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 인기와는 거리가 멀던 과학서적이 마침내 '10만부 판매시대'에 돌입했다. 그러나 양적 팽창이 곧 질적 상승은 아니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지난 9월10일 오후. 서울 도심의 한 호텔은 일시에 몰려든 2천여명의 인파로 때아닌 성황을 이뤘다.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유치원생들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서로 앞자리를 다퉈가며 곧 강연을 시작할 스티븐 호킹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의 열기는 호킹 박사의 지명도를 새삼 확인시킨 것인 동시에 이제 우리사회에서 과학자도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못지않은 대중의 스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싱징적인 '사건'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같은 해프닝이 우발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2~3년전부터 일고 있는 과학서적 출간붐과 그 수요의 급격한 팽창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물리여행'(김영사) '시간의 역사'(삼성출판사)와 같은 대중적인 과학서적이 중판을 거듭해 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이른바 '교양과학서적'의 출판과 판매가 눈에 띄게 신장되고 있는 요즘이다. 올 여름만해도 서울시내 대형서점들은 다양한 판매전략으로 교양과학서적부문에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방학에 맞춰 교양과학도서20선을 선정했던 교보문고의 특선도서 판매대에는 연일 학생과 학부모들이 북적댔다. 또 '그대 반짝이는 별을 보거든'을 낸 시어사(社)의 주관으로 UFO사진시사회를 가졌던 종로서적에는 '독자와의 만남'이란 코너가 생긴 후 최대 인파인 1천여명의 독자가 몰려들었다.
매주 2~3종의 신간 선보여
출판업계 종사자들은 이 같은 대중적 열기가 확산된 것이 대체로 88올림픽 이후라고 입을 모은다.
교보문고 영업부의 오영철 주임은 "올림픽 기간동안 선보인 컴퓨터나 첨단 기재 운용 등이 일반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고 봅니다. 게다가 그 당시 과학고 과기대가 설립돼 여기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과학적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고 밝힌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국민학교에까지 컴퓨터교육이 도입되는 등 사회전반에서 첨단산업이나 과학적 사고에 대한 이해와 숙련이 강조되므로 너나없이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출판협회가 집계한 90년 상반기 출판통계를 보면 과학분야에서 물리학 수학 등 순수과학은 중판을 포함해 총 3백65종, 의학 공학 등 기술과학은 1천7백77종이 간행됐다. 이것은 전체 출판물 2만2천4백종의 1할에 불과한 것으로 3천9백20종이 간행된 문학분야나 2천5백19종의 사회과학분야에 아직 한참 뒤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분야 자체로만 보면 대부분 대학교재나 전문서적이 태반을 이루던 과거와는 달리 교양용의 과학서적 출판증가가 현저하며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고 있다. 참고로 상반기 순수과학 신간 중 교양과학의 비(比)를 살펴보면 방학중인 1월에는 39권의 신간 중 '제로의 발견'(대흥) 등 13권이, 개강 직후로 대학교재가 쏟아져 나오는 시기인 3월에는 총 44권 중 '지구에서 퀘이사까지'(범양사 출판부)등 9권이 교양서적이었다. 이를 보면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거의 매주 2~3권씩 교양과학 분야의 신간이 출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잘 팔리는 책'은 아직 소수
그러나 이러한 붐 가운데도 '잘 팔리는 책'과 '안 팔리는 책'은 엄연히 구분된다. 중판을 거듭하는 책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 우선 분야별로 보면 천문학이나 물리학 수학 분야가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편이다. 또한 제목으로 분류하면 '재미있는~' '흥미있는~' '생활속의~' 등 독자가 접근하기 쉽고 지루하지 않다는 느낌을 강조하는 것일수록 인기가 높다. 의학분야의 한글로 풀어 쓴 '동의보감'이나 고혈압 암 예방 등 건강관련서적도 꾸준히 팔려나가는 책들이며 형식에서는 독자의 주의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퀴즈나 그림, 만화를 이용 시각적으로 이해를 이끌어내는 책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종로서적 영업부의 김남식씨는 '문학분야에서 수필이 강세인 것과 비슷한 경향'이라고 나름대로 풀이한다. "과학이라면 일단 어렵다고 겁부터 내게 되므로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만큼 재미있고 쉬우면서도 유익한 정보가 담긴 책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판매에서의 이같은 호황만으로 과학교양도서의 앞날을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오히려 이제 출발단계에 있는 교양 과학출판이 자칫 잔뜩 부푼 독자들의 호기심만 자극하다 말거나 과학에 대해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교양과학서적이 대중과 과학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염려와 기대는 더 크다.
