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의 이름을 무색하게 한 「직지심체요절」. 이 기술의 전통은 계미자 갑인자로 이어지고.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동양학자다. 그가 지은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 3권, 파리, 1894~96)때문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까지 나온 한국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한국사람이 하지 못했던 작업을 대신해 준 것이다. 아무튼 쿠랑의 노력은 감사하고 높이 살만하다.
그 책에는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반세기에 걸친 이 땅의 비극 이전의 자료들이 그대로 살아 있다. '한국서지'는 1901년에 증보돼 별책으로 '부록'이 발행됐다. 여기에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란 불교서적의 이름이 나타난다.
「책의 전시회」를 통해
그러나 그 책의 소재와 서지적(書誌的)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2년, 이름만이 전해지던 환상의 책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5월부터 10월까지 열린 '책의 전시회'에 출품된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전문가들에 의해 곧 14세기의 금속활자본임이 확인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학계가 흥분의 도가니가 된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매스컴도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온통 금속활자 인쇄물과 고려의 책들에 관한 기사로 떠들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 남아 있는 책들중에서 세계에서 가자 오래된 금속활자인쇄본이 준 충격은 정말 컸다. 그러나 그것이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저 한구석이 아련하게 저려왔다. 우리 민족의 비극이 그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학자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극동도서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朴炳善)씨의 호의로 그 책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직접 가져온 원본크기의 흑백사진판을 보게 된 것이다.
학자들은 책의 권말에 있는 간기 '선광칠년 정사 7월 일 청주목외 흥덕사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 七月 日 清州牧外 興德寺鑄字印施)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책이 1377년에 출판되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또한 이 책이 금속활자인쇄본이라는 데도 거의 이견(異見)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서지학자인 천혜봉(千惠鳳)교수의 고증은 학자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간기에 이 책을 인쇄한 곳으로 적혀 있는 흥덕사 터가 최근에 발견된 것도 큰 성과였다. 이제 천교수가 고증한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인쇄본으로서의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본문의 행렬이 곧바르지 않고 좌우로 들쑥날쑥하며 비뚤어졌다. 그 중에 어떤 글자는 몹시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고, 아예 거꾸로 된 것도 있다. 또 인쇄된 글자의 먹묻음이 고르지 않고 진하고 엷은 상태의 차이가 심하다. 어떤 글자는 시커멓게 찍혔는가 하면 획의 일부가 찍혀지지 않은 글자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들은 목판본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활자본에서 흔히 나타난다. 실제로 책의 깔끔함은 목판본과 활자본을 구별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목판본에는 줄이 삐뚤거나 글자가 거꾸로 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자본은 초기의 것일수록 조악하다. 크기와 모양이 꼭 같지 않은 활자를 하나 하나 식자해 조판하기 때문에 줄과 글자가 삐뚤어지거나 거꾸로 되는 일까지 생긴다. 반면 목판본은 아주 고른 판면에 먹을 칠해 찍어냄으로 먹물의 진하기가 거의 일정하게 나오게 된다.
그러나 활자본은 크기가 고르지 않은 활자를 하나 하나 식자해가기 때문에 판자를 대고 내려 눌러 다듬어내도 판면이 목판본처럼 고르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먹묻음이 글자마다 또는 글자의 획에 따라 진해졌다 흐려졌다 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인쇄물의 이런 기술적인 차이를 밝혀냄으로써 직지심체요절이 활자본임이 확인됐다.
둘째로 조판틀 네변을 두른 선의 네귀가 고착(固着)된 단변(單邊)으로 돼 있다. 게다가 계선(界線, 정면과 평면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횡선)까지 붙어 있다. 거기에 식자된 활자의 글자수도 일정치 않아서 행에 따라 1~2자의 차이가 생긴다. 자연히 옆줄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윗글자의 아래 획과 아랫글자의 위 획이 서로 붙거나 엇물린 것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것도 활자의 주조기술과 조판기술에서 생기는 문제다. 조선왕조로 넘어가 1403년(태종 3년)에 만든 계미청동활자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술적인 문제점이 그 인본에 나타나 있다.
