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아무리 놀라운 이론을 발견해도 현장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공허한 이론이 된다.
"기술사요! 기술사가 무엇입니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아온 터였지만 최근에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누군가 튀어나와서 "에이! 박사도 몰라요? 기술계 박사 말이요!"라고 대신 말해준다. 하여튼 박사는 잘 알지만 기술사는 과학기술계에서 아직도 생소하게 들리는 것 같다.
엄밀히 얘기하면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기술사회의 구조를 3등분하고 있다. 즉 학계 기술계 기능계로 분류하여 학계에서는 박사, 기술계에서는 기술사, 기능계에서는 기능장이라는 최고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산업현장의 기술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973년도에 국가기술자격법을 제정했는데 이때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국가기술자격중 최고의 자격이 바로 기술사인 것이다.
●- 문제아로 자라나
문득 기술사가 되기까지 경험하고 자라온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할아버지들의 약속으로 부모님들은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4살부터 나는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다.
국민학교 때는 1년 동안 4번 전학 다닌 적도 있었다. 또 2개월 이상 장기결석한 적도 있었지만 신통하게도 상위 등수에 들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 때는 고집스럽고 악질적인 성격을 가진 겁 모르는 싸움꾼으로 변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걸러 싸움을 할 정도로 거칠어졌던 것이다.
당시 내가 방황했던 이유는 지금 생각하면 가정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인문계냐 실업계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의 '대'자도 생각할 수 없는 처지를 인정하고 취직이 잘 된다는 실업계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나는 착실히 기술자의 길을 걸을 것을 다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가정과 진로문제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되뇌이며 자기변신을 추구해 나갔다. 특히 전기 소방 산업안전 공사 등 4분야의 기술영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선은 취직하여 최고의 기술자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나만의 절대적인 신이 있었다. 멀리서 신이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고독과 싸우며 기술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고등학교 3학년들도 몇명 붙을까 말까하는 기술자격시험(전기주임기술자시험)을 2학년 재학중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 자격은 기사2급에 해당되는데 후에 취득하게 되는 기술사 시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교 졸업후 나는 곧바로 산업현장에 뛰어 들었다. 남은 시간에 부족한 공부를 할 생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회사에 입사했지만 뜻대로 시간을 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라산 정상에서 제주대학 학생들과 만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 만남에서 나는 대학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산업기술현장에서의 기술습득은 한계가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날로 서울로 돌아와서 대학입시준비에 들어갔다. 낮에는 직장, 밤에는 학원을 다니는 '주경야독'의 길을 걸은 것이다. 하루 3~4시간의 잠과 고독 속에서도 나는 희망이 새록새록 솟아남을 느꼈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고, 때로는 막연한 회의가 엄습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처음엔 실업계 고교 졸업생 공통의 약점 과목들 때문에 애를 먹었으나 이내 극복할 수 있었다. 아무튼 집중적으로 6개월간 공부하고 나서 한양공대를 지원했는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3년만에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낮에는 일해야 했기에 야간 공대를 택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곧 휴학을 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군에 입대해서는 신앙의 문제 등 기술과 동떨어진 많은 생각을 했다. 기능인 기술인 공학인이 부족하기 쉬운 철학을 쌓아가기 위해서 사고의 영역을 넓혀갔던 것이다.
대학에 복학한 후에도 낮에는 기술현장에서 실무를 익혔고 밤에는 대학 강의실에서 이론을 쌓아갔다. 아울러 관련된 여러 분야를 한데 묶는 작업도 해나갔다. 전기 소방 산업안전 공사 분야 등의 접목을 꾀한 것이다. 물론 모든 기술모임에는 꾸준히 참석하였고 관심있는 분야의 심층연구는 빠지지 않고 점검했다. 그랬더니 '접점학'이라는 나에게 알맞는 새로운 영역이 보이는 듯 했다.
