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대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분야가 고루 우수한 종합대학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수업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한국 친구들이 PC방에서 거의 ‘전쟁’처럼 수강신청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탠퍼드대는 체육이나 미술 등 인원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몇몇 수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제없이 수강신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수업이 인기가 많아서인지, 사람들의 성격이 급해서인지 수강신청이 시작되는 밤 12시에는 꼭 웹사이트가 마비되곤 한다(인터넷 속도나 서버가 한국에 비해 느려서일 수도 있다).
학부 4년 동안, 학과에 상관없이 스탠퍼드에서 반드시 들어야 하는 교양 과목은 크게 세 부류가 있다. 우선 1학년과 2학년 때 각각 듣는 글쓰기와 발표 수업이다. 그리고 비판적 사고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고 수업(Thinking Matters)’도 필수다. 이 과목은 1학년 때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이외에 스탠퍼드대만의 교육 프로그램인, ‘일곱 가지 사고방식(7 Ways of Thinking)’에 해당하는 수업들을 전공 내외에서 총 10과목 수강해야 한다. 입학 당시에는 이 수업이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글쓰기와 사고력 수업, 몇 가지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중복으로 조건을 거의 채울 수 있었다.
화학과는 크게 ‘화학 전공’과 ‘생화학 전공’으로 나뉘는데, 세부 전공과 상관없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일반화학, 일반물리학, 미적분학, 유기화학 등)과 실험 수업이 있다. 생화학 전공자는 여기에 생화학과 생화학 실험을, 전통 화학 전공자는 전기화학 실험과 더 심화된 내용의 물리 및 유기화학 수업을 수강해야 한다.
화학과 커리큘럼은 과목 간의 위계가 확실하기 때문에 특정 수업은 특정 학기에 들어야 한다. 학과 홈페이지에는 세부 전공별 스케줄이 공지된다. 주로 그걸 참고해서 학기 시간표를 짠다. 전공 교양은 그리 많지 않은데, 지난 학기에 호기심으로 대학원 고급 유기화학 수업을 들었고, 지금은 고분자화학 수업을 듣고 있다. 나는 화학 전공이지만 내년에 졸업 논문을 쓸 예정이어서 추가로 수업을 몇 개 더 들어야 하는데, 아마도 생화학 수업을 들을 것 같다.
전공 수업에 한해서, 수업 내용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학생에게 워낙 지원을 많이 해주고 시설이 좋은 학교인 만큼 실험 수업이 매우 우수한 환경에서 이뤄진다는 장점이 있다. 시약을 아껴 써야 한다거나, 장비 하나를 쓰기 위해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은 절대 없다.
보통 실험 수업은 같이 실험을 하는 짝이 있다. 나는 분석화학실험, 유기합성실험 때 같이 실험을 했던 셸비 라는 친구와 무척 친해졌다. 서로 실험 보고서를 쓸 때도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고, 수업을 더 이상 같이 듣지 않지만 가끔은 만나서 저녁도 같이 먹는다.
국제화학올림피아드 출신인 나는 교수님과 상의해 일반화학과 유기화학 한 학기를 뛰어넘고 수업을 들었다. 또, 고등학교 때 봐둔 AP 시험(고등학생 때 미리 대학 1학년 수준의 과목을 수강할 수 있게 해주는 미국의 제도)이 인정돼 일반물리학도 듣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인지 같은 학년 학생들보다는 훨씬 일찍 화학과 전공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고, 화학과에서도 바로 위 학년과 훨씬 친하다. 물론 같은 학년, 그리고 더 어린 친구들과도 친해질 기회가 있었다. 바로 스탠퍼드의 ‘또래 과외(Peer Tutoring)’ 제도 덕분이었다. 학교에서 나를 고용해, 일반화학과 유기화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화학, 물리, 수학 수업을 덜 들어도 됐기 때문에 나는 남는 시간에 다른 수업들을 수강할 수 있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유화, 아크릴, 색채학, 사진학, 조소 수업 등을 들었다. 미술 수업이 있는 건물이 마침 화학과 건물과 가까이 있어 하루 종일 연구실과 스튜디오를 오가면서 생활한 학기도 많다.
그 중에서도 유화 수업이 가장 재밌었는데, 물감이 부드럽게 번지는 느낌이 너무 좋았고, 특히 자화상을 그리고 나서는 굉장히 뿌듯했다. 무척이나 유쾌했던 미술 교수님은 학생들이 캔버스 앞에서 고민하고 있으면 “그냥 물감을 더 묻혀봐, 일단!”이라고 소리치시곤 했다. 미술 수업은 전공 수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함께 들었던 친구들과 밤새 작품을 완성하면서 굉장히 친해질 수 있었다. 다음 학기에는 피렌체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미술과 미술사 수업을 들을 예정이다.
스탠퍼드대가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덕분에 컴퓨터공학 수업들도 인기가 많다. 보통 한 수업이 300~400명 규모다. 나 역시 그 인기에 편승해, 화학과 미술 다음으로는 컴퓨터공학 수업을 많이 들었다.
가장 기초적인 수업 두 개(Java, C++)는 2인 1조로 프로그래밍을 하는데, 같은 기숙사에 살던 암리타와 함께 코딩을 했다. 매주 일종의 작은 프로젝트들이 과제로 주어지는데, 작은 게임을 만드는 등 가시적인 결과물들이 많이 나와서 재밌었다.
세 번째로 들은 수업은 컴퓨터공학 전공을 하려던 친구들의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악명 높은 시스템 수업이었다. 정말 매주 새벽까지 코딩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기초 수업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컴퓨터 시스템과 관련된 수준 높은 과제들을 해결하면서 디버깅, 포인터 등을 다루는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돼 뿌듯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수업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2학년 때 필수로 들어야 했던 발표 수업이었다. 발표 수업도 종류가 굉장히 많아서 우선순위를 제출해서 원하는 수업을 듣게 되는데, 나는 여성 작가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여성 작가 5명의 책을 매주 한 권씩 읽고 글을 써서 발표하면, 교수님께서 그 주에 해당 책을 쓴 작가들을 직접 만나게 해주셨다. 처음에는 숙제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지만, 수업에서 다뤘던 모든 책들이 재밌었고, 직접 만난 작가들도 배울 점이 많아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게 진정한 ‘인생 수업’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