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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뇌는 무게가 1.3kg 정도다. 몸무게의 고작 2% 수준이지만 우리가 쉬고 있을 때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처럼 유지하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기관을 ‘비싼 조직’이라고 부른다. 뇌 이외에도 심장이나 간, 대장, 소장 같은 기관이 비싼 조직이 속한다. 심장이 멈추면 죽고 소화는 수 시간에 걸쳐 일어나므로 이들 기관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건 수긍이 간다. 하지만 아무 일 안 하고 멍하니 있을 때는 뇌도 쉴 텐데 왜 이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까.

마커스 레이클 미국 워싱턴대 의대 신경학과 교수에 따르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뇌 역시 심장처럼 한 순간도 쉬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클 교수팀은 2001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주목할 만한 논문을 한편 발표했다. 지금까지 2700회가 넘게 인용된 이 논문에서 레이클 교수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에도 뇌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뇌영상만으로는 쉬고 있는지 머리를 쓰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놀랍게도 이런 명백한 사실이 1990년대 후반까지도 무시돼 왔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뇌도 쉴 거라는 ‘믿음’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레이클 교수는 이처럼 우리가 빈둥거릴 때도 열심히 활동하는 뇌의 영역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이름지었다. 최근에는 줄여서 디폴트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디폴트란 컴퓨터에서도 쓰이는 용어로 ‘초기’, ‘기본’이라는 의미다. 즉 어떤 시스템이 켜졌을 때 기본적으로 작동하는 상태다. 뇌에서 디폴트 네트워크를 이루는 부분은 안쪽 전전두엽과 바깥쪽 측두엽, 안쪽과 바깥쪽 두정엽이다(114쪽). 즉 대뇌피질의 상당 부분이 빈둥거릴 때(디폴트 상태)도 서로 열심히 신호를 주고받는 셈이다.


[주의 집중이 필요한 과제를 수행할 때 오히려 활성이 떨어지는 부위를 뇌의 위에서부터 아래로(Z=48~Z=-18) PET로 찍은 사진이다. 전전두엽과 측두엽, 두정엽 일부에서 활성이 두드러지게 떨어지는데 붉은색과 노란색 영역이 디폴트 네트워크다.]

흥미롭게도 뭔가에 집중할 때 뇌의 에너지(포도당) 소모량을 측정해보면 빈둥거릴 때보다 채 5%도 늘어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한 뒤 허기가 느껴질 때 ‘머리를 쓰느라 뇌가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생리적인 관점에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심장이야 몸 구석구석에 산소를 공급해야 하므로 생존하려면 쉴 수가 없다고 해도 뇌는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일까.



[디폴트 네트워크의 위치 특별히 집중해서 하는 일이 없을 때도 활발히 작동하는 영역이 디폴트 네트워크다. 대뇌피질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좌우 뇌를 나눠 좌뇌에서는 바깥쪽이, 우뇌에서는 안쪽이 보이게 해서 디폴트 네트워크의 분포를]

혼자서도 잘 노는 뇌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해석이 있는데 다들 나름 타당성이 있지요.”

연세대 심리학과 이도준 교수의 설명이다. 먼저 디폴트 네트워크가 일종의 대기 모드 같은 역할을 한다. 만일 몸이 쉬고 있을 때 뇌의 회로도 넋 놓고 쉬고 있다면 갑작스런 상황이 일어났을 때 즉각적인 대응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평소에도 뇌가 활동하며 일종의 예열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또 다른 설명은 디폴트 네트워크가 자아의 정체성 유지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을 하거나 외부의 자극이 있을 때만 뇌가 활동한다면 ‘나’라는 일관성을 구축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뇌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외부의 표상(자극과 정보)을 자아에 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디폴트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뇌 부위의 기능을 보면 위의 설명이 꽤 설득력을 지닌다. 먼저 전전두엽은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부분이다. 또 측두엽에는 기억에 중요한 기관인 ‘해마’가 자리 잡고 있다. 즉 이 영역들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해내고 이를 토대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이도준 교수는 “다들 경험하겠지만 빈둥거리고 있을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이럴 때 하는 생각을 ‘잡념(mind wandering)’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즉 몸은 쉬고 있어도 뇌는 온갖 잡념으로 분주한데 이 잡념은 대체로 어떤 식으로든 ‘나’와 관련이 있는 생각들이다.

