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지금까지 꽃연구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아왔다. 농업연구는 손에 흙을 직접 묻히지 않고는한발짜고 나갈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생활의 출범에 있어서 무엇인가 자기 나름대로의 동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벌써 40여년 전이니까 그때만 하더라도 농과대학이란 별로 인기가 없는 대학이었고 지원율도 낮은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하루는 선친께서 불러 하시는 말씀이 집안의 가계를 이을 사람이 있어야 하니 나는 농과대학으로 가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아버님 몰래 사실은 음악대학의 피아노과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었다(극히 수준이 낮은 시절이었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아버님의 일방적인 결정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마지못해서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으나 농업중에 가장 음악과 가까운 분야를 찾았다. 그 결과 화훼(花卉)과라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평생을 두고 꽃을 공부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 우장춘박사를 만나
학교를 졸업하고 화훼연구생활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찾고 있는데 하루는 어느 교수님께서 부산에 가면 원예시험장이라는 곳에 우장춘(禹長春)박사라는 분이 계신데 거기에서 공부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말씀이었다.
나는 기꺼이 소개를 부탁드리고 그해 6월의 초여름의 어느날 우박사를 찾아갔다. 초여름치고는 몹시 더운 날이었다. 우장춘이라는 분은 얼굴이 크고 검은 데다 입술은 몹시 두텁고 약간 비대한 몸집이었다. 인사를 드리니 첫마디가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나는 화훼재배생리(花卉栽培生理)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좋다고 하셔서 나의 평생일거리는 여기서 결정되고 말았다.
연구생활이라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보라고 한다면 수도승이 입산수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내가 연구하는 작물에만 정신을 총집중하고 식물을 이해할 줄 알아야 제대로 연구가 된다. 지금 그 식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목이 마른지 배가 고픈지 추운지 더운지)알아볼 수 없다면 그 식물은 제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바로 식물과의 대화가 이러한 과정이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꽃을 가지고 어떤 품종이 어떤 것보다 더 크고 무겁고 빨리 피더라고 말해봐야 그것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 즉 식물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는 재배 그 자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작업은 남을 시켜서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가 해봐야 한다. 물주고 거름주고 추울 때는 덮어주고 더울 때는 벗겨주고 거두고 재고 달고 분석하는 등의 일련의 일을 내가 스스로 해봐야 비로소 어떤 것을 터득하게 되고 자신을 갖게 된다.
꽃에 대한 시험은 포장(圃場, 밭)에서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포장을 이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일도(均一度:포장의 상태가 고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내가 직접 밭을 갈고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지력(地力)이 어떤지 토질이 어떤지 토성(土性)이 어떤지를 알게 된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차질없는 시험을 할 수가 없다.
언젠가 젊은 친구들이 내방에 찾아와서 "우리에게 밭에 나가서 시험포장(試驗圃場)을 정지(整地:갈아서 고루고 다듬는 것)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노동이지 시험이 아니지 않느냐"고 항의한 적도 있다. 이때 나는 꽃에 대한 시험은 스스로 가꾸지 않고서는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젊은이들은 실험실에 들어 앉아서 측정하고 분석하는 것만이 연구라고 착각한 듯히다. 그들은 분석의 시료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동래에 있는 우장춘박사 밑에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작정했을 때 어머님은 몹시 싫어하셨다. 그것은 자식을 가까이에 두고 보겠다는 이세상 어머님들의 한결같은 소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굳이 가야한다고 결심을 말했더니 기념으로 구두를 한컬레 사주셨다. 그런데 나는 구두를 신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운동화는 귀했고 온실에서 물주고 거름주고 밭에서 북주고 풀매고 하는 데는 고무신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시험장 모든 직원이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그 구두를 5년이나 신었다.
학교에서 강의를 의뢰해 오기도 한다. 내가 직접 재배해본 작물의 강의자료 준비는 쉽다. 그것은 이미 실험을 통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시간에도 자신만만하다. 학생들의 어떤 질문에도 두려움이 없다. 특히 대학의 강의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자식의 다양한 소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A는 이렇게 말했고 B는 저렇게 말했다고 한가지의 사실에 대한 여러가지 각도에서의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주면 된다.