●- 기술축을 담당하기로
하나의 건축물이 탄생하려면 건축 전기 기계 소방의 기술이 만나서 접목돼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적잖은 분쟁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잘 조정되고 적용되어야만 우수한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차원높은 과학기술를 이루려면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의 수평적 횡적 교류가 필수적이라고 느꼈다.
이런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대학 4학년 무렵 이공계 대학 졸업예정자와 대학졸업생이 응시하는 1급 기사자격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흡족한 것이었다. 많은 공대생들이 간신히(?) 취득하는 기사 1급 자격을 3개나 따고 아울러 기타 자격증 2개를 취득한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기술인으로서의 신념과 자긍심, 그리고 철학이 없었다면 나는 기사1급 자격증 한개로 만족했을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일류회사의 입사지원서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료들을 보면서 작은 동요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술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조그마한 중소기업체에 취직,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그리고 산업현장의 기술을 직접 연구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술사의 조기 취득을 목표로, 원대한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기술사가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든가, 서독 미국 일본에서는 기술사가 박사보다 명예나 경제적인 대우에서 앞선다는 사실에 연연한 것은 아니었다.
●- 최연소 기술사가 되다
아무튼 2백만 유자격 기능 기술인의 최종 목표인 기술사, 더 넓게는 1천만 기능 기능 기술인의 최고 수준인 기술사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물론 대부분의 기술사 응시자는 30대 후반이다. 하지만 나는 20대 중반에 기술사를 취득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신념을 새기면서 건축현장을 누볐다. 공사판을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관련자료를 모으기도 했다.
"아무리 준비해도 응시자격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런 선배의 충고를 듣고 기술사 응시자격이 되는지를 조회해 보았다. 조회결과 4부류의 사람에게만 응시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학졸업 후 9년간 실무경험을 한 사람, 전문대 졸업 후 11년간의 실무경험을 한 사람, 기사2급 취득 후 9년간 실무경험을 한 사람, 기사1급 취득 후 7년간 실무경험을 마친 사람만이 기술사 응시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또 유자격자는 1차 필기시험(논문형), 2차 경력심사, 3차 면접시험을 통과해야만 합격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응시하려는(건축전기설비) 분야의 각종 기술서적을 모으니 실로 엄청난 분량이었다. 수십권의 번역판과 교과서 잡지 등 그야말로 서재를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책이 나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관련자료를 다독으로 섭렵하고 10권 정도를 선정해 정독했다. 또 실무시험을 대비해서 건축물의 전기설계를 하루 온종일 생활했던 그때가 지금도 흐뭇하다.
실무와 이론! 이 둘을 함께 갖춘 양수겸장이 되기를 얼마나 꿈꾸어 왔던가! 대형건축물이 완성되기까지의 전과정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조사계획단계부터 기본설계 실시설계단계에 이르는 각 단계를 분석하고 종합한 것이다. 여기에 나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전기 기계 소방의 팀 워크 작업 등을 가미했다. 새로운 학문이랄 수 있는 접점학을 나름대로 익혀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 시간들이었다.
소방설비기사1급 전기기사 1급 산업안전기사 1급 전기공사기사 1급 설비기능사 1급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 공부해 놓은 덕도 톡톡히 보았다.
점차 건축물의 모든 부분이 한눈에 보이게 되었다. 좌충우돌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큰 안목이 길러진 것이다.
기술사 최연소 합격을 위하여 젊음을 불사르고 인생을 유보하고 앞만 보고 줄달음을 쳤다.
그러나 처음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야말로 형편없는 점수로 보기좋게 낙방한 것이다. 실패의 원인을 파헤쳤다. 분석결과 논문형의 서론 본론 결론의 답안지 작성에 미숙함을 알고 이에 대한 대비를 서둘렀다. 신문사설과 논문형의 기술해설을 부담없이 읽어 나갔고 머리속에 요약해보곤 했다. 그때 기술사에 대한 나의 집착은 무척 집요한 것이어서 꿈에도 현장기술이 머리를 맴돌곤 했다.
