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중독연구실과 진폐연구실을 갖추고 정식으로 개원한 직업병연구소는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직업병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처음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기대된다.
우리나라에도 직업병 전문연구소가 문을 열었 열었다. 인천시 북구 구산동에 위치한 중앙병원내에 근로복지공사 산하 직업병 연구소(소장·정호근)가 진폐연구실과 산업중독연구실을 갖추고 정식 개원했다. 현재 전문연구원 12명을 확보했으며 직업병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장비 설치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 여름 온도계공장에서 일하다 꽃다운 청춘을 피어보지도 못한채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15세의 문송면군, 카드뮴중독 논란을 일으켰던 고상국씨(47·아연도금공장 근로자),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구로공단의 대성전기에서 집단 톨루엔 중독을 일으킨 1백여명의 여공들, 이들은 모두 우리 사회가 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거듭하면서 외면해왔던 직업병의 피해자들이다.
우리의 직업병에 대한 인식은 고작 탄광부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진폐증정도였던 것이 사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산업발달 수준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도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예를 든 몇가지 중금속중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최근 직업병의 추세는 ‘직업과 관련되어 생기는 병’(work related disease) 모두를 포함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하겠다. 일례로 컴퓨터 터미널 앞에서 장시간 일하는 오퍼레이터들에게 발생하는 VDT(Visual Display Terminal)신드롬 등은 사회여건 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중금속중독과 진폐증에 주력
새로 문을 연 직업병연구소의 정호근 소장은 “최근 미국에서는 카펫을 까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생하는 손목 및 무릎 부위의 이상현상(carpal tunnel syndrome)이 새로운 직업병으로 부상하고 있을 정도로 직업병은 그 사회의 제반 여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직업병연구는 초기단계이므로 처음부터 욕심을 내는 것은 무리이고,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중금속중독과 전통적인 직업병이라 할 수 있는 진폐증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수행해 나가겠다”고 연구방향을 밝혔다.
직업병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소음진동 방사능 전자파 유해광선이 원인이 되는 물리적직업병, 중금속(납 수은 크롬 등) 유기용제(벤젠 톨루엔 등) 가스상태의 물질들(황화수소 등)에 의해 발생하는 화학적직업병, 아직 우리나라는 케이스가 없지만 새를 키우는 사람이나 버섯을 재배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곰팡이 중독을 포함한 생물학적직업병, 이들이 복합돼서 발생하는 분진이 원인이 되는 면폐증 진폐증 규폐증 석면폐증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직업병연구는 백지상태나 다름없다. 직업병이 발생치 않아서가 아니라 외면해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직업병의 대명사처럼 인식돼왔던 진폐증 환자만도 제대로 조사된 것이 없을 정도. 다만 진폐재해자협회에서 입원환자를 근거로 2만5천명정도가 진폐증환자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막연한 추측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는 중독성 물질의 사용이 급증하고 있을 뿐더러 현재까지 중요시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직업병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환자수가 급증하는 직업병 중 대표적인 예는 소음성난청이다. 또한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환자가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측되는 직업병 중의 하나는 석면폐증. ‘조용한 시한폭탄’이라고 불리는 석면은 건축자재의 단열재, 자동차브레이크라이닝 등 일상 생활에 별 규제없이 폭넓게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의외로 환자수가 많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예상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직업병연구를 담당했던 것은 일부 의과대학의 예방의학그룹. 그러나 대학의 예방의학교실은 특성상, 개별 케이스를 중심으로 깊이있는 연구는 가능할지라도 체계있는 연구를 통한 종합적인 작업을 하기는 어렵다. 국립노동과학연구소 산하에 직업병을 연구하는 부서가 있었으나 제구실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구원 12명으로 단촐하게(?) 시작한 직업병연구소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척박한 풍토에서 첫발을 내딛었기 때문이다. 현직업병연구소의 전신은 80년 사북사태의 결과로 84년에 문을 연 동해병원의 진폐연구소. 연구인력 및 예산부족으로 거의 활동을 못해오다 작년에 여러가지 직업병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종합연구소로서 변신을 하게된 것이다.
비록 초라한 출발이지만…
연구원이 수백명에 달하는 미국의 NIOSH, 일본의 산업의학총합연구소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데 없지만, 직업병연구소는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목표설정과 함께 연구장비의 구입 등 연구소 자리잡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직업병을 일으키는 환경에 대한 평가 △직업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방법 △직업병을 예방진단 치료하는 방법 등이 직업병연구소의 개괄적인 목표이다. “아무래도 직업병을 치료하는 기관이라기 보다는 연구하는(research) 성격을 갖기 때문에 곧바로 일반인들에게 성과가 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기초 연구를 쌓아나간다는 자세로 일하려 한다”는 것이 연구원들의 공통적인 의견. 종합연구기관으로 대학의 개별적인 연구결과를 연결시켜주는 것도 이 연구소의 중요 역할이다.
정호근소장은“직업병연구소는 의사 환경공학자 약사 화학자 산업사회학자 통계학자 보건학자 등을 골고루 갖추어야 제구실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인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말하면서 “정밀측정을 위한 고가장비의 구입도 만만치 않다”고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직업병연구는 사회의 건강함을 회복하는데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므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소장의 주장이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설비투자를 하느니 그돈을 은행에다 넣고 이자로 벌금이나 내고 보상금을 무는 것이 훨씬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어느정도 깔려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건강문제를 전혀 고려치 않은 극히 이기적인 발상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예방의학자들 사이에 자주 거론되는 “예방비용은 ‘온스’에 불과하지만 치료비용은 ‘파운드’(16온스)에 이른다”는 말을 인용치 않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직업병연구는 낭비를 막아주는 소중한 분야라 할 수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다’는 우리의 속담이 직업병연구를 게을리 했을 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