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키 때문에 잠도 서서 자는 이「초원의 망루」는 낮은 곳에 있는 먹거리를 모두 친구인 얼룩말과 산양에게 양보한다.
사람이 한눈에 기린의 온몸을 다 보려한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무리다. 워낙 키가 큰데다 목도 길어 멀리서 바라보면 몰라도 가까이에서 전체를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린의 생김새에 대해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 진화에 혼선이 빚어져 그런 모습을 갖게 됐다고 말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두개의 전혀 다른 종류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B.C. 1,500년쯤에 이미 기린을 사육했던 고대 이집트사람들은 기린을 낙타와 표범의 튀기로 보기도 했다. 또 로마인들은 기린을'낙타표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고대 중국에서는 기린을 용이나 봉황과 같이 실존하지 않는 하나의 상징동물로 여겼다. 또 기린을 '목이 긴 사슴이란 뜻으로 장경록 (長頸鹿)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린의 학명은 Giraffe Camelopardalis다. 영어로는 '지라프'(Giraffe)로 이는 아라비아어의 '점잖은 동물'또는 '빨리 뛰는 놈'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는 지라프라고 불러야 하지만 상상해서 그린 동양의 기린이 지라프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기린이라고 부르고 있다.
●- 왜 키다리가 되었나?
옛날에는 아시아에도 기린과 같은 속(屬)의 동물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1백만년 전의 기린화석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기린은 지상에서 제일 키가 큰 짐승이다. 다 자란 수컷이 목을 한껏 뻗으면 정수리까지의 높이가 자그마치 5.5~6m나 된다. 또 몸무게는 1t 정도다. 그래서 기린을 '초원의 망루'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린은 왜 키다리가 되었을까. 기린들이 주로 사는 곳은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이남의 초원지대다. 그렇다고 풀만이 있는 곳이 아니고 곧고 높다란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는 반(半)건조한 초원이다.
기린은 얼룩말이나 산양들과 섞여 생활한다. 이 세 동물들은 모두 식물만 먹고 사는 초식동물이란 점이 공통점이다. 하지만 얼룩말과 산양이 땅 위의 풀을 뜯어 먹는 것과는 달리 기린은 주로 높은 나뭇가지의 잎을 뜯어 먹는다. 높은 데 달린 나뭇잎을 뜯어 먹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키가 커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점점 다리나 목이 길어지게 되었다.
목이 길다고 해서 다른 짐승들보 다 많은 목뼈를 가진 것은 아니다. 목이 짧은 고래나 코끼리와 마찬가지로 기린의 목뼈도 7개다. 다만 목뼈의 마디 사이가 좀 길 뿐이다.
기린을 옆에서 보면 뒷다리보다 앞다리가 훨씬 길다. 그래서 어깨는 높고 궁둥이는 낮아 뒤쪽으로 경사져 있다. 이 묘한 포즈의 기린이 긴 목을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위태롭기 그지 없다. 곧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다.
목도 길지만 앞다리는 그보다 더 길다. 그래서 기린은 물을 마실 때도 애를 먹는다. 그냥 목만 굽혀서는 입이 수면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기린은 앞다리를 팔(八)자로 벌린 묘하고 어색한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기린은 땅에 아무리 좋은 먹거리가 있어도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기린은 아카시아잎을 특히 좋아하는데 잎을 따먹는 방법이 꽤 특이 하다. 그들은 여느 동물들처럼 입술을 움직여 잎을 따지 않는다. 대신 40㎝나 되는 긴 혀를 꿈틀거려 나뭇가지를 감아 잡고는 잎을 훑어 먹는다. 그래도 가시에 찔려 다치는 일이 전혀 없다.
기린은 분류학상 우제류(偶蹄類, 쪽발짐승)에 속하지만 발굽을 보면 마치 소발굽 같이 생겼다. 또 발을 자세히 살펴보면 땅을 딛고 있는 것은 제3지와 제4지 뿐이다. 제2지와 제5지는 완전히 퇴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소나 돼지 등에는 땅을 딛고 있는 두개의 주제(主蹄) 뒤에 건성으로 달린 조그만 굽이 있는데 반해 기린에는 그것이 없다.
