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를 이해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그렇지만 우리가 중ㆍ고등학교에서 배웠던「지구과학」은 이해하기 힘든 개념과 복잡한 수식으로 얼룩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일식, 월식에 관하여 알고 있을 것이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거의 원형의 궤도로 1년 걸려 1회전을 하고 달은 한달에 한번 지구의 주위를 돈다. 지구와 달이 이렇게 움직이는 동안에 달이 지구와 태양의 꼭 중간을 통과하여 세개의 천체가 일직선상에 있게 되면 작은 달의 그림자가 지구표면의 극히 좁은 지역을 가려서 이 지방에서는 태양의 빛이 미치지 않게 된다.
즉 지구상의 한 지역에서 태양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거나(개기식) 또는 일부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부분식)이 일식이다. 지구전체로 볼때는 1년에 2번 일어나는데 일정한 장소에서 일식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적다. 부분식이라도 기껏해야 70년에 한번, 개기식은 2천3백년에 한번밖에 볼 수 없다.
이번에는 지구가 태양과 달의 꼭 중간을 통과하여 셋이 일직선상에 서게 되는 일도 있다. 그렇게 되면 태양의 빛은 지구에 가려져서 달에 미치지 않게 되므로 달은 빛을 잃고 꺼져가는 숯불과 같이 거무스레 둔한 빛을 낼 뿐이다. 이것이 월식이다. 월식은 보통 1년에 1회에서 3회 일어나는데 전혀 일어나지 않는 해도 있다. 월식은 일식과 달라서 그것이 일어났을 때 달이 보이는 장소라면 지구상 어디서나 동시에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구 전체로서는 월식이 오히려 일식보다 일어나는 횟수가 적으나 일정한 장소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월식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게 된다.
자연의 변화에 대한 관심
지금까지 일식과 월식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먼 옛날 2천년 전의 고대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지구 달 태양의 운동과 관련한 현상으로 파악된 현대와는 달리, 우주에 대한 공포와 외경의 마음으로 보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54년, 즉 신라 초기에서부터 9백65년간 29회에 걸쳐서 일식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일식기록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중국을 포함한 고대의 극동인들은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는 것을 우주의 용이 태양이나 달을 먹으려고 덤벼들었을 때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食)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북이며 소리나는 여러가지를 시끄럽게 두들겨서 용과 같은 것이 소리에 놀라 먹이를 놓을 때를 기다렸다. 물론 이때는 식이 끝난 상태.
애초부터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이러한 자연계의 변화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고려시대의 관측은 중세의 과학역사에 남을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모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일식과 월식의 추산을 잘못한 이유로 관리들이 처벌을 받기도 했다.
똑같은 자연현상을 두고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른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은 왜 푸른가?
지구과학이라고 하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개 많은 사람들은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배웠거나 소개받은 학과목을 연상할 것이다. 즉 대학입시 과학과목의 하나로만 생각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자연현상을 직접 이해하고 응용하는 학습과정(야외관찰 및 탐구)이 전무하고, 시험성적을 위한 암기위주의 학습방법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지구과학의 학문적 영역은 지금의 중ㆍ고 교과서에, 기계적이기는 하지만 잘 배열되어 있다. 지구의 구조, 구성물질, 대기의 운동, 지구의 역사, 지각의 변화, 별과 우주 등 그야말로 인류를 포괄하는 자연환경의 전부를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의 반지름을 계산하는 방법, 천체의 좌표계, 기단의 성질, 해수의 순환, 38억년 전부터의 지질시대 등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알려면 각각의 사항을 왜 알아야 하는지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매일 같이 강요받는 일이기는 하지만,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다.
