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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 재사용우주선

리처드 닉슨(1913-1994)은 1960년 제35대 대통령선거에서 만난 존 케네디(1917-1963)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케네디는 1946년 29살에 하원의원이 된 후 35살에 상원의원, 43살에 대통령에 선거에 나선 미국의 젊은 지도자. 그런데 닉슨도 젊은 지도자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1946년 33살에 하원의원, 37살에 상원의원이 됐으며, 40살에는 부통령이 돼 8년 동안이나 통치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젊음과 능력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닉슨은 잘 생기고 연설도 잘했던 케네디에게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닉슨은 케네디에게 참패를 당한 후 8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1968년 제3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미국은 닉슨의 정적이었던 케네디가 뉴프런티어 정신을 강조하면서 수립해놓은 아폴로계획과 베트남전쟁에 엄청난 돈을 퍼붓고 있었다. 닉슨은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북베트남과 휴전협정을 맺은 것.

닉슨은 우주개발에도 손을 댔다. 미항공우주국(NASA)의 예산을 대폭 줄였고, 아폴로계획도 중도에서 포기시켰다. 닉슨 재임 전인 1968년 NASA의 예산은 46억달러였으나, 재임한 1969년에는 40억달러, 1970년에는 37억달러, 1971년에는 33억달러로 크게 줄었다. 이 과정에서 NASA에서 일하던 수많은 인재들도 자리를 떴다.

닉슨의 등장으로 NASA는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이때 생각해낸 것이 바로 우주왕복선(space shuttle)이다. 공식 명칭은 우주수송시스템(Space Transpotation System)으로, STS-00이라는 이름이 붙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시험용 우주왕복선 엔터프라이즈호는 활공연습만 하고 우주에 간 적이 없다. 현재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NASA의 플래처 국장(1971-1977년, 1986-1989년 두번에 걸쳐 NASA 국장을 역임)은 기존의 우주로켓은 한번 쓰고 버리는데 재사용할 수 있는 우주왕복선을 개발하면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고체연료 로켓을 재활용하는 것. 그는 더 나아가 마치 여객기 운항 계획을 세우듯이 우주왕복선 수송계획을 세워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보았다. 만약 일반 인공위성과 국방부(DOD)에서 따로 쏘아올리는 군사위성 발사사업을 통합한다면 충분히 수지가 맞았다. 결국 NASA는 ‘우주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기치를 포기하고 군(軍)과 노골적으로 결합하고 말았다.

우주왕복선 개발 계획은 1972년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때 세워진 운항계획은 매주 1회, 연간 50회 발사. 그러나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에 월 2회, 연 24회로 낮췄다. 이 역시 무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엔터프라이즈라는 시험용 우주왕복선이 개발된 것은 1976년. 원래 NASA는 미국 독립 2백주년을 기념해 ‘콘스터튜션’(Constitution)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인기리에 방영되던 TV 시리즈 ‘스타트렉’을 보던 시청자들이 백악관에 편지를 보내 엔터프라이즈로 바뀌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스타트렉에 등장하는 우주선이다. 엔터프라이즈는 엔진이 없었기 때문에 보잉 747기의 등에 업혀 활공 연습을 했다.

최초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는 1981년 4월 12일 우주비행에 나섬으로써 새로운 우주여행 시대를 개막했다. 과거의 우주선들은 귀환할 때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기 때문에 원하는 곳에 착륙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은 활공을 통해 원하는 장소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존 영과 로버트 크리펜을 태운 콜럼비아호는 54시간 동안 지구를 37번 돌고 돌아왔다. 이후 콜럼비아호는 군사위성과 상업위성을 쏘아올리고, 우주실험을 하는 등 우주왕복선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지금까지의 비행횟수는 26회(1999년 9월 기준).

두번째로 개발된 우주왕복선은 챌린저호. 1983년 4월 4일 첫 비행에 나선 후 우주왕복선 사상 최초의 우주유영,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샐리 라이드 탑승, 최초의 흑인 우주비행사 기언 블러퍼드의 탑승 등 많은 화제를 낳았다. 그러나 1986년 1월 28일 10번째 비행에 나설 때 폭발하는 바람에 7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챌린저호 폭발사고는 NASA를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그중 우주개발이라고 하면 항상 우호적으로 기사를 써주던 기자들이 등을 돌린 게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들은 우주는 위험한 곳이며, 우주개발은 실익이 없다는 기사들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1988년9월29일 디스커버리호가 2년8개월 만에 다시 비행에 나설 때까지 우주왕복선의 발사는 중단됐다.

디스커버리호는 1984년 8월 30일 처녀비행에 나선 세번째 우주왕복선. 주로 통신위성이나 군사위성의 발사를 맡았고, 돈을 받고 외국위성을 쏘아올리거나 외국 우주비행사를 태워주는 일을 했다. 비행횟수는 26회.

애틀랜티스호는 1985년 10월 3일 첫 비행에 나섰다. 주로 러시아의 우주정거장 미르와의 도킹 업무와 군사위성 발사임무를 수행했다. 비행횟수는 20회. 그리고 챌린저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개발된 엔데버호는 1992년 5월 7일 첫 비행에 나서 13회의 우주비행기록을 세웠다. 미국은 지금까지 우주왕복선을 타고 97번(한번은 실패)에 걸쳐 우주비행에 나섰다. 당초 목표와 달리 1년에 평균 5회 정도 비행한 셈. 1백번째 우주왕복선의 영예는 2000년 3월에 발사될 엔데버호가 차지할 예정이다.

우주왕복선은 플래처 국장의 생각처럼 경제적이지 못했다. 1파운드(0.4536kg)를 쏘아올리는데 1만달러가 들었다. 그래서 NASA는 완전 재사용우주선(Reusable Launch Vehicle)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우주왕복선은 고체연료통은 회수하지만, 액체연료통은 버리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완전 재사용 우주선은 1파운드를 쏘아올리는데 1천달러 정도 드는게 목표다.


미래의 우주왕복선 X-33


현재 미국이 개발하는 재사용 우주선은 2가지. 마하 8(1만km/시)의 속도를 지닌 X-34는 엔터프라이즈호나 러시아의 부란(러시아어로 ‘폭풍설’이란 뜻. 1988년 단 한번 무인시험비행)처럼 비행기에 실어 발사하는 우주선이다. 또 하나는 마하 15(1만8천km/시)의 속도로 나는 X-33으로, 1단 로켓으로 단 한번에 우주로 나갔다가 비행기처럼 활공해서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다. 특별히 록히드 마틴사가 개발하는 X-33은 ‘벤처스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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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홍대길 기자
  • 사진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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