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전사고 당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방사능 노출진압에 나섰던 소련의 헬리콥터 조종사 니콜라이 그리시첸코(53)가 지난 7월2일 미국 시애틀의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에서 사망했다.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진균감염에 의한 폐 합병증.
그리시첸코는 86년 체르노빌핵사고 수습에 참여한 이후 줄곧 백혈병에 시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도는 덜하다지만 진압에 참여했던 다른 조종사들도 방사능노출 후유증으로 고통받기는 마찬가지. 당시 이들은 원자로를 냉각시킬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쏟아붓기위해 수차례 사고현장의 상공을 비행해야 했다. 물론 이들이 탔던 헬기에는 납으로 된 방사능 차단기와 다른 보호장비들이 갖춰져 있었지만 막대한 양의 방사능 앞에는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시첸코의 희생은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연대라는 차원에서 하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소련인인 그가 미국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 것은 맥도널드 더글라스사의 헬리콥터 안전감독책임자 팔리어의 노력덕분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지난 4월 허친슨암연구센터에 입원한 그리시첸코는 현재로선 가장 완벽한 백혈병 치료법으로 인정되는 골수이식수술을 받았다. 그가 이식받은 골수는 대서양 건너의 한 프랑스 여인 것으로 그녀는 국제적인 골수기증자 모임의 일원이다.
골수이식결과는 성공적이었으나 수술과는 무관한 폐질환의 발병으로 그간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시첸코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잇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한 자세로 죽음과 맞서 싸웠다.
"남편의 희생은 국제적 연대의 한 모범을 낳았습니다. 나는 러시아인 그리시첸코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남편의 임종을 지켜본 아내 갈리나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