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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많던 KAIST 연구부·학사부로 갈라진다.

연구부는 KIST로 분리, 새출발하고 학사부는 대덕으로 이전해 과기대와 통합,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갖춘 한국과학원(KAIST)로 확대 개편될 예정. 왜 이런 변모를 해야 하나?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본원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새로운 도약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 그동안 연구부와 학사부(대학의 석·박사과정)가 통합되어 운영돼왔던 KAIST는 연구부를 분리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으로 독립시키고, 학사부는 대덕에 있는 과학기술대학(KIT)과 통합하여 학사 석사 박사과정의 3단계 연구중심대학(KAIS)으로 골격을 갖추게 된다.

1966년 2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운명을 양어깨에 걸머지고 탄생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Korea Institute of Science & Technology)와 고급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 1971년 설립돼 75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한국과학원(KAIS, Korea Advanced Institute)은 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1981년 1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 Technlolgy)으로 통합 운영돼 왔다. '산학연(産學硏)일체'라는 현장성 위주의 아이디얼한 결합을 시도했던 것.

그러나 몇몇 위정자의 머리속에서 도출된 관념적인 아이디어는 현실속에서 생각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의 근본적인 차이,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이질성, 조직의 비대화에 따른 비효율적 운영 등 장점보다는 단점이 두르러지면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지난 1986년 과학영재의 조기교육을 목표로 출범함 한구과학기술대학(KIT, Korea Institute of Technlolgy)이 올 8월 첫 조기졸업생을 배출하게 됨으로써 현실적으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일관성 있는 교육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과학기술의 대명사, KIST

50~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척박한 상태였다. 50년대에는 면방직공업 중심의 일부 경공업이 주류였고 60년대에 들어서도 화학비료나 석유화학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산업화정책이 추진되지 못했다.

공업의 고도화를 주목적으로 한 제2차 경제개발계획(67년~71년)을 수립한 후 절실하게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 기술개발 매체. 당시만해도 기업이 R&D(연구개발)투자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할 기술개발 매체가 요구된 것이다.

65년 미국 존슨대통령과 박정희대통령은 2차 정상회담에서 미국 원조로 우리나라에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을 합의했고 이 결과로 66년 2월 서울 YMCA 건물에 간판을 내걸고 KIST가 문을 열었다.

서울대 자연과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있는 김근배씨는 최근 역사학대회에 낸 논문에서 "KIST는 한국의 베트남 참전 댓가였으며 미국 '바텔'기념연구소가 연구소의 설립방식, 운영체제, 규모 등에 깊숙히 개입한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안고있는 기초과학의 취약 등 과학기술의 불균등 발전을 심화시킨 원인이 됐다"고 밟혔다. 즉 KIST는 기초과학을 도외시하고 응용과학에 치우쳤을뿐 아니라 농업 광업 등 토착산업을 무시해 과학기술의 부분별 불균등발전을 심화시켰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KIST는, 개발도상국에서는 드물게 계약제로 연구원을 고용하는 특색있는 인사정책을 시행하는 등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었다. KIST는 66년부터 지금까지 20여년 동안(KIST내의 연구부 포함) 기술과 경험을 갖춘 3천여명의 고급 연구인력을 산업계 및 연구기관, 대학에 배출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연구원수의 10%에 이르는 숫자. 또한 약 5천여건에 달하는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중에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라미드펄프, 고분자알로이섬유 등이 포함된 5건의 외국물질특허도 획득했다. 현재 박사학위 소지자만도 2백84명(부설연구소인 해양연구소 시스템공학센터 유전공학센터 1백8명 포함)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대의 과학기술센터로 자리잡고 있다.

KIST를 제외한 우리나라 현대과학기술사는 있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없다. KIST출신자들은 누구를 만나도 자랑스럽게 'KIST출신'임을 내세웠고 일반인들에게 KIST연구원은 '최고의 명예'로 비쳤던 것이 사실.

