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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X-1B개통을 계기로 본 국산 전자교환기의 역사

외제 전자교환기의 대량도입은 심각했던 전화적체현상을 일거에 해소했다. 한편 통신기술자립화를 위한 국산전자교환기 TDX개발은…

어릴때 시골에 가면 전화있는 집도 몇군데 되지 않지만 전화거는 폼을 볼라치면 한손으로 전화기를 잡고 다른손으로 수동식전화기의 손잡이를 힘껏 돌려서 교환을 불러낸다. 교환원이 응답하면 "쌀집 김씨네를 대주시오"라거나 "70번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해 교환원이 선을 연결해주면 비로소 통화가 된다.

현재는 이런 구식의 한가한 전화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주하는 전화수요를 이러한 원시적인 장치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없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1천2백만대의 전화가 가설되어 국민 4명당 1대꼴로 전화기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10년전만 하더라도 2자리수이던 서울의 전화 국번이 현재 3자리수로도 충분치 못해 4자리수 국번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전화 댓수의 급증은 필연적으로 전화국의 업무를 곱절이상으로 늘였다. 82년 체신부로부터 떨어져 나와 분가한 한국전기통신공사(KTA)가 불과 몇년사이에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직원수도 많은 공사로 성장한 이유도 폭발적인 전화수요에 있다. 전화국의 가장 핵심장비이며 전화이용자간의 교통정리를 해주는 기계가 바로 교환기.

수동식과 기계식

1878년 미국의 '벨'(Bell)에 의해 전화기가 발명된 이후 전화의 발전과정은 상당부분 교환기술의 발전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교환기'는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통화하기를 원하는 전화가입자 상호간을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복잡한 스위치장치'를 뜻한다.

최초의 교환기는 각 전화회선을 교환대장치에 연결시키고 가입자로부터 통화신청이 들어오면, 교환원이 손으로 직접 통화하기를 원하는 상대가입자의 전화회선에 접속시켜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을 수동식 교환기라 한다. 그러나 점차 전화댓수가 늘어나 교환대에 연결할 수 있는 전화회선수가 한계점에 도달하고 전화통화를 좀더 신속하게 하려는 사용자의 욕구와 통화내용의 비밀을 유지하려는 생각등으로 자동교환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자동교환기는 가입자가 직접 통화하고 싶은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돌리면 기계적 또는 전자적 장치에 의해 상대 가입자의 회선에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 자동교환기의 출현으로 가입자는 시내통화뿐아니라 시외전화 국제전화까지 직접 다이얼을 돌려 통화할 수 있게 됐다.

수동식 교환기는 자석식과 공전식으로 나누어진다. 자석식 교환기는 가입자가 전화기에 부착되어 있는 발전기를 회전시키면 교환대의 표시기가 작동하게 되고 이에 교환원이 응답하여 상대방 가입자에게 연결해 주는 방식으로 어릴적 시골에서 본 전화기가 바로 이 방식에 의해 작동됐던 것이다.

자석식 교환기는 설치및 유지보수가 간편하고 전기가 없는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전화기에 건전지가 부착되어야하고 통화전후에 교환원을 호출해야하는 등 불편이 많았으므로 공전식 교환기가 나타나게 된다. 공전식은 전화국내에 통화용 축전지와 신호장치를 설치하여 여러 가입자가 동시에 이용할 수 있게한것으로 가입자가 전화기를 들면 교환대의 램프가 저절로 켜져 교환원이 응답하게 한 방식이다.

1889년 미국의 스트로우저는 상대방 가입자 번호를 기계적으로 자동선택하는 교환기를 발명해 자동교환기시대를 열었다. 이를 '스트로우저방식'이라 하는 데 기계식교환기의 최초형태로 몇년후 다이얼의 발명과 더불어 일반에 널리 공급되기 시작했다.

스트로우저방식은 가입자번호를 10진법에 의해 분류하여 군(群)을 분할해놓고 발신가입자의 다이얼 신호에 따라 각 스위치를 접속하는 직접제어시스팀으로 제어회로의 기능은 간단하지만 시스팀 전체로는 사용능률이 낮고 동작기간이 길며 고장률이 높은 단점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의 '지멘스'사는 1955년 접점스위치에 귀금속을 사용한 EMD 교환기를 개발하였다. EMD 방식은 단일방향 회전운동을 하는 회전스위치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접속속도가 스트로우저식보다 빠른 것이 특징이다.

