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초의 학자 권근(權近)은 그의 글 '주자발'(鑄字跋)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403년 2월 13일.
조선 태종 3년 이른 봄이다. 태종은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널리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바다 건너에 있어 중국서적이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목판은 갈라지기 쉽고 만들기도 어려워서 그것으로는 모든 책들을 다 인쇄할 수 없다.
이제 구리로 글자를 만들어서 책을 얻을 때마다 그 책을 인쇄해 널리 펴면 그 이로움은 참으로 무한할 것이 아니겠는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러나 대신들은 반대했다고 한다. 태종의 이런 생각이 국가 백년대계의 큰 뜻에서 나온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기술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뜻은 좋지만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청동활자를 만드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거둬들이지 말고 대궐에서 당장 소용되지 않는 놋그릇을 다 내놓을 테니 대신들도 뜻이 있거든 모아 보라고 했다. 기술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기록에 따르면 태종은 '강령'(强令)했다 한다. 그는 기술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고려시대부터 써오던 청동활자에 의한 인쇄의 기술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근의 글에서 우리는 태종이 자주적인 문화를 창조하려는 정열과 거시적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금속활자를 처음 만드는 작업은 기술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들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책을, 그리 많지 않은 몇백부 정도를 찍어내는 조선사회의 서적수요에서 볼 때, 그것은 목판인쇄보다 오히려 경제적인 것이다.
마침내 주자소(鑄字所)가 설치되고 그 사업을 주관할 책임자들이 임명되었다.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 총제(摠制) 민무질(閔無疾), 지신(知申) 박석명(朴錫命), 우대언(右代言), 이용(李庸)을 제조(提調)로 하고 강천음(姜天淫) 김장간(金莊侃) 유이(柳夷) 김위민(金爲民) 박윤영(朴允英)을 감조관(監造官)으로 삼은 것이다.
작업은 철저한 분업으로 진행되었다. 각자장(刻字匠)은 황양목에 자본(字本)대로 글자를 새겼다. 또 주장(鑄匠)들은 그것을 가지고 모래거푸집을 만들고 청동을 부어 활자를 제조해 냈다. 그리고 주조된 활자는 한자 한자 줄칼로 쓸고 다듬어서, 다시 말해 끝마감해서 완성해 나갔다.
이렇게 만든 활자는 몇 달만에 수십만자에 달했다. 이것이 계미자(癸未字)다. 태종 3년이 계미년(癸未年)이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절박한 현실문제를 풀기 위해
고려 때 발명돼 가냘프게 이어져 내려오던 이 훌륭한 기술 전통이 거의 잊혀져 가고 있을 무렵 태종에 의해 새롭게 부흥하는 전기(轉機)를 맞이한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재발명이었고 기술혁신이었다. 고려에 이어 새로 나라를 세운 조선왕조가 인쇄 문화를 혁신적으로 재건함으로써 세종대의 과학문화 창조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계미자의 출현은 조선 전기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태종 때의 부활한 이 기술혁신의 원 전통은 12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고려의 기술자들이 세운 것이다. 당시 인쇄물 제작이라는 절박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던 그들은 그 상황을 기술혁신으로 극복했다. 이제 그 역사적 기술적 배경을 살펴보자.
목판(木板)을 써서 책을 찍어내는 기술은 8세기 경 신라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이 한자 한자 손으로 써서 베끼던 일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간단하고 빠르게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발명이었다. 그 이야기는 뒤에 쓰겠다.
그러나 이 목판인쇄술은 일단 찍고 나면 다시 같은 것을 찍을 때 외에는 쓸모가 없다는 결정이 있다. 게다가 목판의 부피가 커서 보관하는 데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다. 또 먹을 칠해서 한번 찍고 난 목판은 마르면서 갈라지거나 터지기 일쑤여서 보존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활자의 발명이다.
