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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로프

타계(他界)한 천재 이론물리학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또는 소련 반체제학자로 널리 알려진 사하로프는 현대 물리학의 핵융합이론 반물질이론 중력이론 등에 커다란 공헌을 한 천재적인 이론물리학자였다.

'러시아의 양심'이라고 불리던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박사가 1989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14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협심증으로 별세해 파란만장의 한 평생을 마쳤다.

1921년 5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사하로프는 21세 때인 1942년 모스크바대학 수학부를 졸업하고 곧 레베제프물리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입소하여 약관 26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48년부터 소련의 핵무기개발그룹에 참가하여 소련 최초의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1953년에는 32세의 젊은 나이로 소련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이 아카데미 창립이래 정회원으로 선출된 가장 젊은 과학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에게는 스탈린상, 사회주의 노동영웅, 그리고 레닌상 등 소련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들이 줄이어 안겨졌다.

그러나 그는 계속되는 핵무기실험에서 나오는 방사성 낙진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고 1958년 마침내 그는 흐루시초프에게 소련이 계획하고 있는 일련의 핵실험을 중단하라는 특별탄원서를 보냈으며 그뒤부터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핵실험 반대 발언을 했다.
 

사하로프


추방과 박해의 세월들

과학문제 중심으로 전개하던 사하로프의 비판활동은 1966년부터 그 영역을 넓혀 24명의 저명한 소련 지식인들과 함께 스탈린의 복권을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다. 1968년에는 '진보, 공존 그리고 지적인 자유'라는 에세이집을 내놓으면서 군비경쟁의 종식, 개발도상국가들을 위한 국제적인 경제·기술협력, 환경에 대한 더 큰 관심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간의 친선을 호소했다.

사하로프는 이 책의 출판결과 모든 비밀연구에서 제외되었고 직위는 강등되고 봉급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감봉되었다. 그러나 오직 아카데미회원 자격만은 박탈되지 않았다. 사하로프는 1970년에는 모스크바 인권위원회를 창설하고 이스라엘로 이민하려는 유태계 소련인들을 비롯한 피억압집단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소련내 인권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75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하로프의 가장 큰 관심은 핵전쟁을 피하는 문제였다. "핵전쟁은 클라우제비츠식의 이른바 '다른 방법에 의한 정치'의 계속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도시 산업수송 교육시스템의 완전한 파괴와 방사능에 의한 물과 공기의 유독화, 인류의 빈곤 야만 무지로의 복귀, 방사능의 영향으로 생존자의 유전적인 퇴화, 문명의 파괴 등 세계의 두 초강대국의 불화가 빚어낼 이런 위험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성을 가진 생물이라면 누구든지 이 비극의 벼랑에서 우선 피하려고 노력한 다음 다른 필요를 만족시킬 생각을 한다. 인류가 이 벼랑에서 벗어나려면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0년 1월22일 소련당국은 사하로프에게 주었던 일체의 명예를 박탈하고 고르키시로 추방했다. 그는 1979년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소련군의 철군을 요구했던 것이다. 부인 본너여사도 소련체제에 대해 격렬한 비판운동을 하다가 1984년 남편이 있는 고르키시로 5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사하로프는 심장병을 앓고 본너여사도 심장병과 녹내장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1985년 사하로프는 본너여사가 서방에 나가 치료받게 출국허가를 해달라고 6개월간의 단식투쟁에 들어 갔으나 소련당국은 그의 몸을 꽁꽁 묶고 코를 막은 뒤 입으로 숨을 쉬는 틈을 타서 억지로 음식을 부어 넣기도 했다. 1985년 11월에 열리는 미·소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소련당국은 서방측과의 기술무역을 늘리는 대가로서 인권문제를 개선한다는 제스처를 보이기 위해 본너여사에게 출국허가를 내렸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유형에서 풀려난 사하로프 부부는 1988년 11월부터 미국과 유럽 나들이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1988년 10월에는 소련과학아카데미 간부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89년 4월에는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오펜하이머와 비교돼

사하로프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소련의 반체제물리학자로서는 널리 알려졌으나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사하로프를 빅뱅우주론을 제창한 가모프나 블랙홀을 예언한 오펜하이머와 같은 서열의 천재적인 이론물리학자로 꼽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진정한 천재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죽은 뒤에나 옳게 평가를 받는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이론물리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지금부터 재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사하로프는 뮤온(뮤입자)을 촉매로 사용한 핵융합이론, 우주에서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성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이론 그리고 중력에 관한 이론 등 매우 중요한 세개의 업적을 남겼다.