이런 기술상의 문제점,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초기 금속활자 주조기술과 조판기술의 미숙함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목판본이 아니고 활자본임을 쉽게 구별해낼 수 있다. 게다가 인쇄과정에서 모자란 금속활자를 일부 크기가 다른 활자로 메워 넣고 있다. 그래도 모자라서 몇 글자는 목활자를 대신 쓴 흔적까지 나타나 있다.
기술이행의 전형
계미청동활자를 부어 만드는 방법의 요체는 해감모래거푸집의 활용이다. 간단히 말하면 황양목에 새긴 어미자를 가지고 찍어내 만든 활자의 거푸집에 부어 만든다. 그러므로 같은 글자를 꼭 같은 활자체로 대량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이 방법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청동활자를 대량생산할 때 썼다. 다시 말해 규격제품의 양산(量産)방식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까지 민간에서 사용해왔던 주조방법은 조금 달랐다. 대규모 생산까지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알맞게 더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민간에서 사용한 주조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먼저 질그릇을 만드는 찰흙을 곱게 빻아서 잘 이긴다. 이어서 네변에 테두리를 두른 나무판 위에 평평하게 펴서 햇빛에 쪼여 반쯤 말린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이에 크고 작은 글자를 일정한 간격으로 쓴다. 밀랍을 녹여 판 위에 뒤집어 붙이고 그 글자들을 움푹하게 새겨 넣는다. 그리고 거기에 쇳물을 붓는다. 이 쇳물이 식으면 판을 들어낸 뒤 글자 하나 하나를 잘라 줄칼로 깎고 다듬어서 활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떤 것을 글자 본(本)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글자모양이 달라지지만, 그런대로 닮은 글자체의 활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민간에서 이어 내려온 이러한 금속활자 주조법은 오랫동안 사찰(寺刹)에서 사용해 오던 금속의 주조기술 및 활자의 주조법과 연결되는 기술이다.
천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찰에는 밀랍거푸집에 의한 활자주조기술이 오래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 방법을 대충 소개하면 이렇다.
먼저 활자모양으로 만든 정제된 밀랍에 글자를 새긴다. 그리고 나서 도가니 만드는 오토(烏土)와 찰흙을 섞은 재료로 싸서 글자의 형틀을 만든 뒤 굽는다. 다음에 그것을 한 곳에 모아 하나 하나의 글자형틀에 녹인 쇳물을 붓는다. 이 쇳물이 식으면 줄칼로 깎고 다듬어서 활자를 완성한다. 이 경우 밀랍으로 만든 어미자는 글자 형틀을 구울때 녹아 없어진다.
이렇게 만든 활자는 같은 글자라도 글씨가 꼭 같지 않다. 목활자를 만드는 방법을 금속주조기술에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찰의 금속활자는 목활자가 금속활자로 넘어가는 기술이행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흥덕사 터에 인쇄자료박물관이
실제로 직지심체요절을 보면 한 판면에서 같은 글자의 활자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통해 그 활자들은 사찰에서 실시했던 전통적인 기술로 제조했거나 아니면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행하던 방법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최근 문화재관리국에서 직지심체요절의 복제본을 만들면서 떨어져 없어진 하권의 첫째장을 복원할 때 수행했던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그 일은 청주의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오국진(吳國鎭)씨가 처음 시도했다. 사찰에서의 전통적 청동활자 주조기술을 재현한 것이다. 그는 밀랍거푸집을 파라핀거푸집으로 대신했다.
먼저 글자의 본을 사주본(寺鑄本)에서 모사, 파라핀에 새겼다. 그 다음 오토와 찰흙을 섞어 만든 재료 대신 석고를 사용, 글자를 둘러싼 뒤 열을 가해서 파라핀을 녹여 없앤다. 그리고 그 활자의 형틀에 녹인 청동을 부어 넣으면 청동활자가 된다. 이를 통해 같은 글자로 갈은 거푸집을 여러 개 만들어서 청동활자를 부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1403년(태종 3년)의 계미청동활자 주조법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여러 실험적인 복원과정을 통해 나타난 사실에서 볼 때, 기술적으로 한 걸음 발전한 활자임을 발견하게 된다. 아울러 고려시대에 국가적 사업으로 행했던 청동활자의 대량생산 체제와 사찰에서 소규모 인쇄를 할 때 적용한 청동활자주조법이 서로 달랐다는 것도 시사해준다.
