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 이전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대한 의문이 여러번 제기됐다. 갈릴레이는 단지 경사면실험을 통해 이러한 의문들을 이론화했을 뿐이다,
힘과 운동에 관해서는 이미 그리스시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했다. 그는 운동하는 물체의 빠르기가 그것을 밀거나 잡아당기는 힘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낙하운동에 관해서는 본질적으로 지면에 끌리는 성질이 강한 무거운 물건일수록 빨리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천계(天界)에 대해서'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움직이는 물체는 어떤 경우에도 큰 것이 빨리 움직인다. 불이나 흙의 덩어리는 크면 클수록 항상 자기자신의 장소를 향해서 그 만큼 빨리 운동한다." 이 이론은 그후 2천년동안 의심받지 않았다.
사고(思考) 실험
갈릴레이는 무거운 물건일수록 빨리 떨어진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무거운 물건과 가벼운 물건을 무게가 없는 끈으로 묶어 떨어뜨릴 때 무거운 물건은 상대적으로 빨리 떨어지려 하고 가벼운 물건은 상대적으로 천천히 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하나씩 따로 따로 떨어뜨릴 때의 중간속도로 떨어진다는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또한 함께 묶었을 경우 전체 무게는 무거운 물건보다 더 무겁기 때문에 더 빨리 떨어진다는 결론이 나와 앞의 대답과 모순된다. 이러한 사고(思考)실험의 결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갈릴레이가 했던 방법과 마찬가지의 사고실험이다. 이것은 실험이라 하더라도 실험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속에서 행해진다. 실험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그것이 이미 알려진 물리학의 법칙에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 실제로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 낙하 실험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1590년 어느날 갈릴레이는 손에 두개의 쇠공을 들고 7층이나 되는 피사의 사탑에 올라갔다. 그는 꼭대기층의 복도에 나가 질량이 다른 두개의 공을 동시에 떨어뜨렸다. 이실험을 보기 위해 피사대학의 교수와 학생들 등 많은 군중이 모였다. 두개의 서로 다른 쇠공이 동시에 떨어졌을 때 군중들은 놀라움에 탄성을 질렀다. 그들은 옛날부터 믿어온대로 무거운 공이 빨리 떨어질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가 정말 나올 수 있을까. 우리들 자신에게 물어보자. 만일 우리가 1kg의 쇠공과 2kg의 쇠공을 높은데서 떨어뜨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대부분의 사람이 같은 속도로 정확히 같이 떨어진다고 대답할 것이다. 정확하게 교과서 식으로 대답한 예다. 반면에 이 질문을 어린아이들에게 사전에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물어본다면 아이들은 무거운 쇠공이 가벼운 쇠공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것과 같다.
필로포누스의 의문
아리스토텔레스의 낙체이론에 대해서 이미 6세기경 비잔틴의 학자 요아네스 필로포누스(Joannes Philoponus)가 연구를 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의심을 가져 실험한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일 당신이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몇배 무거운 두개의 추를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렸다면, 당신은 운동에 요하는 시간의 비는 무게의 비와 상관 없으며 그 시간의 차이는 극히 작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한쪽의 무게가 다른 쪽의 2배라면 무게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낙하시간의 차이는 전혀 없거나 있다해도 알 수 없을 정도다."
필로포누스의 견해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진공이 아닌 곳에서는 공기의 부력에 의해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지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사실 이러한 현상을 그의 저서인 '두 우주구조에 대한 대화'(이책은 박영문고에서 '새 과학의 대화'로 번역되어 있다)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심플리치오 :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무거운 쪽이 X다'라고 돼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실제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그레도 : 그러나 심플리치오, 나는 실제로 실험을 해보고 다음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70kg 정도의 대포알과 불과 2백50g의 총알을 함께 2백큐빗의 높이에서 낙하시키면 전자는 후자보다 기껏해야 한 뼘 정도 먼저 낙하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고 나중에 갈릴레이의 전기를 구성한 비비아니가 2백 큐빗의 높이가 피사의 사탑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고 재미있고 극적인 실험을 꾸며댄 것이 아닐까. 참고로 큐빗(cubit)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다.
"10배 빠르지는 않다"
갈릴레이보다 먼저 실제로 낙하실험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시몬 스테빈(Simon Stebin, 1584~1620)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립하는 실험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개의 납공을 준비했다. 한쪽은 다른 쪽의 10배 크기와 무게다.
두 공을 동시에 약 10m의 높이에서 떨어뜨려 아래에 판 같은 것을 놓아 공이 떨어지는 소리로 알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무거운 공이 가벼운 공보다 10배 빨리 떨어지지 않고 두개의 소리가 하나로 들릴 정도로 동시에 판위에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보고서도 필로포누스와 같은 결론이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틀렸다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지 동시에 떨어진다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갈릴레이가 무게에 관계없이 물체는 같은 시간에 떨어진다는 법칙을 얻은 것은 낙체실험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실험을 통한 유추의 결과였다.
그는 낙하실험 대신 흠이 있는 부드러운 경사면에 공을 굴리고 물시계를 사용해서 그 시간을 재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경사면의 각도를 바꾸었다. 경사면의 각도가 직각일 때가 바로 낙하운동이 된다. 이 관찰을 통해 공이 굴러간 거리는 물체의 무게에 관계없이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그 속도는 시간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도 발견했다.
경사면 실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갈릴레오는 '관성'이란 개념을 얻었다. 공을 굴린 경사면에 또 하나의 경사면을 연결한다. 굴러 떨어지는 공은 이번엔 경사면을 따라 올라간다. 그러나 경사면을 올라감에 따라 속도가 줄어들어 처음의 경사면의 높이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이 때 경사진 경사면의 각도를 작게 하면 공의 감속 정도는 작아진다. 경사면을 0으로 하면 (수평으로 하면)감속이 없어진다. 이것이 등속직선운동으로, 바꿔 말하면 관성의 법칙이다.
제수이트의 패배
이와같은 사면(斜面)실험을 통해 얻은 결론을 실제로 자유낙하로 실험해서 갈릴레이와 같은 결론을 얻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갈릴레오의 적들인 제수이트회의 리치올리(G. B. Riecioli, 1598~1671)와 그리말디(F. M. Grimaldi, 1618~1663)였다.
1940년 두 사람은 어떤 탑에서 높이를 달리하여 구(球)를 떨어뜨린 다음 한 사람은 위에서, 다른 한 사람은 밑에서 그 시간을 쟀다. 시간을 재는데 이용한 것은 1초에 6번 진동하는 '흔들이'였다. 그들의 실험은 갈릴레이가 사면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던 실험을 자유낙하에서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남을 증명했다. 이 두 사람은 스스로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갈릴레이의 신봉자에게 그 결과를 알려주었다.
결국 갈릴레이의 피사의 사탑 실험은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필로포누스나 스테빈이 실험에서 얻은 결과도 동시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실험은 갈릴레이보다 나중에 그리말디나 리치올리에 의해 실행되었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을 때 깃털과 쇠공을 떨어뜨리는 실험이 안방의 화면을 통해서 방영되었다. 진공에서만 완전히 같은 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경사면 실험을 통해서 이러한 관계를 얻어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