그러나 농민교육의 경우는 약간 각도가 다르다. 그것은 여러가지의 방법중 최선의 방법으로 최대의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는 시험장이나 연구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도 한다 .시험장이 대학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기초연구 외에 더 많은 작물을 대하고 임상적인(응용시험) 연구기회가 많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자면 역시 모든 일을 내가 스스로 해봐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 부업으로 보일러기사 노릇도
초창기의 연구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한달 2천4백원의 월급을 가지고는 하숙비도 되지 않았다. 세명이 모여 자취를 시작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서 어떤 때는 세끼 연속 밥을 굶은 적도 있다. 지금은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당시로는 누구나가 겪는 고생이었다. 밥은 굶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울 정도의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허다했다. 하루는 점심 때 어떤 선배의 집을 찾아 갔다. 마침 온식구가 한자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점심이라고는 하지만 감자를 삶아 대접에 담고 열무김치를 곁들여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 연구원들의 생활은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도였다. 그러나 모두들 별로 고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날 우리는 부업에 대한 의논을 했다. 세사람이 할 수 있는 마땅한 부업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겨울에 온실난방을 위해서 보일러를 때야 하니 그것을 교대로 해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보일러를 때면 하룻밤에 1백20원을 주었기 때문에 한달치면 우리가 받는 월급보다 오히려 많았기 때문이다. 막상 시작하기는 했지만 밤에 불때고 낮에 또 정상근무 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더구나 요즘처럼 기름보일러가 아니라 조개탄보일러였기 때문에 밤에 별로 쉴만한 시간여유도 없었다. 또한 아무리 조심해도 아침이면 얼굴에 탄가루가 묻어 깜둥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연구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는 이것 밖에 달리 별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입술을 깨물고 노력했다. 우리가 열심히 부업을 한 덕분에 그래도 그 추운 겨울에 온실 안에는 화려하게 꽃이 피어 고생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 '밥도 못먹는데 꽃이 다 무어냐'
그런데 61년 5.16이 나자 하루아침에 화훼과가 없어져버렸다. '밥도 못먹는데 꽃이 다 무어냐'는 논리였다. 참으로 서글펐다. 나는 임시로 채소과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화훼를 유지보존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났지만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사회는 꽃에 대한 지식이나 문화가 너무 없다. 만약 '밥도 못먹는데 꽃이 다 무어냐'는 논리가 타당하려면은 '밥도 못먹는 주제에 그림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음악은 또 무어냐'는 결론도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꽃은 다같은 인간의 정서를 아름답게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꽃이 없고 음악이 없고 그림이 없는 세상이란 바로 전쟁이다. 아니 전쟁터에도 철따라 개나리 진달래 무궁화 들국화는 피고 진다. 자연 속에 피고 지는 꽃은 어느 음악이나 미술보다 더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꽃은 음악이나 회화나 시보다 훨씬 값싸고 손쉬운 정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음악도 표제음악(表題音樂)의 경우는 가사가 있고 따라서 노래부르기가 쉽지만 무제음악(無題音樂)의 경우는 그렇게 쉽지 않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이나 드보르작의 교향곡 '신세계'를 듣고 그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1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나는 음악을 배우고 그림을 배웠다. 거기에 비하면 꽃은 아무런 기초지식이 없어도 들판에서 따거나 친구집에서 얻은 봉선화 코스모스의 씨앗을 뿌려놓기만 하면 여름에는 봉선화가 피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핀다. 울밑에 핀 봉선화나 가을하늘 아래 나부끼는 코스모스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 꽃을 보면서 싸움이나 전쟁의식이 싹트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5ㆍ16 이후 이와 같은 사실을 각계에 호소했고 마침 당시 정부관계자들의 이해에 힘입어 5년만에 화훼과는 부활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화훼연구를 안심하고 계속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벌써 20년의 세월이 지나고 비로소 연구생활이 무엇인지 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조금씩 터득하게 되었다.
