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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암의 정체

자율기능 상실한 세포사회의 무법자

암의 본질이 정확히 파악되면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노화의 비밀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산업의 발달로 인류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게 됐으나 부산물로 생산된 많은 발암물질에 의해 암발생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암은 사망원인 1~2위를 차지한다. 그런데 암의 치료율은 일부암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만족스럽지 못한 실정이어서 암 노이로제가 생길 정도로 암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최근 이러한 암에 도전하는 현대의학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암의 신비가 어느 정도 밝혀져, 이제는 암의 발생과정과 특성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은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러면 현재까지 밝혀진 암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자

무질서한 증식

암이란 '암세포가 증식하면서 신체에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암세포는 '정상적인 조절기구의 통제를 받지 않고 무질서하게 증식만을 계속하는 세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율성을 상실하고 과도한 증식을 하는 세포사회의 무법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암세포는 외부로부터 침입한 것이 아니라 몸속의 정상세포가 발암과정을 거쳐 발생한 것이다.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화할 때 여러 가지의 세포의 성질이 변화하는데, 이것을 형질전환(形質轉換,transformation)이라 부른다. 형질전환의 내용은 △접촉저지(接觸沮止)기능의 상실, △무한정한 증식 △세포 고유의 기능 망각 △세포의 구조변화와 이질성(heterogeneity) △세포 사이의 접착력 저하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는데 끊임없는 신진대사를 통해 건강한 생명을 유지한다. 즉 노쇠한 세포나 병든 세포는 새로운 세포로 대치되는데, 새로운 세포는 간세포(幹細胞, stem cell)에서 만들어진다. 간세포는 신체의 곳곳에 산재하는 미분화 세포로서 여러 종류의 세포로 분화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세포다. 조직이 재생될 때는 간세포로부터 증식이 시작되는데, 아주 정밀한 통제하에서 증식과 분화를 해 꼭 필요한 세포가 꼭 필요한 수만큼만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상처를 받아 피부의 일부가 손상되면 상처주변에 있는 간세포가 증식과 분화를 해 상처가 치유되는데, 주변부로부터 자라온 세포가 상처의 중간부위에서 서로 만나는 순간, 증식은 중단된다. 이렇게 증식하고 있는 세포의 세포막이 다른 세포막과 접촉하면 증식이 즉시 억제되는 기능을 접촉저지 기능이라 한다. 암세포에서는 이 기능이 상실돼 증식억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신체내의 모든 정상세포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기능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피부세포는 외부의 유해물질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고 몸의 형태를 유지하며, 위장의 세포는 소화를, 눈과 귀의 세포는 보고 듣는 일을 한다. 그런데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면 자신의 특유한 기능은 망각하고 증식만을 목표로 하는 세포로 변하여 결국은 세포위에 중첩돼 덩어리가 형성된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와는 달리 세포의 모양과 크기가 변한다. 정상세포는 세포분열을 하면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세포가 균일하게 생기는데, 이것을 동질성(同賢性, homogeneity)이라 한다. 그러나 암세포는 세포마다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이는 세포의 골격이 파괴되고 단백질의 합성이 증가됐기 때문이다.

암세포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다른 장기로 퍼져가 증식을 하는 것이다. 이는 정상세포와는 달리 세포와 세포사이의 접착력이 약해 비교적 쉽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암은 손톱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어느 장기에나 다 생길 수 있으며, 종류도 다양해 사람에게 발생하는 암의 종류는 약 2백70종으로 보고됐다.

왜 암에 걸리나?

인간의 몸은 끊임없는 분화와 증식으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생명을 유지하는데, 분화와 증식은 아주 정교한 통제 시스템의 조절을 받기 때문에 오차가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분화와 증식의 기막힌 정밀도는 인체의 성숙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한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1개의 정자와 1개의 난자가 만나 자궁 속에서 분화와 증식을 계속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생명으로 태어난다. 태어난 뒤에는 무수한 세포분열과 분화를 계속해 성인이 된다. 그런데 기형아로 태어나거나 발육 도중 기형아로 변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필요한 세포를 정확히 필요한 만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포의 분화와 분열에는 어떤 유전자가 깊게 관여하고 있는데, 이 유전자에 변화가 일어나면 암세포로 변하는 것이 증명됐기 때문에 지금은 암유전자라 부르게 되었다.

즉 암유전자는 정상적인 세포의 분화와 증식에 필수적인 유전자로 아주 정교히 조절되고 있다. 그런데 발암물질이 암유전자에 작용하면 정상적인 조절기구의 통제를 받지 않고 증식만을 계속하는 암세포로 변한다.

