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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반세기 전에 석가탑의 사리함에서 우연히 발견된 다라니경은 이제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로 인정받고 있다.


무구정광 다라니경^706~751년 사이에 제작된 세계에서 거ㅏ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국보 123호로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금년 8월 초에 나는 케임브리지에서 열렸던 국제동아시아과학사학회를 참석하고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찾았다. 실로 몇년만의 방문이었다. 몹시 더운 여름날인데도 불구하고 박물관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각종 피부색의 사람들. 별의별 언어를 가진 인간들이 모여들어 실내는 더 덥게 느껴졌다. 한국사람도 꽤 많았고, 일본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젊고 발랄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별로 가볍지 않았다. 중국이나 일본의 전시물에 비해 한국의 전시물이 여전히 빈약했기 때문이다.

대영박물관에서

그런 섭섭함은 인쇄와 책의 전시실에서 더욱 고조되었다. 중국책과 일본책의 전시장은 있어도 한국서적 전시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옛 서적의 훌륭함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기분은 지금까지 하도 여러번 겪어봐서 웬만큼은 면역이 돼 있었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마음이 더 무겁기만 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거기서 여럿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몇년 전에 갔을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적어도 한국 책의 전시는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의 한국이 얼마나 달라졌는데…. 한국학의 연구성과도 눈부시게 커졌지만 대영박물관에서는 인정해주지 않는 듯 했다.

하루 전에 런던과학박물관에 갔다 온 한국외국어대 박성래교수의 푸념이 다시 생각났다. 측우기의 전시물도 없어지고, 인쇄기술코너의 한국관계 전시물도 허술해지고…

세계가 인정하는 고도성장. 88서울올림픽의 성공. 런던 거리의 어디서도 만나게 되는 한국의 젊은 관광객들. 이처럼 모든 것이 다 커졌는데 영국박물관들의 한국과학기술유물 전시는 오히려 더 줄어들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세계의 유명 박물관들에 한국의 전통 과학기술문화의 전시를 제대로 하는 것 만큼 효과적인 한국문화의 선양방법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사람들은 이 방면으로 잘 파고 들어간다. 대영박물관에 새로 마련된 일본갤러리는 그 좋은 보기다. 일본의 사(私)기업 후지쓰와 코니카가 출자했다는 현판도 당당하기만 했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그렇게 될 것인가.

한국은 인쇄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다.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완전히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특히 중국학자들은 당나라에서 인쇄술이 처음 발명됐다는 종래의 학설을 그대로 밀고 나가고 있다. 대영박물관의 전시를 보고 내가 그렇게 섭섭해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분노와 기쁨이 교차해

다라니경은 1966년 10월 13일에 발견됐다. 24년전의 일이다.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임이 증명된지 4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세상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면 언짢아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너무도 극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충격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다시 가보자.

1966년 가을.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 보수공사 현장은 뜻밖에 일어난 엄청난 사고로 인해 비통에 잠겨 있었다. 탑을 수리하기 위해 옥개석 하나를 들어올리다가 떨어뜨려 그만 한쪽이 깨지고 만 것이다.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욕을 퍼부었지만 석가탑은 거적에 덮인 채 말이 없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큰 실수였다.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은 기가 막혀 말도 못할 정도였다. 받침목으로 쓰던 굵은 나무기둥이 힘없이 부러질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세상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신문들은 '세계최고(世界最古)의 목판인쇄(木板印刷) 발견'이란 기사를 1면 톱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문화적이라기 보다는 학술적인 발견에 그렇게 많은 보도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일은 별로 없었다.

이래서 슬픔과 분노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돌변했다. 비록 석가탑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영예와 자랑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실로 위대한 부활이었다. 석가탑 사리함의 뚜껑을 열고 나온 보물중의 보물, 무구정광 대다라니경(無垢淨光 大陀羅尼經)은 세계인쇄기술사의 첫 페이지를 뒤바꿔 놓을 수 있는 커다란 발견이었다.

한 줄에 평균 8자를 새긴 62줄짜리 목판 12장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다라니경 두루마리 한 권이 인쇄기술 기원에 대한 종래의 학설을 그렇게 간단히 뒤집어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인쇄술은 언제부터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은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가지로 논의돼 오던 과제의 하나였다. 대개의 학자들은 인쇄가 중국에서 시작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해 왔다.

종교에 대한 열정으로

세계에서 제일 먼저 종이를 발명하고 먹을 만들어 글씨를 쓴 중국인. 이들이 문화의 전성기였던 당나라 때에 불경이나 역사책 같은 것을 여러벌 만들기 위해 인쇄라는 방법을 생각해냈을 것이라는 설명도 아주 자연스럽다.

