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상황 발생! 원자로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원자로 전체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모니터에 빨간 불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로카! 불이 깜빡이는 위치를 살펴보니 원자로의 냉각계통 배관이 파손돼 냉각재가 유출되는 ‘냉각재상실사고’(LOCA)였다.
잠시 뒤 원자로 시스템에서 가장 큰 배관이 완전히 파괴됐다는 신호가 잡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때 자동안전관리 시스템이 작동해 핵분열반응을 멈추는 제어봉이 노심으로 들어갔다. 핵분열반응은 곧바로 멈췄지만 방사성 붕괴에 의해 열이 계속 발생하므로 원자로의 냉각 기능을 빨리 회복시켜야 했다. 자칫 핵연료봉이 녹아버리면 그 안에 있는 방사성 물질이 격납 건물로 누출되고 사태가 계속 악화될 경우 원전 외부까지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아주는 비상노심냉각장치(ECCS)가 몇 초 뒤 작동했다. 고압의 안전주입탱크에서 차가운 물이 원자로 안으로 자동으로 주입돼 핵연료봉을 냉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안심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때, 갑자기 안전주입펌프가 작동을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 소리쳤다.
“스테이션 블랙 아웃(station black out)입니다!”
뭐? 발전소 전체에 정전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하지만 이정도로 쉽게 원자력발전소가 무너지진 않는다. 비상 디젤발전기가 곧 작동해 안전주입펌프를 회복시켰다. 그러자 서서히 원자로 내부의 온도가 내려가고 압력도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원자로 내부가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는 신호가 모니터에 뜨자 센터장이 외쳤다.
“자~,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모의실험 끝!”
2006년 말 가동에 들어가 지난 10월 30일 일반에게 처음 공개된 한국원자력연구원 열수력안전연구센터 ‘아틀라스’(ATLAS, 가압경수로 열수력 종합효과실험장치)의 원전사고 모의실험을 가상 상황으로 꾸몄다. 말만 들어도 겁이 나는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어떻게 실험한다는 걸까.
수백만년에 한번 일어날 사고까지 대비해
6층 높이의 철골 구조물 사이로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있는 배관들. 언뜻 보기에는 제철소나 화학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설 같다. 하지만 아틀라스는 ‘한국표준형원전’(OPR1000)과 ‘신형경수로’(APR 1400) 같이 국내에서 가동 중이거나 건설될 예정인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고 있다.
원자력발전은 우라늄의 핵분열 시 감속재와 제어봉을 통해 연쇄반응을 적절히 조절해 이때 생기는 열로 증기를 만들어 그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화력발전이 석유나 석탄으로 물을 끓인 수증기로 터빈을 돌려서 발전한다면 원자력발전은 원자핵이 분열할 때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한다.
원자력에너지는 우라늄235 1g이 석탄 3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낼 만큼 효율이 좋지만 방사성물질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 피해는 막대하다.
대부분 원자력발전소는 사고위험을 막기 위해 15~20가지의 자동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고 원자력발전소 밖까지 방사선이 누출되는 일을 막는 다중방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런 안전시스템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동되는 원자력발전소의 경우 대형 배관이 완전히 파괴되는 일은 100만년에 한번 일어날 정도고, 작은 규모의 냉각재상실사고도 1만년에 한번 일어날까말까 합니다. 모의실험에서처럼 이런 상황에 발전소 전체가 정전되는 일이 겹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한국원자력연구원 열수력안전연구센터 백원필 센터장은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위험하지만 그런 사고가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설명에 힘이 더 실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작은 확률로 일어날 사고까지도 막는 안전장치를 모의실험으로 미리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핵연료봉 대신 전기가열장치로 실험해
어떻게 원자력발전소에 사고가 났을 때의 상황을 실험할 수 있을까. 자동차는 새로운 모델이 개발되면 사람을 닮은 인형인 ‘더미’를 이용해 충돌사고가 났을 때의 안전성을 검증하지만 방사성 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일부러 사고를 낼 수는 없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열수력안전연구센터 송철화 책임연구원은 “아틀라스는 핵연료봉 대신 전기로 가열하는 모의 연료봉을 사용한다”며 “실제 원자력발전소에서는 방사능 때문에 일으킬 수 없는 다양한 사고 상황을 아틀라스에서는 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틀라스는 신형경수로를 높이는 2분의 1, 배관의 총 부피는 288분의 1로 축소해 만든 ‘미니 발전소’다. 핵연료봉 대신 전기가열장치를 이용할 뿐 실제 원자로 내부의 185기압, 370℃의 극한 상황을 똑같이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원자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증기발생기 2대와 냉각장치, 그리고 주요 배관 같은 부속의 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냉각재 상실사고나 증기관 또는 급수관 파손 같은 ‘진짜 같은 가상 사고’를 다양하게 발생시킬 수 있다.
아틀라스에 사고를 발생시키면 주요 부속에 붙은 1260개의 계측센서가 온도와 압력 같은 데이터를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각 상황에 맞는 안전장치가 작동함에 따라 원자로의 상태를 추적하며 안전성을 점검한다.
아틀라스는 과학기술부 원자력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 개발을 시작해 8년의 연구 끝에 2005년 말 제작을 완료했다. 그리고 1년 동안의 시운전을 통해 성능을 검증한 뒤 2006년 말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현재는 2013년과 2014년에 준공을 목표로 건설될 신고리 3, 4호기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을 검증하고 있으며, 이미 11차례의 실험을 수행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아틀라스와 비슷한 규모의 실험장치를 갖춘 나라는 일본과 독일, 그리고 러시아뿐이다. 미국은 1970년대에 대형 실험시설을 가동했으나 현재는 특정 원자로에만 적용 가능한 시설들만 남아 있고, 프랑스도 유사한 실험 장치를 갖췄지만 현재는 수명을 다한 상태다.
‘뉴클리어 르네상스’ 시대의 선봉에 서다
“세계는 지금 ‘뉴클리어 르네상스’(Nuclear Renaissance)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송 책임연구원은 최근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이 이어지면서 원자력발전에 대한 수요가 부쩍 늘었다는 설명이다.
중국은 향후 15년간 20기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자국의 전기 생산에서 차지하는 원자력의 비중을 1.5%에서 4%로 끌어 올릴 계획을 확정해 추진하고 있다. 게다가 1979년 TMI-2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이후 원자력발전소를 하나도 짓지 않았던 미국마저 2007년 10월 현재 3기의 원전에 대한 건설허가가 신청돼 있고, 2009년까지 32기의 원전이 추가로 건설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현재 19기의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다. 국내 총 전기생산량의 약 40%를 원자력발전소가 담당하고 있으며 발전량으로 따지면 세계 6위의 원자력에너지 생산국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원자력 기술개발을 매우 늦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기술 자립을 추진해 2001년 신형경수로를 개발하며 독자적 설계기술을 갖추게 됐죠. 이제 100% 우리 기술로 우리 원전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아틀라스를 건설하며 원전기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됐습니다.”
백 센터장은 “아틀라스 개발에 성공하면서 한국형 표준원전과 신형 경수로의 해외 수출 역시 힘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장비까지 완전히 갖춘 원자력발전 기술의 ‘종합세트’가 완성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을 떠받치던 신으로 등장했던 아틀라스. 이제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을 어깨에 짊어지며 뉴클리어 르네상스 시대의 선봉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