한편 스트로우저식의 직접제어방식이 갖는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통화로(通話路)와 제어부를 분리한 '크로스바'교환기가 1920년 스웨덴 '에릭슨'사에 의해 실용화 됐다. 크로바스식은 발신가입자가 수화기를 들면, 가입자회로가 작동하여 발신음을 송출하여 다이얼신호를 기록 축적하고 착신가입자의 통화중 여부를 시험한 후 빈회선을 찾아 접속시키고, 제어회로는 이전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방식이다.

전자교환기의 출현

크로스바식은 동작의 정확성 안전성으로 수명이 긴 장점이 있지만 기계적인 접점 전자석 계전기등을 사용하고 있어 교환속도의 향상과 소형화에는 불리하였다.

이에따라 교환기의 핵심제어부에 컴퓨터를 이용한 축적프로그램제어방식 (SPC : Stored Program Control)의 전자교환기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미국 '벨'연구소는 1958년 축적프로그램제어에 의한 전자교환방식을 발표했고 이어 60년에는 현장실험에 성공했다. 5년후인 65년에는 '뉴저지'주에서 'No1ESS'가 첫개통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전자교환기가 탄생됐다.

축적프로그램 제어방식은 컴퓨터 기억장치에 축적해놓은 프로그램의 제어에 따라 교환동작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다. 이에따라 가입자 변경등의 망(網)관리 기능이 단순한 데이타입력만으로 가능하며 프로그램변경을 통해 교환기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으므로 기계식 교환기들보다 훨씬 경제성과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전자식 교환기는 이후 반도체 컴퓨터 소프트웨어등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20년동안 엄청난 기술혁신을 거듭하게 된다. No1ESS는 제어부의 전자화는 실현되었으나 통화로부는 여전히 리드계전기나 스위치등 기계식 접점을 사용하였고 음성신호를 아날로그형태로 교환했으므로 '반(半)전자교환기' 또는 '공간분할방식'이라 불렀다. 반전자교환기는 소프트웨어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신뢰도확보에 어려움이 따르고 시스팀 정상동작까지 장시간이 소요되며 제어부가 사고날 경우 교환기 전체가 마비되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70년대초 반도체 집적회로 및 소자(素子)기술의 발달로 통화로부분의 전자화가 실현됐는데 이를 '전(全)전자교환기' 또는 '디지틀교환기' '시(時)분활교환기'라 부르고 있다.

프랑스 '알카텔'사가 70년 처음으로 전전자교환기 'E10A'를 개발했고 75년 스웨덴 '에릭슨'사가 'AXE-10'을 상품화했다. 그런데 이 교환기들은 제어부에 중형컴퓨터를 이용한 중앙집중 제어방식을 채택해 반전자교환기와 마찬가지로 사고시에 전체기능이 마비되는 문제점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80년대들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급속한 개발로 인해 교환기의 제어기능을 종래의 집중제어방식에서 분산제어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에따라 종래의 전전자교환기를 '제1세대방식', 새로운 방식을 '제2세대 전전자교환기'라 구분하고 있다. 전전자교환기는 음성뿐아니라 문자 도형 그림등 디지틀신호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전송한다. 팩시밀리나 PC 텔렉스 등을 전화망에 연결할 수 있는 것도 전전자교환기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전자교환기의 원리

전자교환기를 통해 전화통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먼저 가입자가 수화기를 들면 전화국에서 항상 공급하는 전원에 의해 교환기와 가입자간에 전류가 흐르게 되는데 이를 제어부가 감지하여 가입자에게 '뚜~'하는 발신임을 들려준다. 발신음이 들리면 가입자가 전화번호를 돌리고 교환기는 이를 수신해 제어부에서 번호분석을 한 후 통화로부에 해당회선을 접속하도록 명령한다. 이때 가입자가 통화신청한 번호가 같은 교환기내에 있는 번호라면 통화로부에서 해당 가입자 회선을 찾아 연결해주지만 다른 교환기에 속한 번호라면 국간(局間)중계선을 통해 그 번호를 보내준다. 다른 교환기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번호분석을 한 후 해당 가입자회선을 찾아 연결해 준다. 회선연결이 완료되면 제어부의 명령에 의해 발신가입자에게는 호출음을, 착신가입자에게는 호출신호(전화벨소리)를 들려주고 착신가입자가 수화기를 들면 통화가 이루어진다. 통화가 끝나 가입자가 전화기를 내려 놓으면 제어부가 이를 감지하여 통화로부의 회선연결을 원상태로 환원시킨다.