KIST의 연대별 사업목표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산업발전 양상과 엇비슷하다. 초기 출범 당시에는 '에너지수급에 관한 타당성 조사'라든가 '포항제철 설립 타당성 조사' 등 조사용역사업을 주로 하였고 70년대 이르러서는 해외 유치과학자를 중심으로 외국기술을 도입하여 개량 소화하고 이를 산업계에 전파하는 기술전도를 충실히 수행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독자기술개발에 연구력을 집중, 각종 국산기술이 쏟아져나와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더욱이 80년대에는 강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더욱이 80년대에는 과학원과 통합, 자체 연구인력을 양성해 산업계 및 대학, 기타 연구기관에 배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연구의 자율성 퇴조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전과'에 비하여 내부사정은 반드시 순탄하지만 않았다. KIST 초기에 가졌던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퇴색되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연구조직이 점차 커져가면서 조직은 관료화되고, 정부가 방위산업 중심으로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을 펴면서 KIST의 예산은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연구자율과 민주운영은 점차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특히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산학연 일체', 즉 현장감을 돋보이게 한다는 명분아래 KIST와 KAIS를 통합하면서 부터 조직은 더욱 관료화되고 연구예산의 자율성도 더욱 폭이 좁아졌다. 초기만 해도 프로젝트별로 팀을 구성해 연구를 수행했으나 실장 부장 소장이라는 보직제도가 생기면서 관료화의 추세는 심해졌고, 예산면에서도 경제기획원의 1차통제 과학기술처의 2차통제 부서장의 3차통제를 받는 등 자율적 연구는 점전 뒷전으로 밀려나갔다.

더군다나 5공화국과 관련, 책임자가 낙하산식 인사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 연구원들의 목소리는 연구원 운영에 있어서 '반향없는 메아리'꼴이 되었다. 극단적인 경우 국내 실정을 전혀 모르고 위에서 시키는대로마나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무국적 원장을 맞은 적도 있었다.

정부가 한자리수 물가를 유지한다고 예산각감의 칼을 휘두르면서 부나 실의 책임연구원들은 더욱 고통수러웠다.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연구원들을 먹여 살려야하기 때문에 자신의 연구는 제쳐둔 채, 기업을 돌아다니면서 연구과제를 구걸하다시피했다. 산업기술종합 연구소로서의 본래의 목적에서 일탈해 당장 기업에 이익이 되는 '개발연구'만을 쫓아다니는 불썽사나운 꼴이 자주 노출되었다. 종합연구소라면 국가의 대형프로젝트나 당장에 이익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고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에 디딤돌이 되는 중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할텐데, 당장의 개발이익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처지를 한탄하는 분위기가 KAIST내에 팽배해 있었다.

금속연구부장 최주박사는 "연구원 1명을 유지하는데 1년에 3천만원, 선임연구원은 이의 배인 6천만원, 책임연구원은 9천만원이 든다. 이들에데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주려면 정부가 배정한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디라도 뛰어다니지 않을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책임연구원이 되면 본래의 목적인 연구는 그만두고 로비하러 다닌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독자적인 원천기술을 확보할 시점에서 개량기술만 신경쓰면 국가의 기술종속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학사부와 통합된 연구부는 또다른 현실적인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와 연구원의 위상정립이 제대로 안된채로 무리하게 뿌리가 다른 두기관을 통합함데 따라, 전통적으로 교수신분 우위인 우리 사회의 통념이 대부분의 경우 주요 보직을 교수들이 차지하게 만들었고 이에따른 연구원들의 갈등을 유발시켰던 것.

기본적으로 대학의 기초연구와 연구소의 응용연구는 성격이 다르다. 연구원의 연구는 여러가지가 연관돼 있는 대형과제, 또는 중장기프로젝트일 수밖에 없고 대학에서의 연구는 미세한 분야의 깊이 있는 기초연구일수밖에 없다.

사실 연구원 박사가 '현장감 있는 강의를 한다'고 말하기는 쉬우나 강의 1시간 하기 위해 10시간씩 준비해야 하는 원칙을 생각해볼 때 '언제 연구하고 어제 강의 준비하겠느냐'는 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교수들이 연구부의 연구시설을 활용해 연구부와 공동연구를 한다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연구과제의 성격이 다를뿐더러 교수 응용연구에서 능력을 발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 실제로 최근에 와서 학사부와 연구부의 공동연구는 거의 없었다.

연구사업단 체재의 새출발
 

(그림 1) KIST의 새로운 연구조직


KIST는 이제 새로운 출발을 눈앞에 두고있다. 지난 6월12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위원회는 재단법인 등록을 마쳤다. 초대원장으로 선임된 박원희박사는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완전히 변신된 KIST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90년대의 기본 연구 방향은 원천기술의 확보. KIST가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추진해왔던 응용연구는 이미 기업체 내의 연구소에서 활발히 진해되고 있어, 종합연구소에서는 이를 뒷받침하고 미래의 과학산업을 창출하기 위한 원천기술 개발을 기본목표로 설정 해야한다.