활자는 11세기에 중국인이 처음 발명했다. 처음에는 목판처럼 글자를 새겨서 한자 한자 잘라내어 만든 나무활자였다. 그 다음에는 진흙으로 만든 활자로 발전하였다. 진흙활자는 차게 한 흙에 아교를 섞어 다진 다음에 그것을 깎아서 글자를 새기고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이 진흙활자는 송(宋)나라의 필승(畢昇)이 최초로 개발해냈다. 그는 먼저 쇠로 만든 활자틀에 송진 밀랍과 종이를 태운 재 등을 깔았다. 그리고 이것들을 불 위에 얹어서 물렁물렁하게 한 다음, 거기에 활자를 차곡차곡 끼워 넣었다. 이어서 활자들을 고르게 눌러 움직이지 않도록 한 뒤 식혀서 고정시켰다. 그는 최종단계로 먹을 칠한 다음 종이를 대고 밀어서 인쇄물을 찍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진흙활자는 부서지기 쉽다는 약점 때문에 널리 쓰이지 못했다. 반면 나무활자는 갈라지거나 터지기 쉬운 결점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활자는 한번 판을 짜서 책을 찍고 나서는 다시 풀어서 글자끼리 모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다시 판을 짜서 쓸 수 있다는 점이 커다란 장점이다.
특히 많지 않은 부수의 책을 여러 종류 찍어 낼 때에는 목활자가 목판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사이에 큰 양반가문에서 개인문집을 내거나 족보를 발간할 때 목활자가 비교적 널리 쓰였다. 그러나 목활자는 오래 두고 여러번 쓰기에는 아무래도 적당치 않았다.
만일 활자를 금속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금속으로 그 작은 활자를 부어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 무렵에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신라 때부터 청동으로 도장을 부어 만들어 쓰기는 했지만, 도장은 그런대로 크기가 있고 하나 둘 정도는 어떻게든 제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도장과 금속활자는 차원이 다르다. 활자는 글자의 크기도 작은 데다가 한 글자를 적어도 수십개는, 그것도 똑 같은 규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만만한 일인가 게다가 책 한권을 찍으려면 10만개 이상의 활자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금속에는 도무지 먹이 묻지 않아 종이를 대고 밀어내면 글자가 제대로 찍히지도 않았다. 종이만 해도 그렇다. 얇은 종이를 금속표면에 먹을 묻혀 밀어내면 목판이나 목활자로 밀 때와는 달리 찢어지기 일쑤였다.
부수는 적고, 가짓수는 많고
하지만 고려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금속활자를 만들어 써야만 했다. 그 당시의 사회적·문화적 수요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한가지 책의 수요가 중국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부수의 책을 찍어내야 했고, 필요한 책의 가짓 수는 수백·수천가지나 돼 그것들을 목판이나 목활자로 찍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확실히 고려사람들은 금속을 부어 만드는 기술에 관한 한 남달리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와 삼국 및 통일신라의 금속공장(工匠)들을 거쳐 고려인에게 물려진 창조적 전통이었다.
견고하고 완전한 인쇄를 가능케 한 금속활자의 발명은 이러한 기술적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런 기술이 있다고 해서 금속활자가 금방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고 섬세한 글씨가 새겨진 일정한 규격의 금속활자를 수없이 부어 만들려면 한단계 높은 기술이 요구된다. 적어도 그때까지 쓰이던 몇가지 거푸집으로는 어림 없었다.
금속활자를 제조하기 위해 고려 기술자들이 새로 찾아낸 방법이 해감모래거푸집으로, 청동을 부어 만드는 기술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행한 여러 현대적 실험을 통해서 얻은 기술사가들의 결론도 마찬가지다. 금속거푸집이 나오기 전까지의 유일한 금속활자 거푸집은 해감모래거푸집 뿐이라는 것이다.
해감모래거푸집의 발명은, 기술(技術)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별로 없었던 조선 전기까지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아, 참으로 극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기술사(技術史)에 길이 남을 창조적 기술개발이었다. 한 사람의 학자가 그 사실을 기록해서 남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고려 기술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청동활자를 부어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傭齎叢話)의 기록은 한국의 기술사(技術史)에서 드물게 보는 귀중한 사료(史料)다. 그 극적인 기록은 이렇다.