그런데 몸속에 암세포가 탄생했다고 모두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몸속에는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연방어기구인 면역 감시기구가 있어 암세포가 생기면 즉시 공격해 파괴시킨다. 실제로 생겨난 대부분의 암세포는 주로 대식구(大食球)와 임파구로 구성돼 있는 면역감시기구의 공격을 받아 사멸하는데, 만일 암세포가 이러한 면역학적 공격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면 암이 된다. 그리고 호르몬제나 면역억제제 등과 같이 면역능을 억제하는 약물을 오래 사용하면 암 발생률이 높아지는 것도 이러한 약물 때문에 면역감시기구의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또한 암세포는 증식하면서 환자의 면역성을 저하시켜 암세포 증식에 유리한 상황으로 신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암은 더욱 쉽게 자라게 된다.

이러한 발암과정은 주로 발암물질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되는데, 발암물질은 발암화학 물질 바이러스 방사선 그리고 자외선이 대표적이다(PART IV 참조).

대부분의 암은 발암물질이 유발하나 일부의 암은 선천적으로 발생한 유전자의 결함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이는 유전적으로 암이 잘 발생하는 체질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다수의 암 발생에 있어 발암물질이라는 환경적 요소가 유전적 요소보다 훨씬 크게 관여하기 때문에 극히 일부의 유전병을 제외하고 암 체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암은 각자의 정상세포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암 자체는 전염성이 없다. 그런데 함께 생활하다 보면 암을 유발하는 화학물질에 동시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고, 바이러스의 경우는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암이 다발하는 가정과 직장이 있는 것이다.

선천적인 유전은 극히 드물다

 

(그림1) 암발생과정^발암물질에 의하여 정상세포가 발암개시단계와 발암촉진단계를 거쳐 암세포로 형질이 변화되며 증식단계를 거쳐 암이 발생된다.


세포속의 암유전자는 분화와 증식을 하지 않을 때는 비활성 상태로 존재한다. 이렇게 잠자는 상태의 암유전자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하면 세포는 형질전환을 일으켜 암세포가 된다. 암유전자가 활성화되는 원인은 발암물질에 의한 경우와 선천적인 염색체의 이상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염색체의 이상으로 유발된 암은 눈에 생기는 망막아세포종, 신장에 생기는 윌름종양 그리고 만성골수성 백혈병이 대표적인 것이다. 반면 선천적인 염색체 이상으로 유발되는 암은 전체암 발생에 비해서 발생빈도가 아주 낮다.

대부분의 암은 발암화학물질에 의해 유발 되는데, 이때에는 통상 3단계의 과정을 거쳐 암이 발생한다(그림 1). 먼저 발암개시단계와 발암촉진단계를 거쳐 암세포가 탄생한 뒤 증식단계를 거쳐 어느 정도 자랐을 경우에 비로소 암이라 진단한다. 의학적으로는 발암개시를 유발하는 인자를 개시(開始)인자라 하며 발암촉진에 관여하는 인자를 촉진인자라 한다. 보통사람들은 흔히 개시인자와 촉진인자를 통틀어 발암물질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려면 먼저 죽지 않고 영원히 분열할 수 있는 불멸의 형질을 획득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개시인자에 의하여 암유전자가 활성화돼 일어난다.

모든 세포는 수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정상세포는 대략 60회 정도 분열을 하면 더 이상 증식을 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런데 개시단계를 거친 세포는 촉진인자(TPA)에 의해 자극되면 암세포로 변한다. 촉진 인자는 정상세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상세포가 촉진인자에 노출되면 세포는 비후(肥厚)되고 증식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상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나 발암물질로 개시된 세포는 촉진인자에 의해 암세포로 변한다(그림2).
 

(그림2) 발암촉진인자의 역할^정상세포와 개시된 세포에서의 발암촉진인자의 역할. 피부세포에 발암촉진인자인 TPA를 뿌져주면 정상세포는 비정상적인 비후와 증식이 일어났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나, 발암개시인자에 의해 유전자가 변한 세포는 암세포로 변해 증식을 계속한다.