●- 꽃은 정성을 쏟은만큼 보답한다
1965년에는 화란의 리세(Lisse)에 있는 구근연구소에서 연구연수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전직원이 주 1회씩 꽃의 종류를 나열해놓고 그것의 학명 병의 원인 대책 등을 적어내면 채점해서 다음시간에 본인에게 전달이 된다. 즉 현물을 보고 감정할 줄 모르고서는 연구나 지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시도해 봤지만 다들 오히려 귀찮아 하는 것 같아 요즘은 중지하고 말았다. 학자인 경우는 모르겠으나 기술자인 동시에 학자가 되어야 하는 시험연구기관에서는 꽃들이나 식물체의 모습이나 종자 또는 병충해의 피해상태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감별할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연구원으로서의 생명은 반감된다. 비단 연구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마타리라는 꽃을 이야기하는 데 마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외국꽃인지 우리나라 꽃인지 구근(球根)인지 숙근(宿根)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면 흥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어느 땐가 튜울립의 화아분화(花芽分化:튜울립은 수확 저장중인 구근 속에서 이미 꽃이 형성됨)단계조사를 혼자서 한달반 동안 반복했다. 그러다가 보니 나중에는 구근을 보기만 해도 무게에 따라서(한개의 튜울립 구근은 1등구가 12~13g 정도) 대충 어느 정도의 분화기에 있겠다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같은 연구실에 있는 동료에게 일이 너무 많으니 조사원을 한사람 임시로 고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견해차에 의한 오차가 생길 수 있으므로 혼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요즘 시험장에서 보면 자기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바쁘다 하고 조사는 고용원한테 시켜놓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그들이 써오는 논문을 읽어보면 3월에 삽목시켜서 5월상순에 정식시킨 것을 8월부터 9월에 걸쳐 조사시킨 결과라고 작성해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왜 우리는 하는 사람보다 시키는 사람이 더 많은지 안타까울 때가 많다. 내가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지 않으면 연구성과는 정확할 수 없다.
●- 농민들을 대할 때가 마음이 편안
요즘 나는 대학의 강의를 일체 사양하고 나가지 않는다. 강의는 내 나름대로 정의해 보건대 사제간의 호흡이 일치해서 지식의 전달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교류와 인격의 전수까지 가능할 때에 한해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우리의 대학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서로 이끌고 따를 수 있어야 할텐데 이끌 수 있는 인물의 빈곤도 있겠으나 따르는 자도 없는 살풍경한 곳이 바로 대학인 것 같다. 또 나 자신도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 자신의 부족한 지식이지만 진실로 나를 원하는 농민이 있는 곳이면 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시험연구에 지장이 없는 한, 전국 어느 시골에나 찾아간다. 지식을 갈망하는 농민들은 내 나름대로의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강습의 결과를 응용해서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올 때처럼 기분좋을 때가 없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날 비를 흠뻑 맞고 결구상추를 한소쿠리 이고 어떤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수국재배를 시험장에 와서 지도받아 했더니 금년에는 수국이 깨끗하게 꽃이 피어 집에서 가꾼 무공해 상추를 보답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밤 표고버섯 꿀 등등 나는 농민으로부터 받은 뇌물이 많다. 그러나 연구생활 35년의 더없는 보람으로 자랑한다. 대학의 강의를 그만두고 농민들을 상대로 강의를 시작한 기쁨을 이러한 때에 맛보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KBS TV를 통해서 '가정원예'라는 프로그램을 7년간에 걸쳐 약 2백70회 출연했다. 말이 2백70회지 한 프로의 방영시간이 30분인데다 낡은 촬영기로 어떤 때는 2시간 이상 녹화한적도 있었다. 원고작성시간 방영자료 준비시간 등 나에게는 무척 큰 부담이었으나 동료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것이 대학 강의보다 마음 편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안타까왔다.
내년이면 정년으로 공무원의 생활을 떠난다. 그러나 화훼 연구생활은 죽을 때까지 계속하게 될 것이고 아직도 못가본 나라들을 찾아 미지의 아름다운 꽃들을 감상할 계획이다. 또한 마지막 연구생활의 정리로서 지금까지 미루어놓은 꽃재배기술, 한국의 꽃, 꽃과 인생 등의 저서들도 마무리하고자 한다.
긴 세월을 지나놓고 보니 확실히 연구생활이란 처음에 말했듯이 입산수도였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너무 덤비지 말고 차분히 착실히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마지막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