시간 터널은 쉽게 증발되어 추적당하기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미나가 올 수 있다면 신도 올 수 있다. 망명객들이 올 수 있다면 신도 올 수 있다. 그리고 신이 온다면….

이 세계 자체가 신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한양의 발전소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석탄도, 태양열도, 핵융합도 쓰지 않았다. 시간여행의 기술을 발전에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에너지 생성용 터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들의 능력을 인공적으로 제한하고 통제한다고 해도 신의 씨앗에서 겨우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일단 깨어난다면 시간여행자들과 기계들이 부글거리는 바깥 세계를 장악하는 건 시간문제다.

미나와 같은 호텔을 쓰고 있는 시간인들은 미나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겉보기만 보면 호텔 안은 ‘사랑의 유람선’ 같은 옛날 텔레비전 시리즈 세트 같았다. 인종과 겉보기 나이가 다양했고 온갖 언어들이 날아다녔다. 여기서 ‘외국인들’은 대부분 망명객들이었다. 신들에게 쫓겨 이 시간대로 왔다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몰려든 사람들.

그들은 미나의 입장에서 보면 미래인, 그러니까 시간여행 속에서 더 오랜 역사를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시간여행자들의 후손들로, 모두가 같은 속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역사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더 어색한 부류였다. 몇 명은 너무나도 나이가 많아 태어났을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연결도 되지 않았다. 그들에겐 자기네를 집어삼키려고 다가오는 신에게 쫓겨 다른 시간대로 달아나면서 과거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유혹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건 당연한 일상이었다. 인공지능 신들에 비하면 그들은 잡신이나 악마에 가까웠다. 프로메테우스, 케찰코아틀, 루시퍼. 신화를 만드는 자들. 경전의 주인공들. 사기꾼들.

회색 수염을 길게 기른 대머리 유럽계 남자가 미나에게 다가왔다. 그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척 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3,40년 동안 유럽 어딘가에서 유명한 사람 흉내를 내며 살았겠지. 모세나 찰스 다윈은 아닌 것 같고 십중팔구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시간여행 초보자들은 어느 시간선을 가더라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 대부분이 바뀐 시간선의 빈 칸을 채우기 위해 자원한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다음엔 자기 세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진짜이긴 한 건지 의심하기 마련이었다. 저 인간이 떠난 시간선의 루브르 박물관엔 프린터로 뜬 ‘모나리자’가 걸려 있겠지.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나요?”

남자는 다소 애매한 억양의 영어로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대사를 던졌다.

“모르겠네요.”

미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미나 씨 아닙니까? 포트 해밀턴 전투의?”

“저의 다른 버전을 만나셨군요.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거길 거문도라고 부릅니다.”

“그렇겠지요.”

얌전히 수긍한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미나와 남자는 악수 흉내는 내지만 손은 잡지 않는 시간인식 인사를 했다.

“랜슬롯 허드슨입니다. 당시 적군이었죠. 19살이었고 제 첫 번째 위장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셨고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습니다. 그 세계 시스티나 성당도 벽화가 필요했으니까요.”

역시나. 위장 전문가였군. 신 행세를 하며 세상을 바꾸는 대신 사람 속에 섞여 그들보다 조금 나은 존재인 척 하는 자들. 미나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였다. 하지만 백인 남자들에겐 과거가 재미있는 놀이터이기 마련이었다. 미나에겐 그들과 같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하찮은 재미를 위해 백인 남자로 몸을 고칠 생각도 없었다.

랜슬롯 허드슨은 계속 떠들었다. 미켈란젤로 시절에 방탕한 생활로 매독을 앓았다가 자기치료에 실패해 죽을 뻔했던 일, 어떻게든 문명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살아남으려고 수십 번의 표적 도약을 하다가 이 시간대로 떨어진 일, 유일한 문명화 지역이 조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탈리아에서 인도까지 대모험을 감행한 일, 인도에서 조선의 문명선을 만나 죽기 직전에 살아난 일. 어디서 전에 다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다른 버전의 랜슬롯 허드슨인지도 모르지. 머리 기
르고 면도하고 피부를 갈아 엎으면 저 밑에서 어떤 얼굴이 나올지 누가 알아.

