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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성신여대 박물관 소장)


맑게 개인 밤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름다운 별들의 신비는 그것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그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늘의 과학은 여기서 시작된다. 끝없이 넓은 하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 해와 달,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

천문학이 과학으로 제일 먼저 성립하게 된 것은 신비로운 별들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여러가지 사실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기억하고 입으로 전해주고, 나중에는 기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차츰 축적되었고 사람들은 그 축적속에서 규칙성을 발견했고 변화를 알게 되었다.

지구상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고 그 누구도 밤에 별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그 현상을 학문으로 이어준 민족은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민족 중에 한국인이 끼어 있었다. 지구의 동쪽 끝, 남쪽의 반도로 이어진 결코 넓지만은 않은 땅에서 한국인은 나름대로 하늘의 과학, 즉 천문학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옆에 있던 문명된 민족인 중국인의 영향인지도 모르지만, 꼭 그게 전부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인은 B.C. 54년 4월에 있었던 일식 기록에서 시작하여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에 66회의 일식관측기록을 남겼다. 이어 고려시대 4백75년에 1백32회, 조선시대 5백년에 1백90회의 관측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혜성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57회, '고려사'에 87회, 조선시대의 각종 사료에 1백3회에 달한다. 그 중에서 1664년 10월에 나타난 대혜성의 관측기록은 유명하다. 다음해 1월 초순에 소멸하기까지 80일 가까운 동안 하루도 빠짐 없는 관측기록이 남아 있어 세계 천문학사에 유례가 없는 진귀한 보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와 그 이전의 기록도 중국 이외의 세계에서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한국인은 일찍부터 태양 흑점도 관측했다. '고려사'에는 1024년부터 1383년까지만도 34회의 관측 기록이 있다. 특히 태양 흑점이 8~20년을 주기로 관측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주기의 평균치인 7.3~17.1년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몇가지 사례를 통해서 한국인은 옛부터 천체의 관측과 기록에서 다른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초 세종때에 이미 한국인은 일식 월식과 행성운동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다. 또 1년의 길이를 365.2425일, 1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거의 정확하게 측정, 달력의 계산에 활용했다.

천문학은 옛부터 '제왕(帝王)의 학(学)'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천체의 움직임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에 민감했다. 또 꾸준하고 주의 깊은 관측과 정확한 계산을 통해서 그 학문적 전통을 세웠다.

●―첨성대는 천문대인가?

경주 첨성대는 한국 전통 천문학의 상징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유물이라고도 알려진 이 축조물은 정말 우리에겐 자랑스런 기념비적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첨성대에 대해선 말도 많다. 천문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나오면서 아직도 그 입씨름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먼저 첨성대 앞에 수식어처럼 등장하는 '동양 최고(最古)'또는 '세계 최고'란 표현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첨성대 보다 먼저 세워진 천문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첨성대는 현존하는 동양 최고, 또는 세계 최고(기네스 북)가 되는 것이다.

1962년에 홍사균씨 팀이, 그리고 1981년 유복모교수 팀이 실측한 결과를 보자.
 

첨성대의 제원
 

맨 위에 네모진 모양으로 2단의 돌이 쌓여 있는데, 그것은 마치 정자의 난간과도 같다. 그 안에는 약 2.5㎡의 바닥을 갖는 공간이 형성돼 있어, 몇 사람이 거기서 관측활동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이런 사실이 바탕이 되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축조 사실만을 기록하고 아무런 설명이 없다. 설명이 붙은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데, 천문을 관측했다고 분명히 쓴 것은 '동국여지승람'이 처음이다. 첨성대에 대한 이설(異說)과 논쟁은 여기서 시작된다. 사실 첨성대란 별을 보는, 또는 점치는 곳이라는 뜻이므로 조선시대 초기에 쓴 책에 천문관측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만으로는 천문대로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래서 근래에 와서 천문대라는 학설 이외에 몇가지 학설이 나와서 한때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론(異論)들에는 규표설과 지자기설, 주비산경설, 수미산설과 제단설 등이 있다.

축조연대도 정확하지 않다. '삼국유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647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세종실록 지리지'는 633년으로 되어 있다. 어쨌든 선덕여왕대(632~647년)에 세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이론이 없다.
 

첨성대^현존하는 세계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천문대가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국보 31호).


●―초까지 측정해 내기도

첨성대와 같은 관측대는 고구려에도 백제에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도 675년에 백제사람들이 건너가서 점성대를 세웠다. 필자는 첨성대 기능을 현시점에서 일단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첨성대는 천문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오늘의 천문대의 개념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즉 고대 천문학과 천문사상을 바탕으로 이해되는 천문대 또는 천체관측대이다.

또 상설(常設)이라 하기에는 아직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 남아 있다. 예를들어 남쪽으로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서 오르내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려면 창문 아래까지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한다. 그 다음에는 안으로 들어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돌 계단(대강 다듬어진)을 통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실험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 의하면 밤에도 큰 어려움 없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편한 것만은 사실이다. 아마도 그런 식으로 오르내리면 옷과 손은 상당히 더러워질 것이 확실하다. 매일 관측하려면 고려나 조선시대의 관측대처럼 계단으로 편하게 올라갈 수 있는, 높이 3~4m 정도의 편안한 구조가 더 좋을 것이다.

요컨대 첨성대는 상설 관측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일식 월식 또는 혜성의 출현과 같은 하늘의 이변이 일어났을 때에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그 우아한 외형은 신라 천문학의 관측중심으로서 상징적 역할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규표로서의 기능도 빼놓을 수 없다.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것은 여러가지 목적과 기능을 가진 천문대이며, 신라천문학의 상징이며 관측중심이라고 보아서 큰 잘못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래서 필자는 첨성대논쟁에서 온건절충파로 분류되는 것 같다.

