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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해가 저물고 뱀의 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용은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그런데 용이 인류의 진화 ‘역사’에 살짝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용이 될 뻔한 인류, 영장류 중 가장 몸집이 컸던 ‘기간토피테쿠스’입니다.

때는 20세기 초였습니다. 중국의 전통 약재상에 가면 별의별게 다 있지요. 그 중에는 ‘용뼈’도 있었습니다. 갈아서 한약 재료로 썼고,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였습니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중국으로 몰려든 사람 중에는 화석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자도 있었습니다. 독일의 구스타프 폰 쾨니히스발트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폰 쾨니히스발트는 홍콩의 약국을 구경하다 약재로 팔리고 있던 용뼈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세히 보니 유인원의 이빨이었거든요! 잘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동물은 대개 이빨이 모두 다르고, 훈련 받은 고생물학자나 고인류학자는 이빨만 보면 어떤 동물인지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생김새는 유인원의 이빨임이 틀림없었지만, 당시 발견된 어떤 유인원의 이빨보다 컸습니다. 폰 쾨니히스발트는 홍콩의 약국에서 구입한 용뼈를 살펴 오른쪽 세 번째 어금니로 판명된 이빨을 연구한 뒤, ‘기간토피테쿠스 블라키’라는 새로운 화석 종으로 이름 붙여 1952년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거대한 유인원’이라는 뜻이고, 블라키는 유명한 고생물학자인 데이비드슨 블랙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용뼈의 주인공이 용이 아니라는 점은 실망스러웠지만, 대신 고릴라에 가깝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이 거대한 ‘괴물’ 유인원의 화석을 찾으려는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중국 남부에서 석회암 동굴 주변의 무기질이 풍부한 석회암 지대는 농경지로 많이 쓰였습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갈다 보면 기간토피테쿠스의 이빨이 말 그대로 수백 점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논문이 많이 나왔습니다. 중국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턱뼈 세 점과 이빨 수천 점 외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의 화석을 발견했다는 논문은 최근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이빨뿐입니다.

인류학자와 고생물학자는 턱뼈와 이빨만 가지고도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크기로 몸집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영장류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큰 종은 고릴라로, 수컷의 무게가 180kg, 암컷이 90kg 가량 나갑니다. 그런데 기간토피테쿠스는 무게가 고릴라 수컷의 약 1.5배인 270kg에 키는 2.7m에 이릅니다. 용뼈의 주인공은 용이 아니라 ‘킹콩’이었던 셈입니다.

왜 이렇게 몸집이 컸을까요? 가장 생각하기 쉬운 이유는 수컷끼리의 경쟁입니다. 몇 안 되는 수컷이 암컷을 독차지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수컷들은 그 ‘선택 받은’ 무리에 들어가려고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몸집이 큰 수컷이 선택됩니다.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면 할수록 수컷의 몸집은 커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기간토피테쿠스는 이런 경우가 아닙니다. 2009년 학회 참석차 중국에 갔을 때입니다. 수십 년 동안 기간토피테쿠스를 연구한 한 고인류학자를 만났는데, 제게 그 동안 모은 기간토피테쿠스 자료를 건네 주면서 자신이 끝내지 못한 연구를 계속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빨 하나마다 단어카드 한 장씩 빼곡히 기록한 방대한 자료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기간토피테쿠스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알려진 대로 엄청나게 큰 이빨이었습니다. 암수의 몸집 차이 역시 어마어마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송곳니였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터무니없이 작았습니다. 암수 성에 따른 크기 차이를 살펴보니 그 역시 작았습니다. 수컷끼리의 경쟁에 송곳니는 중요합니다. 몸집의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송곳니 차이가 크다면 그 동물은 수컷끼리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침팬지가 그 예입니다.

그렇다면 몸집은 암수 차이가 크지만 송곳니 크기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기간토피테쿠스는 수컷끼리의 경쟁이 격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뭔가 다른 이유로 수컷의 덩치가 커졌다는 것이지요.

원인은 바로 포식자였습니다. 몸집이 크면 포식자를 물리칠 때 유리합니다. 특히 수컷의 덩치가 커집니다. 포식자는 암수를 가리지 않는데 수컷만 몸집이 커지는 것은 재생산(출산) 때문입니다. 유인원을 비롯한 영장류의 경우, 몸집을 키우려면 자라는 기간이 늘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해야 하는 암컷은 마냥 몸집을 키울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수컷의 몸집만 커져서 나중엔 확연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기간토피테쿠스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거대한 킹콩, 기간토피테쿠스를 탄생시킨 무시무시한 천적이 궁금해집니다. 놀랍게도,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가 중국 남부에 살던 시기는 120만 년 전부터 30만 년 전까지입니다. 당시 중국 남부 등 동아시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큰 짐승을 사냥해 먹었습니다. 중국 지역의 호모 에렉투스 유적에서는 말뼈가 많이 발견됩니다. 사냥을 한 뒤 발라 먹고 버린 뼈입니다. 아시아에서 말이 멸종한 이유가 바로 에렉투스가 잡아먹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호모 에렉투스가 직접 기간토피테쿠스를 잡아먹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흔적이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최소한 기간토피테쿠스와 호모 에렉투스의 뼈가 함께 발견돼야 하는데, 그런 적조차 없습니다.

경쟁이 문제였습니다. 대나무 지대에서 살던 기간토피테쿠스는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는 판다와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호모 에렉투스가 끼어 들며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대나무를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구를 만드는 데 썼을 가능성이 있죠.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나 유럽에 비해 돌로 만든 도구가 조잡하고, 양도 적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돌 대신 당시 동남아시아에 풍부하게 자라나던 대나무로 도구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대나무를 마구 베었고, 기간토피테쿠스가 살 곳은 점점 줄어들었다는 거죠.

그뿐 아닙니다. 굶주림까지 겪었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의 이빨을 보면 성장기에 영양실조에 걸렸던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달콤한 과일과 기타 다양한 먹거리를 두루 먹었는데, 열대가 아무리 풍성하다 해도 덩치가 킹콩 같은 기간토피테쿠스가 배불리 먹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기간토피테쿠스는 점점 춥고 건조해지는 기후, 줄어드는 서식지 때문에 위기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먹을거리가 점점 부족해지자 큰 몸집을 계속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커다란 영장류였던 킹콩은 결국 멸종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기간토피테쿠스를 생각할 때마다 오랑우탄이 생각납니다. 오랑우탄은 기간토피테쿠스가 살던 동남아 삼림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몸집이 크고 암수 크기 차이도 큽니다. 그러나 오랑우탄은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대일 짝짓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희한하게도, 오랑우탄은 외톨이처럼 철저히 홀로 생활합니다. 혹시 오랑우탄의 홀로서기는 인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천적의 눈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닐까요. 그들은 거대한 친척, 기간토피테쿠스의 멸종에서 배웠는지 모릅니다. 유인원의 가장 무서운 천적은 인간이라는 사실을요.

2013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윤신영 | 글 이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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