“회춘 치료를 받으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내버려두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아서, 미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잘랐다.

“글쎄요. 이번엔 문명화된 지역에서 한동안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20세기 후반 미국이면 좋을 거 같긴 합니다. 많이 변하지 않은 1960년대.”

“아, 라스베가스, 할리우드, 로큰롤. 백인 남자들이 놀기 좋은 때죠.”

“다른 시대가 오기 전에 인류가 멸망한 게 제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짜 미켈란젤로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기 말을 더 잘 들어 줄 것 같은 여자들을 향해 떠났다. 반박할 기회를 놓친 미나가 이를 갈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통어의 느낌이 살짝 섞인 장황하지만 정확한 문장의 초대장이 전자메일로 들어와 있었다. 초대장 끝에 적힌 이름이 낯익었다. 여울 소리. 미나가 이 시간선에서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시청 직원이었다.


4
무인 택시가 미나를 데려다준 곳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 있는 황토색 이층 건물이었다. 외양은 비교적 현대식이었지만 원주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기술을 쓴 것 같지 않았다. 1층은 찻집이었고 2층은 식당이었다. 미나는 직원을 따라 2층의 별실로 올라갔다.

여울 소리는 혼자 창가에 앉아 부슬비가 내리는 저녁 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에 봤던 공무원 제복이 아닌 간소한 하늘색 전통 드레스 차림이었다. 현대화되어 간소해지고 편해졌지만 개량한복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인위적인 미학의 충돌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나가 들어오자 그녀는 일어나 살짝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예의차린 소소한 잡담을 받아주면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는 정갈하고 자극이 없으며 담백했다. 맵고 짠 국물에 중독되어 있던 미나의 시간선에 살던 한국인들이라면 밍밍하다고 불평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나가 보기에 이들은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배양육과 같은 새로운 재료를 쓴 방식으로 보나, 위생 습관으로 보나.

그릇들이 치워지고 국화차가 나왔다. 미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여울 소리가 본론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

“정미나 손님이 시간인이라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아차렸나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여울 소리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옷 때문인가요?”

“아뇨. 전에 우린 만난 적이 있어요.”

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도플갱어로군. 미나는 자신이 세상에 흩어진 수많은 정미나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슬슬 익숙해져가고 있었지만 이 시간선은 좀 유별났다.

“21년 전. 그러니까 제가 16살 때였지요. 제가 막 훈련을 마치고 공무원 일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정미나 손님은 나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300살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제가 직접 등록하고 숙소를 잡아드렸지요.”

“혹시 수원을 찾고 있던가요?”

미나가 떠보았다.

“아뇨, 그보다는 의미있는 일을 하고 계셨지요.”

여울 소리의 말투가 살짝 바뀌었다. 손님맞이용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졌고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으며 말 속도가 올라갔다.

“얼마 전에 시청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시간여행기의 이식 대상자가 확대되었어요. 이제 한양 시청 소속 공무원들 중 원하는 사람은 모두 시간인이 될 수 있습니다. 1년 내로 조선 공무원 전체로 확대될 것이고 2년 안엔 모든 문명인들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겠지요. 이미 인천에서는 새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공장을 위해 발전소를 증축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요. 우린 야만인이 아닙니다. 시간 발전소를 증축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부에서 일을 밀어붙이고 있다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신의 침략이 얼마 남지 않은 겁니다. 전 공개된 모든 시간선 역사를 검토해봤어요. 시간인 증원 계획이 이런 속도로 진행된다는 건 상부에서 5년 이내에 신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는 뜻입니다.”

“상부의 예측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침략시기는 순전히 신의 변덕에 달렸어요.”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여울 소리는 멋쩍게 웃었다.