“주자(鑄字)하는 법을 설명해 본다. 먼저 황양목(黃楊木)에 글자를 새기고 해포연니(海浦軟泥)를 인판(印板)에 평평하게 펴고 목각자(木刻子)를 그 고운 모래에 찍으면 눌려진 오목(凹)한 곳에 글자가 새겨진다. 그리고 두 인판(印板)을 합한 뒤 용동(鎔銅)을 구멍을 통해 부어 주면 유액(流液)이 오목한 곳에 흘러 들어가서 한자 한자가 완성된다. 이리하여 겹치고 덧붙은 것을 깎아 새겨 정리하였다.”
15세기의 조선 학자가 청동활자를 부어 만드는 기술적인 과정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아무튼 고려의 기술자들은 금속활자 인쇄술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어려운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활자를 부어 만드는 거푸집을 해포연니, 즉 해감모래로 제조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금속활자를 써서 인쇄를 하는 데 알맞은 유성(流性)잉크, 즉 인쇄용 먹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고려인들은 얇고 질기고 흰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청동활자로 인쇄를 해낼 수 있는 기술적인 모든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인이 개발하는데 실패한 기술이 고려 기술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목활자의 발명으로 인쇄술 분야에서 커다란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목판이라는 고정된 방법 대신에 움직이는 글자로 인쇄판을 짜서 다시 다른 책을 찍어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히 하나의 기술혁신이었다. 이로 인한 정보의 유통과 학술적 성과의 전파가 고대 중세사회에 미친 커다란 영향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목활자에 의한 인쇄술이라는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최대한 살려 새로운 창조적 기술개발로 이어간 고려 기술자들의 업적은 오래 기억되고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전통의 단절로 주저앉아
고려 기술자들은 목판이나 목활자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절박하고도 어려운 현실을 그들의 전통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아이디어로 멋지게 해결해 냈다. 조금 더 그 사회적 배경을 이해해 보자.
고려는 1126년과 1170년의 두 차례에 걸친 궁궐의 화재로 수만권의 장서를 불태우는 비극을 겪었다. 게다가 그 무렵 중국의 사정도 어려웠다. 송(宋)나라와 금(金)나라의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어서 송나라로부터 책을 수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로 필요한 책을 인쇄하는 길밖에 없었다.
한정된부수를 여러 종류 인쇄해야 하는 경우, 목판인쇄는 오히려 더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가 그에 알맞는 단단한 나무도 적은 형편이었다.
반면 그 당시 고려에는 청동이 많았다. 풍부한 청동으로 활자를 만들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은 당시의 고려 장인(匠人)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그들의 앞선 금속 세공기술로 청동활자를 만들라고 부추긴 것이다.
해감모래거푸집의 성공적 개발은 금속활자 제조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마침내 고려 공장들은 금속활자로 인쇄를 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세계 최초의 개가였다. 그 중의 하나가 1234년경에 강화도에서 간행된 '상정예문'(詳定禮文) 28부다. 그 책의 간기에는 '주자'(鑄字)로 인쇄했다는 글이 적혀 있다. 주자, 즉 부어만든 글자란 곧 금속활자를 뜻하고 그 금속활자는 청동활자였다.
초기의 고려 청동활자로 찍은 인쇄물이 최근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서 발견돼 전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12세기에 인쇄된 불경인 '직지심경'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13세기 이후 근 2백년 동안 별로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고려인들은 특수한 현실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청동활자를 만들어 쓰기는 했지만, 그 인쇄본은 중국의 송판본(宋板本)이나 고려 목판본의 아름다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인쇄 능률도 좋지 않았다. 절박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목판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설상가상 몽고군의 침략으로 국력은 말할 수 없이 쇠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금속 장인들을 동원, 새로운 청동활자를 주조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는 곧 창조적 전통의 단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