학문의 지식은 세분화되고 난해하다하여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을 올바르게 영위하게 하며 힘겨운 노동의 짐을 들어주고, 또한 학문 그 자체의 연구를 효율적으로 발전하게 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이땅의 참된 청소년이라면 '하늘이 왜 푸른가?' '바닷물이 왜짠가? ''저녁노을은 어찌하여 붉은가?'를 흥미있게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대인들 처럼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나 신앙의 대상으로만 여겨서도 안될 것이며 또는 하늘과 같은 절대 군주에 충성하는 태도를 가져서도 안된다. 자연과 조화롭게 일체가 되어 올바르게 지구과학을 학습한다면 병들고 부패한 사회를 부정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45억년이라는 지구의 역사, 10만 광년 지름의 우리 은하 중심에서 3만 광년 떨어진 태양계, 1백배나 큰 태양으로부터 1억5천만㎞나 떨어진 지구.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 이 모두를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진정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이 모두를 인식할 수 있고 변화하게 하는 힘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인간다움을 느끼고 존중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과학을 학습하는 것은 올바른 세계관과 자연관, 인간다운 삶의 방법을 깨닫게 하는데 일조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까지 과학교육의 여러 문제점들이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학교의 실정을 잘 모르거나, 간접적으로만 알아오던 대학교수, 연구원들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과학교육의 개선은 우리의 학교실정과는 동떨어진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한 이론에 의거했던 것이었음을 많은 연구자들이 밝히고 있다. 교사와 학생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오랫동안 느껴왔던 것이다.
1989년 4월, 36명의 현직교사와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지구과학교사회'에서는 지구과학 교육에 있어서의 제반 문제점과 그 대책을 연구, 실천해오고 있다. 여기서는 과학교육과정상의 문제점을 거론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되며, 우선 '지구과학 교사회'에서 연구된 고등학교 과정 지구과학 교과서 1단원을 중심으로 문제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수학이나 물리와는 다르다
지구의 모양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오이드(Geoid)의 개념은, 일상성과는 무관하여 학생들의 관심을 수학적으로 한정 짓는다. 더군다나 지오이드 개념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지구물리학적으로 유용함을 어느정도 체득한 상태라야 가능할 것이다.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들이 우주를 숫자로만 파악하고 거기에 신앙을 갖듯 기하학적, 수학적 계산능력 자체를 유난히 강조하는 현행교과서의 폐단은 전반적으로 고쳐져야 할 문제점이다. 예를 들자면 지구를 완전한 원이라고 하여 지구의 크기를 계산하는 것을 학습하게 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것은 수학의 기하연습 이상이 아니다. 자연의 물성, 즉 지구의 모양을 이해하는 여러 소재 중의 하나로서 간단히 취급되어야 한다.
○지구의 질량, 밀도 등을 수학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나 정성적(定性的) 서술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구의 구조를 나타내는데 대기권이나 수권 등을 도입하는 것은 '지구의 구조'라는 개념자체의 근거를 오히려 모호하게 한다. 소위 개념을 구조화한 것이 역으로 개념을 혼동하게 하는 예가 될 것이다. 개념의 구조화는 기성학자들의 일방적 취향일 뿐, 우리나라 학생들의 인지 발달과정이나 정서적 관심과 관련하여 그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고 있다.
○지구의 힘에서는 전자기장의 개념을 비롯한 장의 개념이 충분히 설정되지 않고, 물리과목에 막연히 의존하는 허술한 교과과정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중력의 단위, 벡터의 사용, 지오이드와 중력보정의 문제 등이 지적된다.
○지구의 구성물질을 학습하는데는 많은 내용을 산만하게 열거하고 있다.
○지구의 운동에 있어서, 자전의 증거로 퓨코의 진자와 지구 전향력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강조점이 지구 자전의 증거라는데 주어져 있어 학생들의 사고과정과 분리되어 있다. 즉 퓨코 진자의 실험이나 전향력(f=2cosinΦ)의 특성을 도입개념으로 충분히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구공전의 증거로 도플러 효과를 들고 있는 것에도 볼 수 있다.
난해한 개념들을 도입하는 근거나 적용의 범위를 설명하지 않고 나열하는 것은 학문의 이해나 발전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학생들에게 무력감과 좌절감만을 심어줄 뿐이다. 천체좌표와 항성시의 계산 등을 강조하는 것도 한 예가 될 것이다.