중점 연구사업으로는 신소재개발과 메카트로닉스(mechatronic, 기계공학과 전자공학의 결합) 등의 첨단복합기술, 신물질합성을 포함한 원천요소기술을 잡았다. 이들은 모두 단일분야가 아닌 복합적인 '거대과학'이기때문에 기업체 연구소 내재 특정분야 정부출연연구소로는 감당해내기 어려운 과제. 이를 위해 KIST는 기존 부·실 체재를 과감히 탈피, 연구과제에 따라 연구사업단을 병행 운영할 예정이다(그림1.)

현재 KIST는 3개 부설연구소를 제외하고는 7개부로 운영되고 있다. 프로젝트별로 항상 새롭게 연구단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고, 기존 부·실 체제에서 기본연구과제와 일반연구과제는 그대로 수행하며, 대형 국책 프로그램만은 연구사업단 체재로 소화시켜 나갈계획이다.

이를 위해서 연구인력의 고급화가 시급한데, 현재 절반 정도인 박사급 인력을 94년까지 80% 이상으로 끌어올릴 방침이다(표1). 이와는 별도로 포스트·닥(박사후 과정)과 외래연구원 3백명을 확보할 예정이다.

이밖에 해양연구소 유전공학센터 시스템공학센터 과학기술정책연구평가센터는 당분간 부설연구소로 운영하되 여건이 성숙되면 분리 독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노조위원장 이인우씨는 "학사부와 분리, 본연의 KIST로 되돌아와 '조직이 중심이 아니라 일이 중심'이 되는 연구사업단 체제를 갖추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이러한 청사진이 장미빛 환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의 과학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이 교정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연구예산의 편성과 집행의 자율성, 단시일내에 결과물이 보이지 않더라고 장기프로젝트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연구전문노조협의회와 민주당이 미련한 '정부출연구기관 연구자율을 위한 법률안'이 국회에 계류중이다.

아무튼 KIST는 '새로운 도약을 하느냐' 아니면 '관료화되고 매너리즘에 빠진 조직뿐인 연구소로 전락하느냐'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새출발하는 입장에서 KIST는 과거처럼 설립자를 대통령이 아닌 과학자 경제계인사 과기처장관 등으로 했고, 이사장 유고시 과기처 실무자가 이를 대행한다는 규정을 삭제 하는 등 새옷을 갈아입는데 인색치 안하고 있다.
 

(표 1) 연구원 확보계획


국내 박사 배출의 요람
 

기존의 KAIST 연구부에서 학사부(석·박사 과정)를 분리하여 과학기술대학과 통합하는 한국과학원(KAIS)은 KIST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질적 변화를 맞고 있다. 현재, 내년 3월부터 대덕에서 새로이 신입생을 뽑는 계획은 확정되었으나, 서울 홍릉캠퍼스 활용문제, 과기대와의 통합형태 등은 계속 난제로 남아 있다.

'과학기술 기초연구'와 '산업계가 요구하는 고급인력양성'을 양축으로 하여 71년 개교한 한국과학원은 75년 첫졸업생(석사과정)을 배출한 이후, 78년부터 현재까지 5백50여명에 달하는 박사를 양성했다(표2). 이는 우리나라 전국 대학 박사배출수의 약15%를 점하는 숫자.

더욱이 과학원 학생의 경우 4주만 훈련을 받고 병역의무를 면제해주는 특례보충역의 헤택을 받아 과학기술계의 세계적인 추세인 '20대박사'를 다수 배출하고 있다. 20대박사 비율은 전체적으로 70%를 상회하는 수준. '박사배출이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이냐'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로 프로젝트를 구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고급인력이 자체 양산되어 산업계 교육계 등에서 자리잡아 나간다는 것을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60년대에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기능인력'이 필요했고 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기술인력'의 양성이 절실한 요구였다. 실제로 양적으로 팽창한 이공계 대학에서 배출된 학사들은 현장에서 훌륭한 기술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80년대는, 언제까지 선진국의 과실만을 따먹을 수 없기 때문에 자체 연구개발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인력'의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과학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연구인력은 기본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양성되는 것이 아니라 10년 이상씩 걸린다.

요즘 태국 등 동남아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계에는 KAIST란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그만큼 국제학술지에 게재되는 과학원 교수학술논문과 박사학위논문이 세계적으로 타대학과 달리 학위논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국제학술지에 게재되어야 학위를 주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또한 교수들 인사에도 권위있는 국제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수를 적용한다. 87년도에만 약 3백여편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국제학술지에 게재되는 국내 전체논문수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이밖에 과학원교수들의 연구수행도 상당한(총계 약 3백억원 규모)이 진척되었으며, 산업계의 기술인역 고급화를 목적으로 한 산학협동공개강좌를 통해서 배출된 인원만도 약 6천8백여명에 이르고 있다.

