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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취락 뒤치락의 7라운드 끝내고 다시 불붙은 미·소의 우주경쟁

소련 최초의 우주왕복선 부란(눈보라)호가 작년 11월 15일 무인비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1월 28일에는 미국의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가 다시 발사되었다.

부란호의 우주비행은 미국 콜럼비아호의 최초비행에 비해 8년 늦은 것이기는 하지만 바야흐로 본격적인 미소(美蘇)의 우주 왕복선 경쟁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부란호는 구조와 형태면에서 미국의 우주왕복선과 비슷하지만 몇가지 다른 점도 눈에 띈다. 미국의 것은 발사시 추진력을 높이기 위한 부스터(보조로킷)에 고체연체를 사용하는데 반해 부란호의 에네르기아는 액체연료를 사용한다.

소련의 과학자들은 에네르기아가 2천t의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사용하는 세계 최대의 초강력로킷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백10t의 중량을 가진 물체를 지구궤도에 올릴 수 있고 최대 28t의 물체를, 달은 물론이고 화성 금성까지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부란호는 승객을 미국 우주왕복선보다 3명 많은 10명까지 태울 수 있다. 하지만 챌린저호의 참사를 거울삼아 최초 비행을 무인비행으로 했다고 한다.

기체 재료를 보면 부란호는 소련과학의 수준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대기권 재돌입시 발생하는 1천6백℃ 이상의 고열을 막기 위해 부란호를 내열타일이 감싸고 있는데 그 내열성이 대단하다고 한다. 궤도돌입 직후 타일을 맨 손으로 만져도 괜찮다는 것.


소련은 부란호 말고도 제2의 우주왕복선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각각 연간 2~4회 비행할 예정인데, 미국의 연간 10여회에 비해 비행간격이 긴 셈이다.

또 미국의 우주왕복선이 주로 새로운 위성들을 지구궤도로 발사하는 '우주트럭'인데 반해 소련의 우주왕복선은 위성의 수리나 회수에 활용될 것이라고 한다.

경쟁은 1945년부터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은 올해로 45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무렵인 1945년 봄 미국과 소련의 최대 목표는 독일의 로킷 연구기지와 로킷 과학자를 얻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페이퍼 클립(paper clip)작전을 세워 독일의 로킷 과학자와 로킷 설계도 그리고 로킷 부품등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 노력의 결과 1945년 5월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한 1백20여명의 독일 로킷 과학자들이 1톤 이상의 로킷관계 기밀서류와 함께 미국에 투항했다. 이들은 곧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우주개발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소련 역시 독일 점령의 최대 목적이 마치 로킷제조공장과 연구소를 차지하는데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페네뮌데(독일 로킷연구소)를 점령하였지만 이미 한발 늦은 상태였다. 연구소의 중요 과학자나 연구자료는 미국으로 운반된 후였던 것이다.


1946년 10월 소련은 2백여명의 독일인 로킷기술자들을 본국으로 데려가서 로킷 연구소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데려가서 로킷 연구소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로킷연구를 시작했다.

독일에서 로킷과학자를 데려오는 첫번째 경쟁에서는 미국이 손쉽게 승리한 셈이다.

첫번째 경쟁에서 열세에 놓여있던 소련은 독일인 로킷기술자와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열심히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1년 후인 1957년 10월 4일 농구공만한 크기에 4개의 송수신용 안테나를 단 무게 83.6㎏의 물체를 우주에 쏘아 보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근지점 2백15㎞, 원지점 9백39㎞의 지구궤도에 올려 놓은 것이다. 이 쾌거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국가의 과학자를 놀라게 하였으며, 미국 사람들의 '위대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사실 미국에서도 1956년에 '폰 브라운'박사를 중심으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계획인 미사일 29호계획을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각이유는 그 전년도에 발표된 뱅가드계획(순수한 미국인만 참여하는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정부가 적극 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등에 떨어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직후 새로 입명된 국방장관인 '매켈로이'씨와 만난 '폰브라운'박사는 "그들이 인공위성을 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읍니다. 뱅가드 계획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허송 세월을 보냈읍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60일이면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 놓을 수가 있읍니다"라고 말했다.

흥분해 있는 '폰 브라운'박사의 손을 꼭 쥐면서 장관이 말했다.