○교과서에 도입되어 있는 표 삽화 사진 등은 개념이해를 돕기보다 오히려 난해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료에 대하여 교사들은 별도의 해설을 해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효율을 높이는 소재로서 부적합한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동일한 개념에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학습에 혼란을 주는 일은 한시바삐 고쳐져야 한다. '지구과학 교사회'에서는 이러한 조사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단적인 예를 들어 용어의 사용문제를 우선 지적하고자 한다. 모암과 암반, 수평자기력과 수평자력, 조산운동의 과정, 대기의 연직순환 모식도 등이 교과서의 집필자들마다 달리 사용되고 있다.
자구를 움직이게 한 과학자들
다음에 소개하는 일화에서 여러분들은 세사람의 잘 알려진, 그러나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 과학자의 삶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 전도서 1장에는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 하고, 여호수아 10장에는 여호수아는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루르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성서의 이 두구절이나 다른 구절을 인용하여 교회는 태양이 움직이고 지구는 정지한 것으로 가르쳤다. 지금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은 17세기까지 어떤 입장에서건 누구나 받아들여야 했고 반대하면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성당의 교회 참사의원직을 맡고 있었던 학자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고 그 주위를 공(천구)들이 각각의 자체 반지름과 축, 회전속도를 가지고 운동한다고 보았다(지구중심설). 그런데 행성들의 복잡한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80개 이상의 공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도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모든 일을 완전히 할 수 있는 신이 이렇게 추한 우주를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30년 동안 우주를 고안하는 작업을 계속하여 34개의 공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도식을 완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물론 신이 지배한 움직이지 않는 하늘(종동천)을 부정한것은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는 우주가 신의 지혜로 표현되었다는 당시의 철학(세계관)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천구와 우주에 대한 기본관념을 부정하는 중대한 소재로 작용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는 세상으로 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과 교회의 노여움을 두려워 하여, 그가 죽던해인 1543년에 와서야 미루어오던 책의 인쇄를 끝마쳤다고 하는 연구도 있다.
이탈리아 학자 브루노(1548-1600)는 중심이 없고 무수히 많은 별, 그리고 무한한 우주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지지하는 내용의 책이었으나 교회의 미움을 사서 종교재판에 끌려 나갔다. 브루노의 주장이 옳다면 신이 만들어 놓은 천구는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며, 중세사상의 전 조직도 불신당하는 결과가 된다.
그는 1600년에 종교재판에서 파문을 당하고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졌다. 지구가 무수히 많은 항성(별)들 중의 하나이고 창조의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진다면 당시까지 존중되고 보존되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야 할 엄청난 것임에 분명하다. 교회와 당대의 특권층들이 위기에 빠지게 되는 논리임에도 자연의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 누구도 거스릴 수 없었다.
갈릴레오(1564-1642)는 은하수와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고 코페르니쿠스와 브루노의 생각이 실현되었음을 보았다. 또한 이러한 사실들은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1616년에 교회는 '태양이 정지해 있고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은 틀린것이다'라는 성명을 내고,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금서로 하였으며 갈릴레오에게는 그런 생각을 가르치거나 변호하지 않도록 공식적인 경고를 하였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갈릴레오는 1630년까지 이 이론에 관한 공식적인 발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 1630년 '두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저서를 내기까지 그는 자연계의 물질 운동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낙하운동이나 진자의 운동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은 카톨릭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었으나 종교재판소에서 다시금 내용을 조사하여 갈릴레오를 재판소에 출두하게 하였다.
1633년 6월22일 로마의 미네르바 수도원에서는 1616년 당시의 경고를 어겼음이 재삼 들추어졌고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그대 갈릴레오는 과오를 범했으며 성서에 위배되는 교의를 선고가 결정된 뒤에도 계속해서 믿고 지지해왔다. 그 결과 그대는 성스러운 법규에 의해 위반자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참된 마음과 성실한 신앙을 가지고, 로마 카톨릭과 법왕의 교회에 위배되는 모든 과오와 이단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저주하고 혐오한다는 조건으로 사면해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갈릴레오의 저서를 포고에 의해 금지할 것을 선고하며, 우리가 정하는 기간 동안 종교재판소에 감금할 것을 통고한다. 회개의 방법으로 앞으로 3년간 매주 1회, 7편의 뉘우치는 시편을 외울 것을 명하며 이것을 늦추거나 변경, 취소하는 권한을 유보한다.