“저도 성서를 공부했습니다. 코란도 읽었어요. 유럽과 서아시아에 문명을 전파하려면 그 쪽 문화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니까요. 정미나 손님은 그 쪽 종교들이 실패한 시간침략자가 남긴 잔해라는 데에 동의하십니까?”

“어느 쪽이건 별 의미가 없지요.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인류의 역사는 털실 뭉치처럼 얽혀있으니까요.”

“그렇겠지요. 어느 쪽이건 상관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건 전 이 메시지를 지금 우리의 우주관과 연결해서 읽습니다. 언젠가 밤도둑처럼 우리 시간선을 찾아와 우리를 잡아먹을 신에 대한 경고로요. 이건 21년 전에 만난 정미나 손님의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미나가 지금까지 만나고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미나들은 미나 자신과 크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속적이고 얄팍한 쾌락주의자들. 어떤 종류의 종교적 집착도 경멸하는 현실주의자들. 어떤 미나는 보통보다 게을렀고 어떤 미나는 보통보다 탐욕스러웠고 어떤 미나는 보통보다 화가 나 있었고 어떤 미나는 보통보다 야심가였지만 그래도 기본 틀에서 벗어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미나는 좀 하는 짓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성서를, 그것도 사도 바울을 인용하다니. 300년 동안 살다보니 맛이 갔나? 나도 250살을 더 살면 저렇게 되나?

“그 정미나 손님은 저희에게 중요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울 소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신은 선도, 악도 아니다. 고도의 지성과 수많은 욕망의 소용돌이가 낳은 난장판이다. 그 거대함은 어떤 의미도 없다. 우리가 직접 의미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제가 그런 말을 했군요.”

“그 정미나 손님이 했지요. 뿌리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잊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그 정미나 손님은 그 ‘말씀’을 왜 남기셨다고 하나요? 설마 제 방문을 예언한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예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예언이란 시간인 사기꾼이 원주민들을 우롱할 때 써먹는 술수에 불과하죠. 이곳 문명인들 중 그런 사기에 넘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손님이 여기 온 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예요. 아주 이상하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사건이지요.

그 정미나 손님은 예언을 하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 목표를 주셨습니다. 신을 창조하고 지배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주에 대한 우리의 임무라고요. 어떻게든 그런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늘려야 한다고요. 실패하더라도 다른 시간선에서 계속 시도하며 신의 시공간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요.”

“하지만 우리의 의미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옳고 그름이 절대적이라는 걸 어떻게 알죠? 심지어 저만해도 그 ‘정미나 손님’과 의견이 같을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신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고 있는 게 과연 생각이긴 한지 어떻게 알죠? 수많은 씨앗에서 태어나 시간선을 뚫고 만나 얽히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태어나고 소멸할지 어떻게 알죠? 영영 모를 거예요. 인간은 언제나 그 과정에서 잡아먹히거나 소외되어 왔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계속 과거로 달아나는 거죠. 신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세계로. 그곳에서 우리가 아는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그 정미나 손님도 그 과정을 통과하셨지요. 그리고 그런 도망이 피곤하고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니까요. 올바름을 추구하고 그에 대한 의지를 세상에 남기지 않을 거라면 우리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우리가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미나는 말없이 여울 소리의 달뜬 얼굴을 응시했다. 시간군대의 침입 전까지 13년 동안 기독교 공동체에서 살았던 그녀에게 그런 표정은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 정미나가 막연한 원론만 늘어놓지는 않았겠지요.”

미나는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250년 동안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라도 사람 자체가 바뀌었다고 믿긴 어려워요. 그런 헛소리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시켰을 것 같지도 않고. 분명 여러분에겐 그 정미나에게서 전달받은 구체적인 계획이 있겠지요. 그 계획은 분명 제가 모르는 지식과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겠고 여러분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해봤겠지요. 거기에 대해선 행운을 빌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하는 거죠?”

“우리 우주엔 그런 계획과 목표를 가진 더 많은 정미나가 필요하니까요.”