한번 실패로 초지일관 정진해 온 것을 버릴 수 없었다. 이미 10년 이상이나 판 우물이 아니던가? 힘을 내어 다시 머리를 쓰고, 기술을 익히고, 기술서적을 탐독하고, 현장적응을 해나갔다.
그결과 이듬해인 84년도에는 1차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시험 시작 종이 울리면서부터 시험종료 때까지 잠시 펜을 중지한 적이 없을 정도로 써 내려갔으니 결과가 좋은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겨우 턱걸이할 정도였다. 간신히 낙제점수를 면한 62.5점으로 통과한 것이었다. 경력심사는 오히려 수월했다. 한 우물을 판 것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면접심사때는 기술에 대한 나의 애착을 높이 사 주었다.
마침내 최종합격자가 되었다. 10여년을 벼르던 기술사가 된 것이다. 당시 나이 28세로 최연소라는 기쁨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그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경기장 조명및 중계전원총괄업무를 수임받아 올림픽 전 경기장의 시설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지금도 서울올림픽을 생각하면 자긍심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앞으로 기술자의 길을 가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 제2의 사농공상
첨단과학이니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이니 하는 보도가 연일 신문지상과 방송에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중거다. 그러나 모든 사회구조가 그렇듯 피라밋의 하층구조를 튼튼히 할 때 귀족적인(?) 학문도 빛을 발할 수 있다. 산업현장의 대중적 기능 기술인이 뒷받침해줄때 '큰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연구실에 있는 박사가 산업현장 기술사가 하는 일을 못하듯 기술사도 박사가 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열처리의 명수로 기능이 몸에 벤 기능장이 결코 박사가 될 수 없듯이 박사 또한 기능장의 오묘한 솜씨를 흉내낼 수 없다. 이처럼 3자에게는 각자의 '특기'가 있는 것이다. 이 장기를 우리는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
과학도라면 누구나 학계 기술계 기능계중 한 길로 진출한다. 연구실이냐, 거대한 산업현장의 포로엔지니어(기술사)냐, 아니면 나사못 하나일지라도 완벽하게 만드는 우수한 기능장이냐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 있어서 제2의 '사농공상' 인식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진정으로 앞으로 나가려면 이 인식은 속히 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각자의 고유의 영역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학계 기술계 기능계의 수평적 횡적 교류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기술사를 박사라고 말하는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 기술사면 기술사, 박사면 박사, 기능장이면 기능장으로 떳떳이 행세하는 사회의식 속에서만이 우리는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 앞으로 보도매체들도 연구실의 기술학문 발전상과 아울러 현장의 과학기술 기능을 소개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사회저변의 유교적 가치관은 선진과학기술의 도입에 알게 모르게 지장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반과학 반기술 반기능의 구조적인 모순을 개선하려면 과학인 기술인 기능인이 서로 협조하고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동시에 이론에 그치는 학문보다 실용성있는 학문에 더 비중을 두고 연구 노력하는 것이 과학기술인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과학자 기술자 기능자가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고 국제간의 수출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도 한쪽에서 나사못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공허한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전후 일본과 서독 그리고 미국의 경제력은 유교사상이 아닌 사회저변의 장인정신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즉 과학인 기술인 기능인이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에 관계없이 꾸준히 자신의 일에 최대의 가치를 둔 덕분이었다. 여기에 우선적인 정책배려도 한몫을 했다. 과학기술인은 사회적 지위를 구가하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면서 묵묵히 기술을 축척하고 개발해 왔다. 그리고 축적된 기술을 이용한 제품으로 국부를 가져다 주었다.
장래의 과학기술도는 보는 시야를 넓게 하고 합리적인 과학적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희망이 있다. 과학인 기술인 기능인이 우대받는 또 연구에 몰두 할수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