신고가 끝난 다음 갈릴레오를 꿇어앉게 하여 다음과 같은 서약을 시켰다.
나 갈릴레오, 고 빈센치오 갈릴레이의 아들, 피렌체인, 당 70세는 재판소에 나와 추기경님 및 이단의 부패에 대항하는 전세계의 그리스도 교국의 종교재판소장님 앞에 꿇어 엎드려 복음성서에 손을 얹고서, 성 카톨릭과 법왕의 로마교회가 지지하고 선교해 온 모든 것을 나는 언제나 믿어왔으며 현재도 믿고 있으며 신의 도움으로 장차에도 믿을 것을 서약합니다. 그러나 이 종교재판소에서 법에 의하여,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있어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견해를 포기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또 위의 교의를 지지하고 변호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 교의를 취급하는 책자를 쓰고 출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위 재판소에서 심히 이단의 혐의가 있는 것, 즉 내가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의 둘레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지지하고 믿고 있다고 엄격히 비판되어,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하여 여러분과 모든 카톨릭 교도의 마음에 품은 격렬한 혐의가 풀리기를 갈망하기에, 나는 진심과 성실한 신앙으로 위의 과오와 이단 그리고 신성한 교회에 위배되는 모든 과오와 이단 행위를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나는 앞으로 그런 혐의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나 말로든 문서로든 다시는 결코 주장하지 않으며, 만약 이단자 또는 이단의 혐의를 받는 한사람이라도 알게 되면 그사람을 이 종교재판소 또는 내가 사는 곳의 종교재판관이나 사교에게 알릴 것을 서약합니다. 더욱 나는 이 종교재판소에서 내게 과하거나 앞으로 과할 모든 회개를 실행하고 완전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 그런 일은 결코 없겠습니다만-자신의 말로서 한 약속이나 서약에 위배되는 행위를 할 때에는 나는 그런 위반자에게 내려지는 법률로 규정된 모든 형벌을 달게받겠습니다. 신이여, 내가 손을 얹고 있는 성 복음서여, 나를 구하소서.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상과 같이 선서하고 약속합니다. 이것의 증거로서 나는 이 선서의 문서 한구절 한구절을 되새겨 외우고 나서 나 자신의 손으로 서명합니다. 1633년 6월22일 로마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세사람의 학자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학습태도는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노력에(비록 노력의 내용이 많은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대하여 스스로 신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간단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암기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음으로 우리들의 학교에서 고쳐야 할 학습태도를 들어보자. 우선 많은 암기는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연구자들은 밝히고 있다. 물론 적용과 응용의 빈도가 증가될수록 기억에 남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조건 암기하는 것은 효과적인 학습습관이 못된다. 정녕 암기를 할 수 밖에 없는 학생들은 차라리 문제풀이를 하는 학습을 할 수도 있다.
둘째 자연을 여유있게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구태여 거창한 발명이 아니라도 지구과학을 올바로 학습하는 데는 관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 그리고 기능적인 연구자들은 제대로 관찰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릇된 지식의 고정관념과 그리고 자의적인 생각들이 앞을 가려, 있는대로의 자연을 왜곡되게 관찰한다. 우리는 위의 종교재판 이야기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구가 원형이라는 인식으로 가득차 있을 때 타원형이라는 인식은 용이하지 않다.
셋째 많은 기록과 분류작업을 귀찮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의미있는 일은 스스로의 힘과 노동없이 기대할 수 없다. 연구 결과가 우리에게 편리함을 준다고 하여 연구과정 자체가 항상 편리한 것은 아니다. 특히 지구과학과 관련한 연구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대단히 방대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만큼 성실한 노력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이외에도 강조되어야 할 사항이 많으나 한가지만 더 들어 본다면,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산업, 군사과학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과학의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미술적이고 신비한 것인양 미화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것은 진지하게 의문을 갖는 학생들이나 연구자들에게 무력감을 조장하는 부작용마저 낳게 할 소지가 많다.
