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산업의 쌀'로 비유되는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은 80년대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웠다. 황무지에서 출발한 우리 반도체산업은 지난 88년 31억8천만달러의 수출을 기록해 일본 미국에 이어 '세계 3위'를 굳건히 다졌다.
특히 메모리반도체인 D램분야에서 우리 기술은 괄목할만하다. 삼성전자가 지난해말 일본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4메가D램의 양산에 들어가 세계최강 일본을 불과 6개월 차이로 추격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활짝 꽃피운 우리 반도체산업은 컴퓨터 통신 가전분야 등 모든 하이테크산업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더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역사는 60년대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페어차일드 모토롤러 등 세계 유수의 반도체메이커들은 한국의 싼 임금에 착안, 단순조립공장을 지어 하청생산 형식으로 반도체칩을 생산해 가져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74년경 한국반도체(후에 삼성전자로 흡수됨)가 전자손목시계용 C모스칩을 생산하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반도체분야를 연구한 강기동 박사가 귀국해 이 회사를 경영함으로써 당시 세계수준에 거의 육박하는 반도체제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엄청난 투자가 요구되는 반도체산업에 중소기업이던 한국반도체가 역부족을 절감하면서 2~3년 후 삼성그룹으로 인수됐고, 그후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메모리분야 세계수준
한국 반도체산업은 83년말 삼성이 반도체분야를 주력업종으로 육성하기로 하면서 집중적인 투자를 함으로써 비로소 본격화됐다. 그후 금성 현대 대우 등도 반도체분야에 전력투구하게 되면서 양적 질적으로 잇달아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80년대 반도체 초창기에는 수천억 수조원이 소요되는 엄청난 투자에도 불구하고 그 성패가 불분명하다는 측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미국과 일본이 양분하고 있는 세계반도체시장은 유럽국가들도 투자를 꺼리는 터여서 우리나라가 뛰어들기에는 때늦고 위험이 너무 크다는 우려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당시 과감한 투자가 없었더라면 이제와서는 영영 못따라갈 뻔 했다는 느낌이다. 산업전반에 반도체의 중요성이 날로 더해가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의 판단이 백번 옳았다. 어쨌든 80년대를 통털어 국내기업들은 반도체공정분야에 1조원 이상을 쏟아부었다. 아남산업이나 외국인업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반도체조립분야까지 합치면 약 27억달러가 투입됐다.
이에 따라 64KD램의 생산을 시작으로 2백56K 1메가D램을 거쳐 4메가D램을 양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국내 기술수준을 보면 가장 비중이 큰 메모리분야는 이미 세계 수준에 도달해 있다. 지난해초 1메가D램의 양산에 돌입했고 연말에는 삼성이 4메가D램을 양산하는 단계에 와있으며 90년에는 다른 업체들도 4메가D램을 생산할 것으로 보인다. 1만5천여명에 이르는 반도체생산 기술자들은 현장에서 생산기술을 정착시켜 공정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미 메모리분야에는 국내기업들이 상당부분 설계기술까지 확보하고 있다.
또한 전자통신연구소와 반도체업체들이 공동으로 16메가 64메가D램의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에 착수했다.
잇달은 특허분쟁
그러나 80년대 반도체산업은 획기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남겨놓았다.
우선 반도체산업이 메모리분야, 그중에서도 D램에만 치우쳐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 D램분야가 세계적으로 가장 비중이 크고 대량생산분야라는 점에서 초창기에는 시작하기 쉽지만, 부가가치가 적고 앞으로 비중이 점차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주문형반도체 마이크로프로세서 로직분야 등 다른 반도체분야에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 반도체기술은 공정기술에 비해 설계기술이 크게 뒤떨어진다는 지적이다. 90년대 가장 성장속도가 빠를 것으로 보이는 주문형반도체의 경우 소량다품종생산이므로 설계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국내에는 거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로 쓰이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경우 미·일은 32비트를 양산하고 64비트를 개발중인데 우리는 겨우 8비트 공정기술을 확보한 단계에 있다. 설계기술의 미비는 곧바로 부가가치를 높이는데 크나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분야에 보다 집중적인 관심을 쏟아야 하겠다.
셋째 지난 88년부터 휘몰아친 반도체특허분쟁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반도체산업이 일정 궤도에 오르자 TI 모토롤러 등 미국 반도체업체들은 잇달아 국내기업들을 제소해 지난해에는 삼성이 TI에 8천만달러를 지불하기에 이르렀다. 국내기업들이 로열티를 모두 지불할 경우 그 총액은 1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되며 일부 품목의 경우 생산중단의 위기마저 맞고 있다.
천신만고끝에 반도체산업을 육성한 결과 그 단물을 몽땅 미국의 다국적기업에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국내기업들은 일본이 미국의 특허공세에 대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했는지를 잘 연구해야 하리라 본다.
넷째 반도체산업의 기반이 되는 소재·재료산업이 국내에는 취약하다. 또한 막대한 투자가 요구되는 반도체산업을 잘 분석해보면 그 대부분이 클린룸 검사장비 자동화기술 등 장치산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가장비들을 국산화한다면 반도체산업이 산업적으로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국내 반도체기업들이 엄청난 기술인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소의 인력이나 장비 예산은 보잘 것이 없다. 기업체 외에 국내 연구진을 보면 전자통신연구소 과학기술연구원 과학기술원 서울대 경북대에서 몇몇 기초적인 연구가 수행되고 있을 뿐이다. 반도체산업의 기반이 되는 기초적인 연구들이 축적되려면 이들 연구소와 대학의 역량을 크게 육성해야 하리라고 본다.
90년대에는 이러한 과제와 함께 차세대 반도체로 불리는 화합물반도체 초격자소자 바이오칩 등의 연구도 게을리해서는 안될것이다. 특히 갈륨비소반도체는 현재의 실리콘칩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반도체재료로 90년대 중반에는 광범위하게 실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장비산업과 소재재료분야에는 업종의 특성상 중소기업들의 보다 활발한 참여가 산업전반에 활력을 불어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메모리소자에만 집중투자한 결과로 얻은 불안한 '세계3위'를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보다 다각적인 연구와 투자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