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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역이나 입산금지구역에 잘 못 들어가 혼나기도 하지만, 삼엽충의 다리화석 하나라도 발견하면 깊은 희열을 느낀다.

"전공이 무엇입니까?" "예, 지질학이요" "뭐라구요? 지질~학이요?"

대학 졸업반인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동안 이런 질문과 대답을 너무나 많이 반복해 왔다. 그만큼 지질학이란 학문은 일반인들에게 낯이 선 학문인가 보다.

내가 지질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교시절 지구과학을 좋아했고 지질학과 천문ㆍ기상의 부분 중에서 지구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지질학을 선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성실'이란 말을 거의 광적으로 좋아한다. 성실하려고 노력하고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항상 고민이다. 그러면서도 입시 때 계획표 만드는 일을 즐겨하지는 않았다.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 것이 성실하게 생활하는 자세라고는 생각했지만, 난 나름대로 '무계획 속의 계획"을 강조했다.

어쩌면 계획하고 지키지 못했을 때 느낄 자책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계획은 세우는 데 의의가 있다지만 난 그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연세대 지질학과 4학년 이미희 학생


●- 「잠자는 마녀」의 합격기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잠자는 마녀'였던 것 같다. 이는 물론 내가 지은 별명이다. 흔히 하듯 여왕이나 공주 정도면 좋겠지만 어쩐지 그런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때는 10시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했는데, 항상 8시 정도면 잠의 유혹을 받았다. 공부가 하기 싫거나 몸이 피곤해서 오는 잠이 아니라 하루를 마무리하는 꿈나라로의 초대였다.

그러니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처럼 공부하려고 밤샘을 하지 않고 그냥 편히 자서 체력을 유지했던 덕분이었다. 즉 일찍 자는 대신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공부했던 것이 비결이었다.

또 한가지 보탬이 되었던 것은 수업을 열심히 받은 것이다. 수업시간 중 졸다가 자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다른 공부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수업시간에 다른 공부한다는 말, 결코 웃고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잠도 열심히 자고 쉴 때는 편하게 쉬는 일에만 노력하고 먹을 때도 열심히 먹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대학의 문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지질학은 지구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깨어 있을 때는 밟고 있고 잠을 자면 등에 지는(?) 지구.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 지구를 밟고 있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나는 사람들이 모두 지구에 붙어 있다고 본다. 이런 지구의 구성성분은 무엇이며 그가 지나온 역사는 어떠한가? 또 인간에게 천재지변으로 간주되는 화산 지진 등과 요즈음 그 중요성이 더해가는 석유나 기타 자원의 탐사, 환경의 문제에까지 광대한 영역이 지질학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지질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냥 지구에 대해 알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선택할 때는 대학에 가기만 하면 지구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내가 붙어 있는 지구를 잘 알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뿌듯할까? 난 그 때 이미 어떤 소유감을 느껴 가슴이 벅차왔다. 동화에 나오는 투시경 같은 신비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상도 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어리석음을 깨닫는데는 4년까지의 시간도 필요없었다. 언제나 망상은 오래 정성들여 가꾸지만 그것이 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듯…. 과학은 마술이 아니라 수많은 선배들이 땀으로 이루어 놓은 결정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지구의 반지름은 6천4백㎞이다. 그러나 현대의 발달된 탐사기술로도 12㎞ 이상은 시추할 수 없다. 더 이상 깊은 곳은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실험으로 증명해내기 어렵기 때문에 때로는 다른 기초과학에 비해서 너무나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졸업반인 지금은 보이지 않고 보여줄 수 없는 사실을 증명해내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물론 지구의 내부를 밝히는 것이 지질학의 모든 연구는 아니다. 가까운 주위에서도 연구대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공룡의 화석도 관찰하고 북한산의 돌과 제주도의 돌이 다름도 살핀다. 또 도자기를 만드는 흙과 운동장의 흙이 다르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보통 사람의 눈에 그냥 지나쳐 가는 것들이 지질학자의 눈에는 모두가 연구대상이 된다.

지질학의 특성상 야외에서의 조사작업(우리는 필드라고 한다)은 매우 중요하다. '야외조사', 이 또한 얼마나 나를 마음 설레이게 했던 말인가?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만큼 멋있는 것은 아니었다. 힘들고 어려운 그리고 약간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길(특히 산길)을 가다 보면 예기치 않던 사건이 많이 생긴다. 갑자기 비가오는 것은 예사이고 지도에는 분명히 있는 길이 없어지기도 하고 지도가 틀려 길을 잃는 경우도 생긴다. 애써 찾은 노두(암반이 지표에 노출된 것)가 절벽 위에 있기도 하고 무서운 짐승(뱀이나 개 등)을 만나기도 한다. 개가 무엇이 무섭냐고 하겠지만 가정에서 키우는 개와는 사뭇 다르다.

군사지역이나 입산금지구역으로 잘못 들어가 여기 저기서 혼나기도 하고 이상한 차림 덕분에 주민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하였다. 또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단체로 왔다고 하면 경찰서에서 꼭 다녀가곤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안이한 생각으로 입학한 나에게는 새롭고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들은 지질학도만의 값진 경험이고 학문연구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기초과정이다.

어렵고 힘든 일인 만큼 남모르는 즐거움들도 있다. 아침에 식당에서 싸 간 맛없는 도시락을 산비탈 개울가에서 먹는 약간의 처참한 즐거움, 교수님 몰래 일찍 숙소로 돌아와 어떻게 변명할까 고심했던 순간들, 보고 오지도 않은 노두를 어떻다고 말씀드려야 할까 고민했던 기억들이 정겹다.

또 어쩌다 화석이 많이 나오는 곳에 가서 삼엽층 다리화석이라도 주으면 얼마나 신기하고 기분이 좋은지, 방취제 역할을 하는 돌(제오라이트)을 가져와 냉장고에 넣어 두었더니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셨던지, 내 기억에는 대학입학 때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요즘에는 야외조사를 위해 구입한 해머(망치)를 집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때 너무 좋은 망치라고 식구들이 칭찬해주는 부수적인 즐거움도 누리고 있다.

내가 앞으로 지질학자가 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질학자가 되지 않아서 모든 전공지식들을 잊을지라도 이런 일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생각이 날 때마다 과학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되새김질하게 될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지질학과에 입학해서 공부하는 동안 무엇을 느꼈는가 생각해 보았다. 두가지가 얼른 떠오른다. 지구는 내가 어릴 때 생각하던 것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과 과학자가 결코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과학자의 길은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받은 과학교육은 편하게 공부만 하면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만약 어린 시절의 나처럼 생각하는 후배들을 만난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우리가 붙어서 살고 있는 지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지의 세계로 남겨져 있다. 지구는 우리가 '자신'을 열심히 연구하여 인간에게 이롭게 이용되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선조가 살아 왔고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후세가 살아가게 될 지구를 우리는 너무 모르고 너무 학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5억년의 긴 시간을 지내 온 지구에게 수백만년의 역사밖에 갖지 못한 인류가 너무 오만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러분! 우리 모두 지구를 좀 더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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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미희 4학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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