전자교환기는 기계식 교환기에 비해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벼우며 ◀교환속도가 빠르고 ◀소비전력과 설치공간이 적게 소요되며 ◀음성은 물론, 비음성정보도 대량으로 교환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전자화에 따른 특수서비스, 이를테면 긴 전화번호를 두자리로 줄여서 다이얼링할 수 있는 단축다이얼기능들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요금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계산되며 교환기 내부에 고장이 발생할 경우 발생위치와 원인등을 쉽게 알아내 대처할 수 있는 점도 특징이다.
 

(그림) 전자교환기의 구성


다리풍, 덕률풍

우리나라에서는 1902년 서울과 인천사이에 시외전화 1회선을 개통한 것이 공중용 전화사업의 효시로서 이때부터 통신원이 본격적으로 전화국업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1882년에 청나라에서 신식문물을 배워온 '상운'(尙澐)이 전화기와 관련장비들을 국내에 갖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전화기의 영어발음(Telephone)을 한자식으로 표기해 '다리풍' '덕률풍(德律風)'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후 궁중에서 전화기를 일부 이용하다가, 청일전쟁이후 한국내 전화사업의 독점을 노린 일본인들의 불법가설이 늘어나자 정부는 서둘러 서울―인천간 공중전화망을 개통하게 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통신주권이 일본에 넘어갈 당시 자석식 교환기에 연결된 회선은 총 80회선이었다.

일제식민지시대에는 주로 일제공전식 교환기가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이용자들이 부쩍 늘었는데 1935년 함경북도 나진에 당시 최신식에 속하던 EMD교환기를 설치해 국내 처음으로 자동교환기가 도입됐다. 일제가 조선인 거주지역인 광화문분국에는 해방때까지 공전식 수동교환을 지속하면서도 유독 나진등 몇군데만 신식교환기를 설치한 것은 식민지 차별정책과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15와 6·25를 거치는 동안 우리나라의 전기통신분야는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전후 복구과정에서 유엔원조자금을 빌어 공전식과 스트로우저식이 대도시지역에 일정량 도입 설치되었다.

60년대 들어 EMD방식이 국내표준교환방식으로 채택되면서 교환기의 근대화는 급진전을 보게된다. EMD교환기는 60년 용산전화국에 첫 설치된 이래 공전식과 스트로우저식을 보급회선수에서 앞지르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동양정밀과 금성통신이 외국과 기술제휴를 맺고 스트로우저식과 EMD교환기를 각각 조립생산하는 단계에 있었다.

70년대에 와서 우리 경제의 규모가 확대되고 전화수요가 급증하자 전화의 적체현상은 큰 사회문제로 까지 발전되었다. 전화신청을 하면 몇달 몇년은 기다리기 일쑤이고 '백색전화' '청색전화'까지 등장해 전화가 프리미엄이 붙은 재산권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전화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며 묘책을 강구한 결과 교환기를 전자교환방식으로 전면 전환하고 국산 전자교환기 기술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에따라 77년 벨기에 ITT/BTM사의 'M1OCN'이 제1기종으로, 79년에 미국 AT&T사의 'No1AESS'가 제2기종으로 각각 선정되어 국내에 전자교환기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제1기종은 한국통신 (現 삼성전자에 흡수됨)이, 제2기종은 금성반도체가 각각 외국기업들과 기술제휴를 맺고 조립생산해 각 전화국에 납품하게 되었다. 그후 전전자교환기에 속하는 에릭슨사의 AXE-10도 동양정밀이 농어촌지역용 교환기로 생산 공급해오고 있다.

79년부터 전자교환기가 대량 설치되면서 전화적체현상은 눈녹듯이 사라지게 되었다. 오히려 전기통신공사에서 이용자들에게 전화서비스에 대해 홍보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전화적체가 일거에 해소되고 통신공사가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환기 원천기술의 해외의존도는 점차 심화되어 갔다. 조립생산을 통한 하드웨어 기술이나 시스팀의 운용기술은 일부 축적되었지만 핵심기술인 소프트웨어부문의 기술자립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게된 것이다.