"아닙니다. 브라운 씨, 90일입니다. 90일…"

비로소 빛을 본 미사일 29호계획, 즉 독일 로킷과 학자팀을 중심으로한 미육군 인공위성 발사계획의 첫번째 발사 실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958년 1월 29일에 수행되었다. 그 보다 며칠 앞선 1957년 12월 6일 미 해군팀이 제작한 뱅가드 로킷은 어이없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부터 2달이 채 못된, 그러니까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지 1백9일만인 1958년 1월 31일 밤 10시 49분 케이프 캐나베랄 발사장에서는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 성공리에 발사되었다. 4.8㎏의 인공위성, 이름하여 익스플로러(explorer·탐험자) 1호가 근지점 3백 56㎞, 원지점 2천 5백 48㎞의 지구궤도에 올려진 것이다.

제2라운드는 유인우주비행을 놓고

미국과 소련의 무인인공위성 발사경쟁은 소련이 이긴 채 끝났다. 이어 양국은 유인(사람이 탑승하는) 우주선을 누가 먼저 발사하느냐에 촛점을 맞추었다.

유인우주선을 발사하기 전에 준비해야 될 일들은 이렇다.

첫째 충분한 크기의 로킷이 준비되어야 한다. 예컨대 무인인공위성이었던 익스플로러 1호는 무게가 4.8㎏, 발사전 로킷의 총 무게가 29t이었다. 그런데 첫번째 유인우주선은 무게가 1천3백52㎏, 발사전 로킷의 총 무게는 1백12t이나 나갔다.

둘째 사람이 탈 수 있는 우주선이어야 한다. 우주선이 비행할 우주공간은 공기가 없는 진공상태이며, 온도도 사람이 살아가기에 부적합하다. 햇볕이 직접 비치는 곳은 1백30℃, 안 비치는 곳은 -1백20℃이므로 양쪽의 온도차가 2백50℃나 나는 것이다.

또 생명유지장치, 우주복 그리고 지구로 돌아올 때 대기권에서 발생하는 수천도의 마찰열 등에 견딜 수 있게 하는 방법 등을 개발해야 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할 당시에도 이미 대형 우주발사용 로킷을 갖고 있었다. 스푸트니크 1호는 83.6㎏의 무게에 불과하지만 7달 뒤 그들은 같은 발사체로 1천3백27㎏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3호를 지구궤도에 올려 놓았다. 또 이를 조금 개량한 A-1 이라는 로킷은 1960년 4천5백63㎏의 초대형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렸다. 다시 말해 소련은 유인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넉넉한 추진력의 우주발사체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에서의 동물 환경적응실험을 위해서 소련은 1957년 '라이카'(Laika)라는 이름의 개를 스푸트니크 2호에 실어 발사하였다. 불행히도 '라이카'는 지구로 되돌아오지 않았지만, 미국이 무인인공위성조차 발사하기 전에 이미 소련은 생물체를 실은 인공위성의 발사실험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을 때부터 유인 우주선 발사를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소련은 1960년 스푸트니크 5호에 '스트렐카'(Strelka)와 '벨카'(Pchelka)라는 개2마리와 쥐 42마리를 실은 채 발사했다. '스트렐카'등은 지구를 18회전한 뒤 무사히 귀환, 우주공간을 여행하고 돌아온 최초의 생물체가 되었다. 우주개 '벨카'는 그후 결혼, 6마리의 귀여운 강아지를 낳아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이 무렵 생물체의 우주환경적응 실험과 유인 우주비행용 우주선의 기능실험이 계획 되었다. 그후 원숭이를 실은 우주선이 몇차례 발사되었는데 단순한 탄도비행으로 그치고 말았다.
미소(美蘇)의 동물을 이용한 생물체의 우주적응실험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추운 나라인 소련은 원숭이가 없는지 주로 개나 쥐를 사용했고, 미국은 애완용인 개를 피하고 대신 원숭이를 우주선에 태웠다는 점이다.

유인 우주비행도 소련이 먼저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유리 가가린'(Gagarin)이라는 이름의 우주인을 지구궤도에 미국보다 한발 먼저 올려 놓았다. 이날 발사된 4천7백25㎏짜리 보스토크(Vostok) 2호는 근지점 1백69㎞, 원시점 3백15㎞의 궤도에서 지구를 한바퀴 돈 뒤 무사히 착륙했다.

이로부터 약 3주 후 미국에서는 '알렌쉐파드(Alan Shepard)가 프리덤(자유) 7호라는 우주선을 타고 15분 22초 동안 1백86.4㎞까지 떠올랐다가 대서양에 떨어져 귀환했다. 그의 비행은 미국이 완전한 지구 궤도비행을 하기 전에 실시했던 단 1차례의 탄도비행이었다.

마침내 1962년 2월 20일 '글랜'이 지구를 3바퀴 회전함으로써 미국도 본격적인 유인 우주비행시대에 접어 들었다. 비록 소련보다 3백15일 뒤에 이루어진 우주비행이었지만 미국인들을 크게 흥분시킨 사건이었다.