과학원이 KIST와 통합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운영된 9년여 동안, 연구부보다는 타격이 심하지 않았지만 학사부 또한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가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과학원 본래의 '연구중심 대학'의 실현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외국 유명대학의 경우를 살펴보면 자체 대학내에 연구센터 내지 부설연구소가 설립되어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신물질 내지 새로운 이론 등은 대부분 대학내의 연구소 또는 연구센터를 통해 발표된다. 과학원의 경우 연구부가 따로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할 연구센터의 설립에 제약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기본적으로 대학의 기초연구와 연구소의 응용연구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딜레마는 KAIST 체제로는 풀기 어려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표 2) 한국과학원 박사배출 현황


서울 캠퍼스 활용 문제

'연구 중심 대학' 본연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체계적인 과학영재 고등교육의 실현을 위해 과기대와 통합하는 한국과학원(KAIS)은 아직 세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교수들과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의지를 모아 나름대로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교육과 연구의 장을 확대하기 위해 서울과 대덕의 두 캠퍼스를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두캠퍼스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러 견해가 있어 현재 의견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94년까지 과학원은 학사과정 2천명(과기대), 석사과정 2천명, 박사과정 2천명의 정원을 가질 예정인데, 대덕캠퍼스는 학사 및 석·박사 과정의 정규코스를 두어 대학본부로 하고 박사과정 1천명을 떼어 서울에서 교육한다는 방안이 검토되었고, 한편으로는 정규과정은 모두 내려가고 서울캠퍼스는 경인지역의 기업체에 근무하는 학사급인력을 고급화하기 위한 '전문석사제'를 실시한다는 의견도 제시되로 있다.

'전문석사제'의 아이디어는 산학협동의 정신을 살려 실력도 키워주면서 학위도 준다는 이야기. 물론 여기에는 우리보다 뒤처진 동남아개발도상국의 유학생들을 받아들여 산업응용기술을 전수한다는 목적도 포함돼 있다. 여기에 드는 경비는 학생들 학비로 충당해 정부의 예산을 절감해주겠다는 의도도 담겨있다.

소수의견이기는 하지만 일부 과를 서울에 남긴다는 안도 제시되기도 했으나, '누구는 내려가고 누구는 남느냐'는 불만이 일어 전체적인 통합분위기를 저해하기 때문에 현재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서울캠퍼스의 '과학집현전'화와 대덕캠퍼스의 '과학성'(科鶴城)화는 정부(과기처와 경제기획원)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곤경에 처해 있다. 정부의 입장은 서울캠퍼스를 폐쇄하고 모두 대덕으로 내려가라는 것.

과학원 대덕 이전과 관련. 교수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는 교수협의회장인 경영과학과 이진주교수는 "서울캠퍼스 폐쇄 이전이냐, 아니면 서울캠퍼스를 활용하는 확장이전이냐는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교수들은 확장이전을 주장하고 있고 다만 어떤 형태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서울캠퍼스를 남겨놓는 것이 중단없는 교육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입학생들의 자질 유지, 경인권 산합협동체제의 약화방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교육기관으로 활용하던 것을 다른 형태로 전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서울을 떠나기 싫어서 다른 이유를 붙이는 것 아니냐. 어차피 대덕을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중추 핵'화 하겠다는 계획의 일환이니 훌훌털고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 익명의 과학원 교수는 "대덕으로 안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울캠퍼스를 활용하여 폐쇄이전에서 오는 악영향을 최소화 하자는 것" 이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정부에 밉게보이면 결국은 손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학원 부원장 이원국교소는 "교육기관을 뿌리채 뽑아서 옮긴다는 발상은 위험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 "의견을 모으다 보면 최선의 방책의 찾아지므로 정부는 교수와 학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별 통합이 원칙

과학영재교육기관으로서 올 8월 첫 조기졸업생(3년6개월 수학)을 배출하는 과학기술대학에서는 과학원과의 통합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언제 오나'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

과기대교수들은 자체의 연구시설이 전혀 없다. 다만 학생들에게 보여주기(demonstration) 위한 교육용시설만 있을 뿐이다. 대학의 교수라면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면서 스스로의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데 대학원생도 없고 연구시설도 없다는 것은 교수 역할을 포기하라는 얘기나 마찬기자다.

이들의 통합에 대한 기본적입장은 '과 대(對) 과' 통합. 학사과정과 석·박사과정이 분리 운영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과 대 과' 통합이란 대학원지도와 학부지도를 번갈아 가면서 하고, 연구시설을 공유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연구시설면만을 본다면 서울캠퍼스 활용이 결정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만 과기대교수들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좁은 공간이나마 나눠 써야 하며 차후에 시설을 확대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한다.