지난 해 세계과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폰즈와 플레이시먼의 상온핵융합실험 결과는 아직도 논의의 대상으로 남아 있으나 핵융합이라는 것은 두개의 원자핵이 강력한 힘으로 서로 접근하여 하나의 핵을 이루는 과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핵은 모두 플러스(+)로 하전되어 있어 서로 반발하기 때문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높은 열과 압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립자의 하나인 뮤온은 전자와 같은 마이너스(-) 입자이지만 전자보다는 2백배나 더 무겁다. 따라서 뮤온을 가진 수소원자는 전자의 경우보다 원자핵에 2백배나 더 가까운 곳에 자리하게 되어 원자의 크기도 그만큼 작아지며 원자와 원자간의 거리는 좁혀진다. 이리하여 바짝 접근한 핵들은 뮤온의 중개역할로 서로 융합할 기회가 커지게 된다.

사하로프는 1940년대에 이미 전자와 뮤온을 바꿔치기 하면 양자역학적으로 원자핵끼리 충돌할 확률이 매우 커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자가 여러 번 충돌하는 동안 이른바 터널효과가 일어나 원자핵과 원자핵이 서로 접근하게 되는데 뮤온을 이용해서 이런 확률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려 냉(冷)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하로프의 이 기발한 제안은 아직도 기초연구단계에 있으나 만약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된다면 인류는 에너지문제를 걱정 안해도 될 것이다.

상대론을 포용한 중력이론

1967년은 사하로프에게는 학문적으로 풍작의 한 해였다. 그는 이 해에 "중력은 물질의 흔들림에 기인한다"는 이론과 "우주에서의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성의 원인 연구"에 관한 이론을 발표했다.

사과나무의 일화를 남긴 뉴튼은 중력이 2개의 질량을 곱한 것과 비례하고 거리의 자승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의 이론을 원용하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모두 설명할 수 있으나 우주나 소립자 분야로 확대될 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다. 아인슈타인은 질량이 있으면 그 주변 공간에 어떤 일정한 일그러짐이 생기는데 여기에 다른 하나의 질량이 있으면 그 물체는 그 일그러짐의 영향을 받아 운동한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우리는 중학수학에서 직선은 두점간의 최단거리를 묶는 선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지구의(地球儀)상의 최단거리를 잴 때 직선은 지구의 면을 따라 구부러지듯,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는 어떤 두점간의 거리는 그 도중의 시간 공간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요컨대 아인슈타인은 먼저 시간 공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하로프의 이론은 우선 물질이 있고 물질의 운동하는 상태가 시간 공간을 갖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물질의 움직임이 전달되는 것이 중력이며 여기에 비로소 시간 공간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물질이 없는 곳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매우 높은 에너지나 ${10}^{-33}$ 같은 매우 작은 거리에서 물체가 서로 엉겨붙은 상태는 설명할 수 없으나 사하로프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된다. 사하로프의 이론을 확인하려면 매우 어렵다고 하지만 아무튼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사하로프의 이론을 원용하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에야 밝혀진 것이다. 사하로프가 중력이론을 발표한 이래 22년의 세월이 흐른 최근에서야 소립자이론의 통일이나 중력을 포함한 통일이론의 전개를 통해 이 이론은 차츰차츰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반물질이 적은 이유는?

한편 같은 해 사하로프는 "무슨 이유로 우주에는 물질로 되어 있는 것이 있는 반면 반물질로 된 것은 거의 없을까"라는 명제를 설명하는 이론을 발표했다. 태양이나 지구를 비롯하여 우리의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다. 물질이 만들어질 때는 같은 양의 반물질도 마땅히 생성되어야 한다. 예컨대 빛에서 양자를 만드려고 할 때는 동시에 반드시 반양자가 생긴다. 우주가 물질만 있다는 것은 이론물리학자들에게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우주가 생길 때 쿼크와 엔티쿼크가 생긴다. 그대로 두면 물질과 반물질은 충돌하여 소멸되어 버린다. 그런데 어떤 과정에서 '바리온 수의 보존'(바리온:양자나 중성자 등 소립자)이 깨져서 쿼크만 남는가. 이른바 '시간반전의 보편'이라고 해서 물리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반응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역의 반응도 일어난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바리온 수의 보존'이 깨진다고 해도 그역의 반응이 일어난다면 결국 우주에는 물질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1964년 소립자의 어떤 반응에서 이런 '시간반전의 보편'이 깨진다는 것이 명쾌하게 밝혀졌다. 사하로프는 '바리온 수의 보존'이 깨지고 '시간반전의 보편성'도 깨지며 더욱이 우주가 팽창하여 반응이 저하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지금처럼 바리온 수가 늘어나고 따라서 우리 우주의 모든 물질이 남게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하로프가 1967년에 발표한 두 개의 논문은 1~2장으로 정리한 매우 짧은 논문이었으나 우리의 우주관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독창성을 지닌 것이었다.
 

사하로프는 수소폭탄 제조에 기여한 공로로 소련에서 영웅대접을 받았으나, 그후 반핵운동에 앞장섰다. 사진은 1956년에 실시된 수소폭탄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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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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