밝혀진 암유전자 40여종

현재까지 밝혀진 암유전자는 약 40종이다. 인간의 암발생에 특히 중요한 암유전자는 myc 유전자 ras 유전자 그리고 erb B 유전자이다. 이러한 유전자가 만드는 산물을 myc 단백질 ras 단백질 그리고 erb B 단백질이라고 부른다. myc 단백질은 세포속의 유전자와 결합해 정상세포를 불멸의 세포로 바꾸는 성질이 있다. ras 단백질이나 erb B 단백질은 세포막에서 핵 속으로, 단백질을 합성하도록 지속적인 정보를 보낸다. 이 정보를 이용해 세포는 계속 단백질을 합성한다. 만일 myc 단백질에 의해 불멸의 세포로 변한 세포에 ras 단백질 또는 erb B 단백질이 첨가되면 암세포로 변한다. 이는 2개 이상의 암유전자가 활성화 됐을 때 암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암물질로 암유전자가 활성화되는 기전은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될 수 있고, 암유전자의 증폭 또는 암유전자를 조절하는 조절 유전자의 변화 때문일 수 있다. 필자의 소견은 이러한 기전이 모두 암을 일으키는 데 관여하리라 생각된다.

바이러스도 암을 유발한다. 동물의 암에서는 바이러스가 발암에 크게 관여하나 사람의 암에서는 큰 역할을 못한다. 그 이유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런데 모든 바이러스가 암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고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인간 세포의 유전자와 결합해 암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특정 바이러스가 있다. 사람에 발생하는 암 중 바이러스와 관계가 깊은 암은 EB바이러스에 의한 인후암과 임파종, 유두종 바이러스에 의한 자궁암, HTLV-1바이러스에 의한 백혈병, 그리고 B형간염 바이러스에 의한 간암 정도다. 그런데 B형 간염바이러스의 경우는 백신의 보급으로 다음 세대에는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

방사선도 암을 일으킨다. 방사선은 세포핵 속으로 직접 침투해 유전자에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때 전달된 에너지에 의해 암유전자가 활성화되면 암이 유발된다. 주로 백혈병 골육종 그리고 폐암의 발생과 관계가 깊다. 또한 자외선도 세포의 유전자를 파괴시킬 수 있으나 투과력이 약하기 때문에 신체 내부 장기의 암은 유발하지 못하고 주로 피부암을 일으킨다.

이렇게 암세포는 여러 가지 원인과 기전으로 발생된다. 실제로는 위에서 언급한 과정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으로 발생된다. 같은 종류의 암도 환자에 따라 발생기전이 다를 수 있다.

장소의 제한이 없다

암세포는 끊임없이 증식함으로써 많은 영양분을 소모한다. 그 결과 환자는 기운이 없고 쉬 피로하며 영양부족 상태가 된다. 또한 암세포는 한군데서만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조직으로 파고 들어가 증식한다. 이것을 침윤(浸潤)이라고 한다. 한편 암세포는 세포와 세포사이의 접착력이 약해 잘 떨어진다. 떨어진 암세포는 임파관이나 혈관을 타고 흘러가 먼 조직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증식하기도 한다. 이를 전이(轉移)라고 한다.

침윤과 전이가 일어나 조직이 파괴되면 심한 기능장애가 유발되고, 신경이 압박되면 통증이 생기며, 혈관이 침범돼 파열되면 출혈이 생긴다. 실제로는 암세포가 잘 퍼져 가는 조직이 있다. 이는 각각의 암세포의 성질과 암이 처음 발생된 장기의 해부학적 구조, 즉 임파선 또는 혈관의 주행과 관계가 깊다. 비교적 흔한 암을 예로 들어보면, 위암의 경우는 위벽주위의 임파절과 간으로, 간암은 복부 임파절과 폐로, 폐암은 목의 임파절과 뇌로, 자궁암은 질 방관 직장 및 폐로, 대장암은 간으로, 그리고 직장암은 폐로 잘 퍼져간다.

결론적으로 체내의 암세포는 덩어리를 만들고 침윤과 전이를 하여 한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암에 도전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암의 발생과 성장에 대해 어느 정도 신비의 베일을 벗기는데 성공해 이제는 '암을 정복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여야 하나'를 알게 됐다는 점이다.

암을 연구하다 보면 자신의 세포 속에 자신을 파괴시키는 비밀이 숨어있는 생명의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비밀은 암유전자의 형태로 간직되어 있다. 정상 상태에서는 세포의 분화와 증식에 깊게 관여하는 아주 중요한 유전자가 발암물질에 노출되면 자신을 파괴시키는 암유전자로 변하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의 본질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암의 본질이 정확히 파악되면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노화의 비밀도 함께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

1990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홍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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