국산1호 교환기―메모콜

국산 전자교환기의 개발은 특수용도의 자가통신용 교환기에서부터 시작됐다. 72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現 과학기술원) 연구팀이 6개월동안 6천만원의 연구비로 소용량교환기 '메모콜(Memocall)'을 개발해낸 것이 '국산1호'로 알려져있다. 이 교환기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소규모 사설교환기였으나 척박한 여건에서 우리기술로 개발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76년 경제장관간담회에서 교환기의 전자방식으로의 전환과 함께 국산 전자교환기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되었고, 77년 이를위해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가 KIST에서 분리 독립됐으나 기초연구단계에 머물러 본격적인 개발작업은 80년 이후로 이뤄지게 된다.

81년 체신부가 전전자교환기 개발을 중점과제로 선정하고 제5차 5개년계획 기간중 2백40억원을 투입키로 결정하면서 국산 전자교환기 'TDX'개발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된다. 연구개발체제도 정비해 전기통신공사에 TDX사업단 (현 사업개발단)을 설치해 전체적인 개발을 추진 관리하게 하고, 전기통신연구소(現 전자통신연구소)에 TDX개발단을 구성해 실질적인 개발작업을 담당하게 했다.

연구팀은 1차로 5백회선 용량의 선행시제품 TDX-1X를 개발해 82년 7월 경기도 용인군 송전우체국에서 현장실험을 한 결과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이에 용기를 얻어 10월부터 1만회선 용량의 TDX-1의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84년4월, 2천4백회선 용량의 모국(母局)용 교환기를 서대전전화국에, 4백80회선 용량의 분국(分局)용 교환기를 유성분국에 설치해 3차례의 인증시험평가를 해본 결과 실용화 가능성을 확인하고 미비사항을 체크했다. 8월에는 TDX-1의 조기상품화를 위해 관련기업들을 개발과정에서부터 참여시키기로 의견을 모으고,금성반도체 대우통신 삼성반도체통신(現 삼성전자) 동양전자통신등 4개 업체와 기술전수계약을 맺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둬 드디어 86년 3월 경기가평과 전곡 경북고령 전북무주 4개 지역에서 각6천회선씩 2만4천회선의 TDX-1이 일제히 개통되었다. 전화기가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온지 1백년이 지난후에야 남부럽지않는 우리기술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이후 TDX-1의 성능을 개선한 양산모델 TDX-1A를 계속 확대보급한 결과 지난해말까지 총 76만회선의 국산 전자교환기가 각 전화국에 설치됐다.
 

(표) TDX 계열의 성능 비교


실용화되는 TDX

TDX-1은 시스팀의 신뢰성과 유지보수성, 경제성 등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됐으나, 용량이 1만회선 미만으로 농어촌지역을 제외한 중소도시나 대도시용으로는 부적합하다. 이에따라 TDX-1의 기본구조는 유지하면서 용량을 2만회선 규모로 확장시킨 TDX-1B의 개발이 곧바로 추진됐다. 이와함께 90년에 실용화를 목표로, 대도시용으로 적합한 10만회선 규모의 TDX-10의 개발도 함께 추진에 들어갔다.

TDX-1B의 개발체계는 종전과 달리 통신공사가 사업을 주관하고 민간업체들이 개발내역을 상호분담해 공동개발하는 한편 전자통신연구소는 시험평가와 형상관리를 맡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기업들에게 선의의 경쟁을 유발시키고 주체적인 참여를 확대시키는 방식으로써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4월25일 TDX-1B는 경기안중 경북경산과 칠곡 강원주문진등 4개 전화국에서 동시에 개통되어 금년 중에 40만회선 규모로 확대될 계획이다. TDX개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이제 겨우 본 궤도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다. 전전자교환기의 원천기술을 국내 기술진이 확보함에 따라 세계 10위권의 교환기생산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일부 국가에는 수출도 이뤄지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분야의 기술혁신이 하루가 다르고 선진국의 통신시장 개방압력이 거세어지고 있는 만큼, 자체기술을 발판으로 이들과 떳떳하게 어깨를 겨눌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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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성조경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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