여울 소리가 대답했다.


5
미나에게 정중한 작별 인사를 한 여울 소리는 1층 찻집으로 들어갔다. 유리문 너머로 그녀의 동료임이 분명한 사람들이 보였다. 여자가 일곱 명, 남자는 네 명이었고 남자 한 명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미나는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유리가 테라스 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슬비는 얼마 전부터 가루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은 얇은 눈 모자를 쓴 유리의 자가용으로 달려갔다.

“랜슬롯 허드슨이란 남자를 알아?”

차 안에 들어가 문을 닫으며 유리가 말했다.

“몇 시간 전에 호텔에서 만났어. 왜?”

미나가 대답했다.

“죽었어. 한 시간 전에.”

“어쩌다가?

“시간여행기의 오작동 때문이었나봐. 회춘장치와 충돌을 일으킨 거지. 몇 십 년 동안 미켈란젤로 흉내를 내며 사느라 기계 관리를 제대로 못했나봐. 뇌와 척추가 완전히 타버렸대.”

“저런. 하지만 세상엔 다른 랜슬롯 허드슨도 많으니까. 그 중 몇 명은 기계관리를 꼼꼼하게 하겠지.”

자동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대로로 접어들자 유리는 운전을 자동조종으로 돌리고 운전대에서 손을 땠다. 차의 조명이 서서히 밝아졌고 차창은 어두운 거울처럼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었다.

“여기 내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미나가 물었다.

“한양에 있는 문명인 절반이 네가 여기에 있는 걸 알아. 더 되는지도 모르지.”

유리가 대답했다.

“네가 전에 말했던 종교 비슷한 게 이거였어? 정미나교?”

“아니, 그건 다른 거야. 대부분 종말론 형태로 비문명인들 사이에 퍼져있지. 그 정미나가 갖고 온 건 복음 따위가 아니고 저 사람들이 믿는 것도 종교 같은 건 아니야. 그 계획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저 사람들도 그걸 알아. 그래도 해야 하는 거지. 우주 속에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여울 소리의 친구들은 시간 발전소 인공지능을 이용해 직접 초기 조건을 통제할 수 있는 신의 씨앗을 만들려고 해. 그걸 모두 알고 있다고? 그런데 시정부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어차피 여기 시간인들은 이 시간선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잖아. 다음 침략지를 정하고 군대를 모을 때까지 버텨주기만 하면 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지. 여울 소리가 무슨 짓을 해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어. 준비할 시간이 좀 짧아질 뿐이야.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사정이 달라. 여울 소리가 자기 가족 이야기를 했어? 안 했다고? 부모 모두가 도망 노비 출신이었어. 심지어 아버지는 해방 후 20년 뒤에 지방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자기네 집에서 일하다 달아난 노비 말은 안 듣겠다고 악에 받쳐 발악하던 양반 쓰레기에게 살해당했지.

여긴 반 세기 전만 해도 인구의 절반 정도가 노비인 나라였어. 시간침략자들은 3년 만에 이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수염 기른 늙은 양반 남자들로부터 빼앗고 나라를 해방시켰어. 문명화시킨 거지. 여울 소리 같은 사람들에게 문명과 발전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아? 그런 사람들에게 신에게 쫓겨 계속 다른 시간대로 달아나기만 하는 우리가 얼마나 한심해보일까? 자기네들을 문명화시켜주었다고 그런 경멸감이 사라질까?”

미나는 휴대전화를 켜고 여울 소리가 이메일로 보내준 정미나 경전을 열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긴 책으로, 미나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개념과 이름들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뇌에 삽입한 보조해석장치의 도움을 받아도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이 내용이 얼마나 말이 되느냐를 판단하는 건 그 다음 일이었다. 여울 소리는 이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누굴 가르치겠다고 내가 거길 갔던 거지?

“서두를 것 없어.”

유리가 말했다.

“급할 것 없잖아. 시간도 많고, 세상도 많고, 너도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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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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