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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크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대한 위용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후대에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배들이 있다.

동서고금 역사상 각 시대에 등장했던 배의 종류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시대에는 뗏목배(筏船) 가죽배(皮船) 통나무배(獨木舟) 등 원시적인 배가 출현했다. 그후 문명이 점차로 발달함에 따라 고대에는 노를 써서 추진하는 갤리선 및 돛을 이용하는 범선이 보편화됐다. 중세기와 지리상의 탐험시대에 범선은 그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바다의 정복자로 이름을 떨쳤지만 19세기부터 동력선이 탄생하고 철선과 강선(鋼船)이 차레로 나타나면서 오늘날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글에서는 각 시대에 등장했던 배들 중에서 특출하게 거대한 위용으로 후대에 이름을 남긴 거선(巨船) 몇척을 골라내어 그 모습을 살펴본다.

■오벨리스크운반선/왕권의 상징

(그림 1) 오벨리스크 운반선


고대 이집트(BC 1천5백년전)는 석재(石材)가 풍부하여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Obelisk) 신전열주(神殿列柱) 등을 많이 건립하였다. 이들 기념물들은 강력한 왕권을 놀라게 하고 있는데, 그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건립되었는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되어 있다.

그중 오벨리스크는 기다란 돌을 가지고 끝을 뾰죽하게 가공하여 하늘높이 세워놓은 방형첨탑(方形尖塔)이다. 신전 뜰앞 같은 곳에 세워져 있는 이들 첨탑은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큰 것에 이르러서는 무게 3백50t, 길이 1백피트의 거대한 석재이다. 이들은 대개 석재가 많이 산출되는 나일강 상류인 아스완지방에서 채석 가공되어 하류로 운반된 것이다. 이것의 운반을 담당한 것이 오벨리스크운반선이었다.

(그림 1)은 오벨리스크운반선을 복원한 그림인데 장대한 오벨리스크 2개를 적재한 모양이 그려져 있다. 이 배의 크기는 길이 약 61m(2백피트), 너비 24.4m(80피트)에 이르고, 3백50t의 오벨리스크 2개를 적재한 때 배의 무게, 즉 배수량(排水量)은 1천5백t 정도에 이르렀다.
거선을 나일강 물을 따라 끌어 내리는 일은 아마 당시에는 대역사(役事)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0명씩 노를 젓는 끌배(曳船) 27척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배를 끌어 내리는 일에 모두 8백10명 가량이 동원된 셈이다.

이같은 배는 그후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고대는 물론이고, 오대양을 항해했던 범선이 발달한 16·17세기까지도 등장하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고 운반하여 세워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10여개는 후일 이집트에 침공한 시이저와 나폴레옹, 그리고 영국통치자들에 의해 대부분 반출되어 지금은 로마의 베트루성당 광장,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 런던의 템즈강변에 가면 볼 수 있다.

 

■초마선/한민족의 자존심

 

우리나라의 옛날 배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처럼 곡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 역사상에도 세계에 자랑할만 한 배들이 더러 있다. 가령 임진왜란 무렵의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고려시대의 초마선(硝馬船)같은 배도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당대의 대형선이다.
 

초마선은 11세기 초엽부터 사용된 고려의 조운선(漕運船)으로서 세금으로 받아들인 곡식 1천석(石)을 실어나를 수 있는 연안해운선(沿岸海運船)이었다. 당시에 그만한 곡물을 실어나를 수 있는 배가 세계 어느 곳에도 흔하지 않았다. 11세기 초엽은 유럽에서는 아직도 바이킹이 활약하던 중세 암흑기여서 그들의 배는 보잘 것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당(唐)이 이미 멸망한지 오래이고 송(宋)나라가 겨우 기틀을 잡아가던 시기로 조운에 있어서는 황하와 내륙운하를 통하여 배 한척에 겨우 5백석 정도를 실으면 고작이었다.


그런 시기에 고려가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을 개발하여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림2)는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조선후기의 조운선인데 우리나라 한선(韓船)의 전통이 나말여초(羅末麗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미루어 초마선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고 상상된다.

(그림 2) 조운선


■보선/중국의 불가사의

15세기경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조선술이나 항해술에 있어서 서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당시 인도양 주변의 여러나라에 원정을 한 선박의 크기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명(明)나라가 창건되고 나서 30여년이 경과한 영락(永樂)년간 성조황제(1403~1424)의 명을 받은 삼보태감 정화(三寶太監 鄭和)는 신생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전후 7차에 걸쳐 대선단을 이끌고 자바 수마트라 인도 페르시아 동아프리카 등 여러나라에 평화적인 원정을 수행하였다.