고려시대에도 천문대가 있었는데 지금도 개성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그것은 넓이 약 3㎡, 높이 3m 가량의 돌로 쌓은 관측대이다.

조선시대의 천문대는 궁궐과 관상감에 설치되어 있었다. 세종 때는 경복궁 경회루의 서북쪽에 높이 약 6.6m,길이 10m,넓이 6.8㎡ 가량되는 간의대라는 거대한 관측대가 있었다. 여기에는 대간의와 혼천의 혼상 규표 등과 같은 천문기기가 부설되어 있는데,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천문대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간의대(簡儀臺)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2대의 관천대(觀天臺)뿐이다.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대건설 빌딩 앞에, 그리고 1688년에 축조된 것이 창경궁에 남아 있다. 그것들은 높이가 3m, 넓이가 2.5㎡ 가량되는 화강석 관측대이다. 여기에는 작은 간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들 관천대의 넓이와 돌난간을 두른 구조가 고려 첨성대 그리고 경주의 신라 첨성대와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 고대 천문대에는 어떤 전통적인 흐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관측대나 관상감에서 쓰던 관측기기 중에는 분 초까지도 측정할 수 있는 정밀한 기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에 의하여 그리고 조선왕조가 망했을때의 혼란기와 6.25의 전화에 휩쓸려 거의 유실되고 말았다.

●―4세기경에 이미 천문도를 제작해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그 권위의 표상(表象)으로 천문도를 제작하여 비치했다.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가 세워졌으니, 그 하늘의 모습을 알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일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대 왕조는 천체 관측결과를 규격화하여 별자리 그림을 작성하였다.

14세기 말의 학자 권근(權近)의 저서 '양촌집'(陽村集)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조선초에는, 고구려가 망할 때 천문도 석각본이 전란에 의하여 대동강 물에 빠져 버렸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천문도 석각본의 인본(印本)은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고려에 계승되었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새로운 천문도를 갖기를 염원했었다. 그런데 태조가 즉위한지 얼마 후 그 인본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 태조는 그것을 중각(重刻)하게 하였다. 그러나 서운관(書雲觀)에서는 그 연대가 오래되어 성도(星度)에 오차가 생겼으므로 새로운 관측에 따라 오차를 교정하여 새 천문도를 작성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이 14세기의 한국 천문도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図)이다. 이 성도는 1395년에 제작되었는데 가로 1백22.5㎝, 세로 2백11㎝, 두께 12㎝의 검은 대리석 석판에 새겨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4세기 후반쯤에 고구려 학자들은 1천4백64개의 별을 관측, 상대적 위치에 따라 정확히 그림으로 옮겨 놓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14세기 조선시대의 천문학자들은 세차에 따른 별자리의 움직임을 분(초)까지 정확히 측정, 새로이 천문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여기 나타난 별들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별이다. 2백83개의 별자리는 우리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서양식 이름의 별자리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 상대적 위치는 모두 정확하다. 4세기 후반에서 14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이렇게 정밀하고 정확한 천문도를 가진 민족은 몇 없었다.

이 천문도 석각본이 지금 남아 있다. 국보 2백28호로 최근에 지정되어 그 가치가 공인된 것은 오래도록 기억될 일이다.

●―서양천문학을 소화해낸 저력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후 조선왕조 천문도의 주류를 이루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도 동아시아 한문문화권에서 조선에서만 쓰이던 독특한 것이다. 그 뜻은 하늘의 현상을 차례대로 분야에 따라 그린 그림이라고 해석된다.

17세기 숙종 때 돌에 다시 새겨 만든 또 하나의 천상열차분야지도도 매우 훌륭한 것이다. 그 당당하고 아름다은 모습은 조선시대 학자들의 높은 학문적 식견과 미적 감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천문도의 대부분은 이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7세기 이후, 조선에는 서양 천문도가 전해졌다. 그리하여 1708년(숙종34년)엔 '아담 샬'(湯若望)의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図)를 모사하여 천문도를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1천8백12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서양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 제작된 천문도 중에는 대성표의 조선판이 있다. 대성표는 1723년 케글러(Kögler, 戴進賢)가 중국에서 만들었는데 3천83개의 별이 그려진 대작이다. 케글러의 천문도는 관상감에서 아름답게 채색하여 웅장한 작품으로 여러 벌 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 국외로 흘러 나가고 국내에 남은것은 법주사 것 하나 뿐이다.

한편 서양 천문도를 조선의 전통적 천문도의 형식에 따라서 제작한 천문도가 있다. 18세기경에 목판본으로 만든 혼천전도(渾天全図)라는 것이다. 이 성좌도는 3백 36 별자리, 1천4백49개의 별이 그려져 있는 독특한 천문도이다. 여기에는 태양과 달 및 5행성의 망원경 관측도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토성에는 5개의 위성이 나타나 있고, 목성에는 4개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또 각 행성들의 크기가 비교되어 있고 지구로부터의 거리도 적혀 있다. 또한 일식과 월식의 원리를 정확하게 그렸고,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 브라헤'의 우주체계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천문도는 18세기 조선 천문학자들이 서양천문학을 조선천문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잘 소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이것을 목판본으로 인쇄하여 천문학 교육 등에 사용하였다.
 

혼천전도. 목판본이다(18세기경).
 

198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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