현재 옛 흥덕사의 터에 인쇄자료박물관을 짓고 있다. 이 공사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더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인쇄기술을 다루는 전문적인 박물관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대의 대가들이 모여
1377년에 전개된 청동활자 인쇄기술은 13세기 전반기에 시작된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기술의 전통이 그후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길고 모진 전란속에서 끊어질듯 가냘프게 이어진 청동활자의 주조기술은 1403년의 계미자의 탄생과 함께 재생, 새로운 발전의 큰 걸음을 내디뎠다. 이것은 인쇄기술 전통의 훌륭한 부활이었다.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과 그 전개에 대한 실체가 1377년의 인본으로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계미자까지 사이의 공백을 잘 메워주고 있다.
계미자를 통해 대량생산체제로 일대 전기를 마련한 조선의 청동활자 인쇄기술은 그후 더욱 만개(満開)한다. 그 후 세종대에 이룩한 경자자(庚子字)의 기술적 개량을 거쳐 갑인자(甲寅字)에 이르러 조선식 기술의 전통으로 정착하기 시작한다.
세종 16년(1434년) 7월 2일. 갑인년(甲寅年) 여름이었다. 세종은 이천을 불러 새로운 활자를 만들고 인쇄기를 개량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근년에 있었던 정벌로 병기를 만드느라고 구리를 많이 써서 구리가 모자랄 것으로 안다. 또 공장(工匠)들도 겨를이 없을 터이지만 활자를 안 만들 수는 없으니 잘 계획해서 실행하도록 하라."
세종실록이 전하는 세종의 어명이다. 그 당시는 계속된 가뭄으로 정부가 진행하고 있던 모든 건축공사가 중지되고 부역하던 백성들도 집으로 돌려보내는 어려운 형편이었다고도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은 이 사업만은 꼭 성취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아름다운 활자로 훌륭한 인쇄물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여러가지 새로운 천문관측기기가 완성되고 역법(曆法)의 연구가 활발하던 때였다. 또 인쇄기술도 성숙돼 있었다. 아울러 그 무렵까지 이룩된 모든 분야의 학문적 성과와 문화적 성숙에 따른 새로운 창조욕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다 좋은 글자체로 아름답게 인쇄된 훌륭한 책을 갖고 싶다는 차원 높은 문화적 욕구가 상승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또 하나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되었다. 1421년에 경자자를 만든지 13년 만의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한 각부서의 책임자들의 이름들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국가적인 사업이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에는 물론 이천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 직전(直殿) 김빈, 호군(護軍) 장영실,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영, 사인(舍人) 정척, 주부(注簿) 이순지 등이 감조관(監造官)이 되었다. 모두가 당대의 일류 과학자들이었다.
주자소(鑄字所), 즉 왕립인쇄공장은 2개월 만에 20여만자(字)의 새 청동활자 갑인자를 만들어냈다. 글자의 크기는 1.4㎠ 대자(大字)로 계미자와 같은 치수였다. 그리고 반엽(半葉)에 괘선이 10줄, 한줄에 17자가 꼭 들어맞는 활판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체(字體)가 정명(正明)하고 인쇄하기가 쉽게 되어 있어 하루에 한지 40여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고 '실록'은 기술하고 있다. 이를테면 경자자의 두배의 능률을 올리는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9월 중순부터 주자소에서는 본격적인 인쇄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수많은 책들이 인쇄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1백여종의 갑인자 인쇄본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확언하건대 15세기 전반기의 책들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명한 인쇄물이다. 이것은 사실상 조선식 청동활자 활판인쇄기술의 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