이것이 사상 유명한 정화의 원정이며 여기에 참여한 배들은 보선(寶船)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원정대의 규모는 시기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으나 1405년의 제1차 원정시에 보선 62척, 기타수행 해선(海船) 2백55척, 대원 2만7천8백여명의 규모였다. 보선 중에서 가장 큰 배는 길이가 135.3m(444자), 너비 54.9m(180자)이고 돛이 9개씩이나 달린 것이었다.

과연 이처럼 큰 목선(木船)이 명대에 실제로 건조되었는지는 오래동안 의문시되어 왔고, 이를 사서(史書)의 과장이라고만 생각되어왔다. 그런데 정화의 보선을 건조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남경 교외의 용강선창 자리에서 1957년 한 자루의 큰 타간(舵桿)이 발굴됨으로써 그런 의문은 단숨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림3)은 그 타간을 가지고 복원한 키의 모습이다. 타간의 치수는 길이 11.07m, 상부단면 38cm×39cm, 하부단면의 너비73cm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분명 보선의 것이 틀림없다면 이것이 달린 배의 길이는 가히 5백척(尺)내외가 될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이 거대한 타간은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북경의 한복판, 천안문 광장의 바로 동쪽에 인민대회당을 마주보며 위치하고 있다.

(그림 3) 보선의 키 복원도 (사람의 크기와 비교)


■빅토리호/낼슨의 기함

서양의 배와 조선술이 급진적으로 발달하고 동양을 앞지르게 된 것은 지리상의 탐험이후이다. 새로 발견한 신천지로의 항해가 활발해지고, 또한 유럽 열강들간의 해상권 쟁탈에 대한 각축이 심해지면서 군함이나 상선을 막론하고 모두 커지고 강력해졌다.

16세기까지만 해도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유럽의 배들이 17·18세기에 크게발달하여 범선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우리는 그런 전형을 트라팔가해전(1805) 당시 넬슨제독이 탑승한 영국함대의 기함 빅토리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빅토리호의 주요요목이다.

빅토리호의 주요요목


17·18세기 유럽 열강은 해군력의 강화에 주력하면서 대개 빅토리호 만큼 거대한 기함과 이에 부수된 전함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전함은 아무리 작아도 대개 크기 1천t이상, 함포 70문 이상, 승원 6백명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빅토리호 같은 제일군함은 당대 해군의 왕자였다.

빅토리호는 영국해군의 영예를 한몸에 짊어진 군함이었다. 이 배는 1759년 템즈강 하구 채텀해군공창에서 건조된 이후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빅토리호는 1825년 이래로 포츠머스 군함의 도크 안에 영구 보존되어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그레이트이스턴호/덩치 큰 실패작

19세기 초엽에 증기기관으로 추진되는 기선이 처음으로 실용화됐다. 이후 선박의 동력화가 급진적으로 진전되는 한편 여러가지 기술혁신을 거쳐 배는 점차로 커져나갔다. 선박의 대형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기술혁신은, 첫째 물레방아 바퀴와 같은 외륜추진기를 선체의 양측에서 돌리던 방식에서 현재의 선박추진기와 같은 스크루프로펠러(screw propeller)로 대신하게 된 일이다. 둘째는 선체를 목재 대신 철재로 꾸밀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외같은 추세에 맞추어 1858년 영국에서 건조된 문제의 거선이 바로 '그레이트 이스턴'호인데, 그 주요요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배는 몸집이 너무 커서 여객선으로는 실패하고 해저에 전선을 부설하는 배로 쓰여지다가 1891년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당시 각광을 받던 대서양횡단 일류 여객선들이 대개 3천~4천t이었는데, 그레이트 이스턴호는 길이가 2배 톤수가 6배나 되는 거선이었으니 그 운용(運用)이 매우 힘들어 상선으로서 실패한 것이다. 그후 이만큼 큰 여객선은 20세기 초엽에 들어서 비로소 등장했는데 그레이트이스턴호는 50년을 미리 나온 배라는 평을 받았다.

사람들의 큰 배에 대한 욕망은 끊이지 않아 그 후에도 세상을 놀라게 한 거선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근래에 등장한 배로는 제2차세계 대전때 일본이 자랑하던 전함 야마도(大和)와 무사시(武藏)가 있다(모두 배수량 7만여t). 일전에 사고를 낸 미국의 전함 아이오와호(배수량 약 6만t)도 여기에 속한다. 70년대에 석유소비가 급증하면서 유조선의 대형화가 추진되어 VLCC급선(재화중량 30만t)과 ULCC급선(재화중량 40만t 이상) 도 출현하고 있다. 그러나 몸집이 크다는 것은 유리한 점도 있는 반면 항상 예상치 못한 결함이 노출되어 성공보다는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


그레이트 이스턴호의 주요요목
 

198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김재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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