흥미롭게도 피험자에게 특정한 과제를 하게 한 뒤 양전자단층촬영(PET)이나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뇌활동을 측정하면 디폴트 네트워크의 활성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테스트를 하기 전 딱히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이 생각 저 생각(‘언제 시작하나…’ ‘저 친구 쌀쌀맞게 생겼군…’ 등등)으로 디폴트 네트워크가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러다 “홀수일 때 왼쪽 버튼을, 짝수일 때 오른쪽 버튼을 누르세요” 같은 ‘자신을 잊을’ 과제를 부여받으면 오히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활성이 줄어드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을 할 때조차 뇌가 소모하는 전체 에너지의 60~80%는 여전히 디폴트 네트워크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레이클 교수는 천문학 용어를 빌어 와 이 현상을 ‘뇌의 암흑에너지’라고 불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만으로는 우주에 존재하는 질량의 4%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천문학자들은 나머지 96% 가운데 23%가 암흑물질이고 73%가 암흑에너지라고 추측한다. 어떤 과제를 하건 안 하건 뇌가 소모하는 에너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디폴트 네트워크를 뇌의 암흑에너지로 부른 이유다.

레이클 교수는 “최근까지 사람들은 뇌의 기능을 컴퓨터에 비유해 감각을 통해 자극 같은 외부정보가 ‘입력’되면 그에 맞는 행동을 ‘출력’한다고 설명했다”며 “하지만 디폴트 네트워크의 발견은 뇌에서 이런 입출력 시스템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작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즉 우리의 뇌는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인 뒤 이를 우리의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해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 적절한 대응을 한다는 것. 즉 입력되는 정보는 요리의 재료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자기 투형의 네가지 형태]

인류는 자신의 관점을 다른 시간,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인 자기투영이 발달했기 때문에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자기투영 관점이다. 기억과 조망, 마음의 이론이 일어날 때 뇌가 활동하는 영역이 거의 비슷한데 디폴트 네트워크와 겹친다.




기억하지 못하면 상상하지도 못해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랜디 버크너 교수는 우리가 생각하는데 ‘자기투영(self-projection)’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기투영이란 우리의 관점을 지금 이 순간에서 다른 관점(과거나 미래, 남의 입장)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다.

만일 이런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주변에 일어나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말다툼을 하다가 친구한테 “너 잘났다”는 소리를 들을 경우 자기투영 능력이 없다면 말 그대로 ‘내가 잘났다’는 뜻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에 자신의 관점을 투영하면 ‘꼴도 보기 싫다’라는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자기투영 능력이 없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이런 자기투영에 관여하는 뇌 영역이 바로 디폴트 네트워크와 겹친다. 사실 잡념은 외부의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기투영 활동이다. 버크너 교수는 “잡념은 디폴트 네트워크가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외부 세계와 별도로 세상을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자기투영을 이루는 기억(과거)과 조망(미래), 마음의 이론(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은 서로 별개의 과정인 것 같지만 역시 밀접히 연관돼 있다. 실제로 과거의 일을 기억하거나 미래의 상황을 상상할 때, 또는 타인의 마음을 추측할 때 활동하는 뇌 영역이 서로 많이 겹친다. 이런 관계는 임상 관찰에서도 뒷받침된다. 즉 사고나 질환으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손상된 사람의 경우 기억력은 물론이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그렇다면 사람 말고 다른 동물에서도 디폴트 네트워크가 잘 구축돼 있을까. 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보다는 훨씬 덜 발달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디폴트 네트워크는 뇌에서 가장 늦게 진화한 대뇌피질에 놓여있고 특히 인류의 뇌 진화에서 급격히 팽창한 전전두엽과 측두엽이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뇌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대표적인 영역 역시 바로 디폴트 네트워크에 포함돼 있다. 즉 언어를 담당하는 브로카 영역은 좌뇌 전전두엽에 속하고 베르니카 영역은 좌뇌 측두엽과 두정엽이 만나는 자리에 놓여있다. 그런데 언어는 상당히 추상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다. 우리가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면 나와 상대자의 기억과 상상력,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자기투영 능력이 없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심리학과 마이클 코발리스 명예교수는 “침팬지도 수화를 배워 사람의 언어 능력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이들이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현재의 일일 뿐”이라며 “아마도 사람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고하기 위해 언어를 발명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신분열증은 디폴트 네트워크의 과열 상태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디폴트 네트워크가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즉 우울증이나 자폐증, 정신분열증 같은 뇌질환의 배후에는 디폴트 네트워크의 이상이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자폐증인 경우 디폴트 네트워크의 연결이 부실하다고 한다. 따라서 현실을 과거와 미래의 맥락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반면 정신분열증은 디폴트 네트워크가 지나치게 활성화된 상태다. 그 결과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역할은 위축되고 내부에서 스스로 왜곡된 정보를 생성해 환시나 환청에 시달린다. 알츠하이머병(노인성 치매) 역시 주로 디폴트 네트워크 영역이 손상돼 인지능력이 급격히 쇠퇴하는 질병으로 밝혀지고 있다. 레이클 교수는 “머지않아 알츠하이머병은 디폴트 네트워크의 질환으로 규정될 것”이라며 “이런 연관성은 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 전략을 짜는 데 더 깊은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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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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