또 암수 모두 뿔을 갖고 있다. 이 뿔은 사슴의 낭각처럼 전체가 털이 난 피부로 싸여 있고 끝부분만 각질화(角質化)돼 있다.
특이한 점은 한쌍의 뿔(主角) 이외에도 앞 이마 가운데 부분에 골질(骨質)이 튀어 나온 전각(前角)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 개체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뒷 머리 쪽에 한쌍의 낮은뿔(後頭角)이 있다. 이 뿔들을 전부 갖춘 놈은 자그마치 뿔을 다섯개나 가진 셈이다.
그런데 주각은 뿔이라고는 하지만 소의 뿔과는 근본적으로 그 생성과정이 다르다. 다시 말해 머리뼈에 붙은 뼈가 길어져서 된 뿔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뿔이다. 기린의 머리에는 앞으로 뿔이 될 부분이 따로 있다. 처음에는 납작한 채로 있다가 생후 1~2주 사이에 그 부위에 뼈가 생겨 점점 굳어진다.
식사는 주로 이른 아침과 저녁에 한다. 물은 있으면 잘 마시는 편이나 없으면 한달 이상도 일체 마시지 않고 견딘다. 특히 싫어하는 일은 물속에 들어가는 일이다. 물가에 접근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깊은 숲의 습지 등은 기린서식지의 경계가 된다.
●- 달리는 모습이 가관
천적은 뭐니뭐니 해도 사자다. 사자는 기린이 팔자모양의 불안한 자세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2~3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습격한다. 희생되는 기린은 대개 새끼기린이다. 성장한 놈은 시력이 좋고 귀도 밝아 적이 접근해 오는 것을 빨리 눈치채고 달아난다. 설령 습격을 받았다 할지라도 날카로운 발굽으로 역습을 가한다. 멀리서 다가오는적을 발견하면 기린은 재빨리 달아나는데 이때의 속력은 시속 65㎞나 된다.
기린이 온순하고 소심한 동물인 것은 틀림없지만 수컷끼리는 간혹 목을 무기로 해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때도 있다. 그러다가 목뼈가 부러지거나 탈구가 돼 죽는 일까지도 있다.
또 기린은 한 곳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거나 나디니기를 귀찮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길기 때문에 앉거나 걷거나 뛰는 모든 동작이 잽싸거나 가뿐하지 않다.
천천히 걸을 때는 말이나 다른 네 발짐승처럼 걷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른편 앞발을 내디딘 다음 같은 편의 뒷발을 딛고 이어서 왼편도 같은 순서로 움직여 보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삐 뛸 때를 가만히 살펴보면 퍽 우습게 뛰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오른편 앞·뒷발을 한꺼번에 똑같이 움직여 내딛고 왼편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뒤뚱거리는 폼 때문에 곧 옆으로 넘어질 것 같아 보인다.
기린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얘기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린은 잠을 잔다. 단지 서서 선잠을 잘 뿐이다. 새끼는 간혹 누워서 자는 경우가 있다. 다리를 쭉 뻗고 목을 접어 몸뚱이 위에 내던진 채로 곤하게 꿈나라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없다. 잠자는 시간은 평균 5분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렇듯이 따뜻한 봄철이 되면 기린도 춘정이 발동하게 된다. 이때 쯤 되면 기린부부는 공연히 안절부절 못하고 설쳐댄다. 그러다가 긴 목을 맞대고 비벼대면서 사랑의 밀어를 나눈다. 이 모습을 보면 서로가 괜히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더없이 애끓는 애정의 호소이며 감미로운 애무인 것이다.
기린의 임신기간은 큰동물답게 4백20~4백68일이다. 놀랍게도 암기린은 분만도 서서 한다.
새끼의 키는 나자마자 2m 이상 이다. 큰 놈은 신장이 2.8m나 되며 몸무게는 60~80㎏. 키 큰 어미 뱃속에서 나올 때 땅바닥까지 2m 가량을 굴러 떨어지지만 몸을 다치는 일은 없다.
새끼는 채 털도 마르기 전에 혼자 힘으로 일어서고 몇시간만 지나면 걸어 다닌다. 한달쯤 지나면 어미로부터 먹는 법을 배운다. 대개 생후 열달까지 어미의 젖을 먹는데 3년이면 다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