과학원 교수들도 이런 원칙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일부에서는 과기대교수들을 과학원교수들이 뽑은 것이 아니므로 과별 통합에 무리가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러한 소수의견은 전체적인 통합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못되므로 설득력을 잃고 있다.

현재 과학원측과 과기대측에서는 '통합실무협의 추진반'을 구성, 모임을 갖고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 이견을 조정해가고 있다. 여기서 나온 문제점 중, 앞에서 거론안된 문제의 하나는 인사문제. 기본적으로 교수 승급 연수는 같으나, 적용상 아무래도 과학원 교수에 비해 과기대교수들이 유리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과기대 교무처장인 홍원희교수는 "과학원교수들의 인사규정 중 독특한 것은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수를 참조하는 것인데, 과기대교수들도 대부분은 이 조건을 적용한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87년 경주에서 과기대교수들의 세미나 중 90% 이상이 '진급이 늦어도 좋으니 통합이 급선무'라고 의견을 모은바 있다.

대부분 과학원 진학을 원해

과가대는 통합과 더불어 첫졸업생을 배출하는 싯점에 와있다. 이들의 진로와 관련된 현안 문제도 사소한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과기대생 전체 설문조사를 한 결과 3분의 2 이상이 과학원 진학을 원했고 나머지는 유학 및 취업을 선택했다. 물론 입학시험을 치루어 과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면 되지만, 과기대 학생들은 또한 과학영재의 조기발굴 양성이라는 목적에 호응, 과학고 2학년만을 마친 학생들이 상당수 과기대에 진학해 수학하고 있다. 이들은 독특한 교육과정을 거쳤고 정규 입학시험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입학전형을 거쳤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들이 탈락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이번에 3년6개월만에 조기 졸업하는 학생들은 석사과정을 6개월을 기다려서 치뤄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정부에서는 영어, 전공 구두시험, 대학성적 심사 등 특별자격심사를 거쳐 과학원 석사과정 과목을 먼저 이수하고 11월에 실시되는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특별자격시험은 7월초 타대학 조기졸업자와 동시에 실시한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것처럼 일부 매스컴에서 보도된, 과기대졸업생은 입학시험 응시기회를 2회 부여하되 원장이 인정하는 성적우수자는 한번 더 응시기회를 부여하는 안은, 현재 경제기획원에서 형평의 원칙에 벗어난 다는 이유로 보류되고 있다. 이 안이 거부되면 1백30명 과기대 조기졸업예정자 중 상당수는 조기졸업을 포기하고 한학기를 입학시험 공부 등에 할애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조기 영재교육의 근본 취지에 어긋난다.

홍원희 과디대 기획실장은 "첫졸업생을 배출하는 심정은 아마 옛날 우리의 부모들이 귀중하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고 못미더워 조마조마하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이들이 잘해줘야 새로운 출범을 앞둔 과학원에 잡음이 없을 것이다. 사실 미국 유럽의 경우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 입학시험을 치루는 예가 없다. 학부의 자질을 인정받아 진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앞으로 우리도 이런 방식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입학시험을 치루는데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제 내년부터 과학원은 과기대를 학사과정으로 편입시키고 석사과정 신입생을 대덕에서 뽑는다. 과학영재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국 7개(경기 대전 광주 대구 서울 진주 청주)과학고에 과학원(과기대 포함)이 연계되면서 일관된 체계를 갖춘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과학원은 스스로 인재를 길렀다기 보다는 병역특례 등의 혜택을 통해 여타 대학의 우수한 인재를 모아 조련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과거의 영화'에 집작할 때가 아니라 대학부터 스스로 인재를 양성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일반 이공계 대학의 석사장교제도나 과학원의 병역특례제도를 없애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과학기술계의 발전을 위해 과학원뿐만 아니라 여타 대학에도 병역특례제도를 확대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과학계의 전반적인 의견이다. 최근 국방부는 석사장교제도를 없앨 계획이라는 발표를 한바 있고, '형편의 논리'를 펴 과학원의 병역 특례도 조정해나갈 예정이라는 소리도 새어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분야의 예비 인재들이 자신의 전공과는 관련없이 2~3년의 공백을 가져야 한다면 이는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일 수밖에 없다.

연구자율화를 외치면서 새로 부활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고급인력 양성과 연구중심대학이라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새출발하는 한국과학원(KAIS)이 제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의 과감한 정책적 배려와 재정적 뒤받침이 선결조건임이 분명하다. 사소한 것 같지만, 대덕으로 옮기는 과학원 교수, 교직원, 학생들이 주거 지원 및 자녀들의 교육문제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198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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