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에서 남미대륙의 끝까지 그 서부지역을 관통하는 산맥은 앨래스카산맥, 록키산맥 그리고 안데스산맥으로 불리워진다.
이 거대한 산맥의 북쪽끝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북쪽에 있는 매킨리산.
'매킨리'라는 이름은 20세기 후반의 미국인들에게 '케네디'라는 이름만큼이나 금세기초의 미국인들에게 자주 불리운 이름이었다.
매킨리산이라는 명칭은 바로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암 매킨리'(1843~1901)에서 유래한다. 매킨리대통령은 '허스트'계 신문의 선동에 휩쓸려 스페인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사람. 필리핀과 푸에리토 리코를 스페인에서 빼앗아 국내에서 격렬한 제국주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 와중에서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산체(山体)의 대부분이 만년설로
매킨리산의 높이는 히말라야에 비해 별것아니지만 그 위치가 북극권에 속해있기 때문에 산체의 3분의 2가량이 눈과 얼음으로 4철 뒤덮혀 있다.
또한 3천m를 넘는 거봉들로 웅장한 모습을 뽐내며 5부능선에서부터는 경사 50도 이상의 가파른 빙벽이 많아 산악인의 피를 끓게 하는 마력도 갖고 있다. "당신은 누구를 더 좋아합니까? 매킨리산입니까, 나입니까?" 이것은 20세기초 매킨리산에 매혹된 산악인의 애인들이 매킨리로 떠나는 남자에게 흔히 던진 질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왜 양자선택의 극단적인 질문을 던졌을까? 그것은 매킨리산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매킨리의 두개 산정 즉 북봉(北峰)과 남봉은 각각 1910년과 1913년 정복되었는데 그후 많은 청년들이 정상정복에 도전, 그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우리나라의 고상돈씨도 매킨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매킨리 등정이 어려운 이유는 산세가 험한데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 그리고 이곳에는 포터나 셸파가 없어 등반대의 체력소모까지 가세되기 때문이다.
또 요즘의 등반대에게는 7월을 넘기지 않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지만 초기에는 계절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아 사고가 자주 일어난 한가지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필자가 참여한 고려대 등반대도 7월27일 등정했지만 이런 계절적 요인을 사전에 충분히 고려한 것이다.
고도 900m가 수목한계
매킨리산은 만년설아래 북극권의 아름다운 수해(樹海)로도 유명하다. 고도 900m까지 가문비나무가 촘촘히 들어서있고 고도 900m에서 만년설사이에는 갖가지 키작은 관목이 끈질긴 생명력을 지키고 있다. 이 경계지역을 툰드라지역이라고 부르는데 툰드라에는 회색곰이 많이 살고 있다 한다.
툰드라아래지역에는 사슴 여우 담비 삵괭이가 주로 산다. 또 그 아래 비교적 환경이 좋은 하천지역에는 밍크나 비버 이리같은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새종류로는 갈매기 독수리 뇌조 등이 서식한다.
고려대 매킨리원정대가 매킨리를 오를 때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은 무려 시속 60마일이나 되었으며 기온은 영하 25도였다. 영하 25도라면 굉장한 강추위이지만 그래도 계절탓으로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피할 수 있었던 것.
등반대는 매킨리 등정 루트중 가장 힘들다는 '웨스턴 립'을 택했으며 3분동안 겨우 10여m씩 전진하는 극한의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의식이 꺼지는 순간까지 전진한다."는 그 집념과 투혼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매킨리의 정상에 오를 수가 있었을까? 10여년 전의 일이었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