최근에 쏟아져나오는 과학책들에 대한 비판은 이들이 얼마나 독자에 밀착해있는가로부터 시작된다. 즉 '많이 팔린다'는 것이 결코 '많이 읽히고 이해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수준 감각 못 맞춘다
평소 교과서 이외의 과학교양서적을 자주 찾아본다는 하현호군(인헌고·2년)은 "기본적인 개념설명이 부족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들보다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찾느라 더 애를 먹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나서 보면 어려웠던 그 개념들이 우리가 학교수업을 통해 배운 용어나 설명으로 바꿔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자주 발견합니다."라고 불만을 털어 놓는다. 대부분의 교양과학서적이 '중학생이상 누구나'를 독자층으로 삼고 있음에도 실제로 독자는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를 전문가들은 부실한 번역서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과학출판계의 전문기획팀인 과학기술출판연구회의 이현모 회장은 "우리와 문화나 과학수준이 다른 나라의 책을 번역할 땐 우리 실정에 맞게 재창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번역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책만해도 메이지유신 이래 꾸준히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온 일본사회의 소산입니다. 60년대 들어서야 과학기술에 투자를 시작한 우리사회의 수준에 그들의 것을 여과없이 적용하기는 무리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번역서의 문제는 문화적 풍토나 교육방법, 과학수준차에서 오는 어려움 뿐만이 아니다. 원전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는 무책임한 번역이 있는가하면 과학서적에는 치명적인 용어의 오역(誤譯)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 예로 황산을 유산(酼酸)으로 쓰는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적는가 하면 청동을 황동으로 쓰거나 주석을 석으로만 표기하기도 한다. 이는 모두 전문적인 과학서적번역가가 없고, 있다해도 영세한 출판사 사정으로는 충분한 보수를 주지 못해 생겨나는 문제점들이다.
전문저술가의 부족과 출판사의 영세성 문제는 교양과학도서출판의 현단계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대목. 대중용 과학도서가 드물었던 20년전부터 문고판형태의 교양서를 만들어온 전파과학사 대표 손영일씨의 고충은 모든 영세출판사 공통의 것이 아닐 수 없다. "3백여종의 책을 내는 동안 2천부 초판만으로 절판된 책이 부지기수니 사세(社勢)가 확장되기는 커녕 현상유지도 힘들어 재투자는 마음 뿐입니다."
번역료나 저작료조차 넉넉히 못 주는 형편에 전문기획팀에게 장기적인 기획을 의뢰하거나 감수를 받는다는 건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과학책의 경우 적절한 사진이나 그림이 필수적이지만 좋은 화보자료를 쓰려해도 자금력이 닿질 않는다. 결국 영세한 자본이 허술한 책을 낳고, 이것이 다시 판매부진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독자를 개발하라
한편 최근의 몇몇 과학도서가 대중적 인기를 모아 판매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자 기존의 사회과학출판사나 대학교재전문출판사 대형종합출판사 등이 대거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이들로 인해 책의 종류나 출판량의 확대는 보다 가속화될 전망이고 결국 독자가 선택하는 책만이 살아남아 과학출판업계에 성공가 실패의 양극화현상이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신들의 성공비결을 '독자를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김영사의 경영전략은 이러한 각축전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우리나라 출판사로는 드물게 시장조사나 자료조사를 도맡는 기획진이 비교적 고정적으로 확보돼있고 광고도 적극 이용한다. 독자에 대한 서비스도 강화, '재미있는 별자리여행'을 발간한 이후로 독자초청의 천문관측회 등을 진행해 독자관리에도 힘쓰고 있다. 소극적으로 책을 사가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할만한 독자층을 적극적으로 길러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독자개발 못지않게 시급히 제기되는 것이 바로 우수한 저자의 확보다. 과학저널리스트 현원복씨는 과학출판계의 저자 기근이 "우수한 과학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대중에게 어필할만한 글을 쓸 전문가가 드물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과학자들의 경우 자기분야의 전문지식에는 해박해도 글쓰기를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대중용의 저술을 경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19세기 말에 영국의 과학자 패러데이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주옥같은 강연을 남긴 것이나 20세기의 아인슈타인 호킹 등이 전문연구 뿐 아니라 대중교육에도 열성을 보였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한 사회의 과학수준을 끌어올리려면 전문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대중과 만나야한다는 지적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학저술가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많은 시간과 투자를 통해서야 길러질 수 있다. "57년도에 소련이 미국을 앞질러 스푸트니크호를 우주에 쏘아올리자 미국이 자기반성끝에 제일 먼저 한 일이 과학교육의 개편과 대중적인 과학저술가의 양성이었습니다. 이 때 컬럼비아 하버드대 등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들에게 특수교육받은 저자들이 오늘날 미국의 언론이나 출판계의 과학분야를 탄탄히 지탱하고 있지요." 현원복씨의 말이다.
생활에서 출발하는 과학
전문필자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역할은 과학과 대중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최근 생활속의 과학적인 궁금증을 학생들과 함께 풀어 '살아있는 과학'(청년사)이란 책을 펴낸 현종오 교사(인헌고·화학)는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과학'을 강조한다. "우리들 누구나 갖고 있는 과학적 호기심이 제대로 키워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과 과학자의 체계적인 지식이 맞물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책이 재미있고 쉬우려면 독자들의 호기심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부터 밝혀 여기에 체계적인 지식으로 살을 붙여줘야 합니다."
국내에 몇 안되는 전문필자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한양대 김용운 교수도 교양과학서가 인간과 과학이 별개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인수분해의 공식은 달달 외워도 인수분해가 왜 만들어졌으며 수학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아는 학생은 없습니다. 입시용 과학교육, 철학없는 기능교육만 강조되다보니 과학분야에 전문인은 많이 배출됐어도 사회전체에 과학적 사고의 뿌리는 깊지 못한 형편"이라고 꼬집는다.
한 사회의 과학발전과정에서 전문과학인 양성 못지않게 중요한 과학대중화. 그 일선을 담당하는 교양과학도서출판이 출발단계인 지금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해서 어두운 앞날을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문제점을 극복하는 가운데 질적으로도 발전을 거듭하고 대중과의 공감대도 더 확산시켜 나갈 것이라는 기대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판업계나 전문과학인들의 노력 뿐 아니라 이들을 지원할 기업이나 정부의 사회적 투자도 절실히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