그래서 학계는 1960년대까지, 목판인쇄는 당나라문화의 전성기였던 712년에서 756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본 구드리치(Goodrich)의 학설에 대체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라니경 인쇄 두루마리가 국내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두루마리는 세로 6.5cm, 가로 52cm 가량 되는 인쇄지면 12폭으로 총길이가 7m 쯤 되었다. 아무튼 이 인쇄물의 출현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인쇄술의 시작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낳게 했다.

학자들은 이 새로운 사실을 앞에 놓고, 그것이 중국이 아닌 신라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의문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제기됐다. 신라보다 모든 문화면에서 선진국이었던 고구려와 백제에서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고, 왜 하필 신라에서 시작되었을까.

새로운 불교국가로 자리잡아 가던 신라는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세우고, 불국사를 지어 부처의 나라, 불교의 나라임은 만방에 드러내고 열광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정열을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에서 보다 더 드높게 표출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불경을 여러 벌 만들어 내는 일로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도 770년경에 백만탑 다라니경을 인쇄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의 사정도 불교열광기의 신라와 다를 바 없었다. 양국의 정열적인 불경편찬의 배경은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신라인의 열정은 그 종교경전의 제작과정에서도 여실히 표출됐다. 이를테면 새로운 기술의 혁신적 개발로 이어진 것이다.

종이에 붓으로 한자한자 글씨를 써서 한권씩 책을 만들던 신라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그 정보를 전달하게 되었다. 종이를 매체로 한 인쇄를 통해 규격화된 정보의 대량생산과 전파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비록 석가탑 다라니경이 붓으로 쓰던 종래의 것보다 멋있고 세련된 두루마리본은 아니지만 편리한 점이 무척 많았다. 단번에 한장씩 찍어내는 신속함과, 한자도 틀리지 않고 똑 같은 것을 여러 벌 만들어 내는 대량제작을 가능하게 했다.

신라인은 부처님께 드리는 '때묻지 않고 깨끗한' 기도문을 '똑같이' 여러 벌 만들어서 새로 쌓는 탑마다 넣을 수 있었다. 신앙의 표상으로 탑안에 새로운 기술의 소산이 봉안된 것이다.

신라인들, 특히 기술자들은 불교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신라왕조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축적돼 있던 모든 기술을 하나로 해서 그 맑고 진실한 기도문을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그만한 기술이 갖추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스스로 개발한 전통적인 기술도 적지 않았다. 신라의 기술자는 청동으로 도장을 만들었고, 도공들은 나무에 새긴 형틀로 아름다운 무늬의 기와를 수없이 찍어 내었다.

이것들은 사실상 그대로 목판인쇄의 기술적 바탕이 되었다. 나무에 새긴 글씨틀에 먹을 묻혀 종이에 찍는 것이 곧 인쇄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기술자들은 목판인쇄의 절실한 필요성과 기술적 바탕 그리고 아이디어라는 세가지 요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지고 상승돼 새로운 기술혁신으로 이어진 것이 다라니경의 제작에서 보는 목판인쇄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발전이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다라니경이 목판인쇄의 시작이라는 새 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국내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견해차이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다라니경은 706~751년 사이에 인쇄된 목판본이라고 보는 견해가 이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목활자를 이용한 목판인쇄는 금속인쇄와 같은 「반복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글자가 아름답고 정교해 선비들의 많은 사람을 받았다.


지질(紙質)도 세계 수준

이러한 국내학자들의 견해는 차츰 외국학자들에게도 수용되고 있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쇄본은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 두루마리라는 사실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여태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일본에서 770년대에 인쇄된 백만탑 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왔다. 수천개의 아주 작은 목탑 속에 들어있는 이 인쇄물은 그 제목이 같은 다라니경이라는 공통점까지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석가탑 다라니경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금방 갖게 한다. 신라사람들은 큰 석탑에 큰 두루마리 다라니경을 봉안했고, 일본사람들은 작은 목탑에 한장짜리 작은 다라니경을 말아서 봉안한 것이다.

일본의 백만탑 다라니경을 찍어낸 기술은 신라에서 수입한 기술임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시작된 목판인쇄술이 일본에 건너가서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최근 문화재관리국은 석가탑 다라니경의 보수·보존처리작업을 완료했다. 20여년간 불안하게 그대로 방치했던 다라니경이 훌륭하게 보수되고 잘 보존된다니 반가운 일이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일본의 기술팀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다라니경을 찍은 닥종이는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훌륭한 지질(紙質)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신라의 제지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문화재위원회에 이 사실이 보고됐을 때, 나는 기쁨보다도 아쉬움이 앞섰다. 우리는 언제나 되어야 우리의 옛 과학기술유물을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제대로 연구하는 전문적인 연구팀이 구성될 수 있을 것인지.

우리의 전통 제지기술을 완벽하게 살리면 현대인이 멋있게 쓸 수 있는 격조 높은 종이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30년전에 내가 제안했던 '민족산업'을 전통기술에서 찾아내자는 연구과제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파고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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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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