모두 관련돼 있다
바람이 부는 과정은 어떤 연구 분야일까?
이와같은 물음은 전문적인 학문영역에 관한 의문이다. 즉 기상학 혹은 대기과학의 영역, 또는 물리학 유체역학의 영역등에 해당될 수 있다. 이렇게 연구 영역들이 나뉘어져 있는 것은 연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대단히 많이 세분화되어 있는 각각의 영역의 연관관계가 소원하게 된 데 문제가 있다. 심지어는 각각의 영역에 대하여 과학자들 스스로가 모르고 있거나, 관심자체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현대과학의 이러한 경향은 점차 각각의 고유영역의 구별이 모호하게 되고 상호 통합적인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 생화학, 물리화학, 지구물리 등)
여기서 지구과학은 각각의 연구분야에 있어서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일까. '통합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지구과학의 소재들은 개별적이고 세분화 된 연구에 한정될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물리나 화학 생물 등 기초적인 자연과학 분야도 그러하지만 지구과학의 소재 자체가 매우직접적으로 주변환경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비 바람 일기변화 등)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연구가 제대로 의미를 회복하자면 통합된 자연의 소재, 즉 지구과학의 소재를 학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 전문인을 희망하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ㆍ고교에서 지구과학을 학습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만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통합적인 자연과학 소재를 연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 교과를 학습하는 일반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중ㆍ고교에서 지구과학을 학습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올바른 세계관(자연관)을 확립하여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과학자의 가치관
원소 개념을 체계화한 프랑스의 과학자 라보아제는 프랑스혁명 당시 처형되었다. 라보아제는 당시에 악명높은 '세리'조합의 이사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일을 맡은 것은 물론 과학연구를 더욱 잘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라보아제의 경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배우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과학연구라 할지라도 사회ㆍ정치적인 영향을 과학자 스스로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대과학을 군사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연구소재가 군사목적에 활용된다는 단순한 이유만이 아니라,연구비의 지원이나 연구과정 등이 군사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과학을 연구하는 당사자 역시 라보아제와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자연과학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과학연구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배경과 영향에 대하여 과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의 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청소년기의 과학학습은 반드시 사회과학 분야와의 관련속에서 학습되어야 마땅하다. 소수의 과학 전문 인력만이 우리를 포함한 전체 인류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치스하의 독일에서는 과학기술자들이 완전히 조직화되고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전쟁수행에 동원되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연구자들이 잘 조직되었다고 하여 과학에의 성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교훈으로 남아 있다.
근자에 와서 각종 공해와 관련한 문제들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중대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상기후에서 나타나는 지구기온의 변화는 각종 농산물 생산과 사회생활에 심각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소수의 과학자 혹은 한 나라의 대응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공해에 의한 생태계의 파괴문제도 과학 전문 연구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연구자들은 앞으로의 세계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단일한 체계로 연구 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기하고 있으며 그렇게 발전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이에 관련한 가장 유용한 연구는 '과학(기술)사'에 관한 것이다.
현행의 대학입시제도 아래서는 수개월 아니 수일 동안만이라도 야외에서의 직접 탐구를 허용하지 않는다. 탐구학습이라는 미명아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실험실에서의 단순실험이 고작이다. 더욱이 지구과학과 관련한 실험은 야외에서의 활동이 강조될 수 밖에 없는 일인데, 이러한 탐구활동이 제대로 되려면 많은 경비가 든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참된 과학 학습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게 되어버렸다.
교육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한 학급에 50~60명이 하루에도 7~8시간을 학습하는 동안에는 차라리 이러한 기대를 하기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교육환경의 열악함과 모순을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교사는 물론이고 학생들 역시 그릇된 교육환경과 내용을 작은 일부터 단호하게 거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교과과정을 확립하여야만 한다. 우리가 학습을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무한정의 준비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다운 삶의 과정으로서의 학습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