그 기쁨에 비례하여 우주비행사였던 글렌은 미국인의 영웅이 되었다. 현재 그는 미국의 상원의원인데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때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미소(美蘇)의 우주경쟁은 일방적으로 소련이 우세했다.


1963년에 발사된 보스토크 6호에 이르기까지 6회의 보스토크 계획에서 소련이 이룩한 기록들을 보면 소련의 우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때까지 소련의 총 지구궤도 선회 수는 2백59회에 이르고 총 우주비행 시간은 2백82시간 24분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보스토크 6호에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테레쉬코바'(Tereshkova)를 태우기도 했다.

한편 미국의 머큐리계획도 1963년에 마감되었다. 우주비행사 '쿠퍼'가 '신의 7호'를 타고 34시간 20분동안 우주 비행을 함으로써 6회에 걸친 미국의 일인승 우주비행계획을 마친 것이다. 이 계획을 통해 세운 기록을 보면, 총 지구궤도 선회수 34회, 우주비행시간 61시간34분으로 소련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다.

케네디의 약속

달착륙계획에 있어서도 소련은 미국보다 먼저 손을 썼다. 소련은 1959년에만도 4번씩이나 달을 향해 인공위성(탐색선)을 보냈을 정도다. 물론 계속 실패로 끝났지만 1959년 6월에는 달로부터 5천9백65㎞ 떨어진 지점을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우주선을 달에 충돌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또 그해 10월에 발사된 루나(Lunar) 3호는 아무도 볼 수 없었던 달의 뒷면을 사진 찍는데 성공한다. 루나 3호가 보내온 사진을 통해 최초로 달의 뒷면도 앞면(지구에서 보이는 쪽)과 같이 많은 분화구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련의 재빠른 발걸음에 자극받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은 1961년 국회에 보낸 교서에서 "미국은 60년대 안에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지상으로 생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달의 정복만은 소련보다 앞서 이루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케네디의 대(對)국민약속 이후 미소(美蘇)의 달탐험 우주경쟁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당시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공식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코 웃음'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소련이 먼저 달에 간다는 것은 당시 여러 과학적인 상황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자극되어 1958년 10월 1일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였다. 이 기구를 통해 당시까지 각군(軍)에서 독립적으로 수행되던 우주관계연구에 필요한 지혜와 힘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아폴로와 소유즈가 우주에서 만났다(1975.7)
 

아폴로 대(對) 소유즈

인간이 달에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달까지 우주선을 보낼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우주로킷이다. 그런데 로킷의 연구개발에는 시간 돈 기술이 모두 요구된다.

미국에서 이일을 담당한 대표는 '폰 브라운'박사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달나라 여행에 쓰여질 새턴(saturn) 로킷을 만들자는 결정은 이미 1958년경에 있었다고 한다.

새턴로킷의 개발취지는 두말할 나위없이 소련을 추월하기 위해서였다. 특이하게도 소련과 미국의 첫번째 인공위성 무게의 비는 83㎏ 대 4.8㎏였다. 소련의 인공위성이 미국의 것보다 15배 이상 무거웠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추진로킷개발이 절박 한 당면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폰 브라운'박사는 강력한 추진력을 낼 수 있는 새로운 로킷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 로킷의 개발의 성패에 따라 미국의 달 여행의 성패가 결정되어 질 정도로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래서 미항공우주국(NASA) 마샬우주센터에서는 달여행에 필요한 새턴 로킷을 집중 연구했다. 또 달여행에 필요한 각종기술은 머큐리계획과 제미니계획을 통해서 얻어냈다. 미국은 이들을 종합, 최종적으로 아폴로계획을 수립하여 달탐험을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역시 달여행을 위한 강력한 로킷 개발에 들어갔다. 또 보스호크계획과 보스토크계획을 통해서 필요한 기술을 실험 훈련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인 소유즈계획을 통해 달 탐험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루나의 좌절과 성공

소련의 달탐험에 필요한 자료수집은 루나(Lunar)계획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이 계획은 초창기에는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1959년 루나 3호가 달 뒷면 촬영에 처음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실패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성공은 또다시 찾아왔다. 1966년에 발사된 루나 9호가 달에 사뿐히 내려앉아 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얻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루나 9호를 발사한지 두 달뒤에 쏘아올린 루나 10호는 처음으로 인공적인 달의 위성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루나 10호는 달의 주위를 회전하면서 인류의 달탐험에 필요한 많은 자료를 지구로 송신하였다. 소련의 달탐험에 필요한 준비를 착실히 다져간 것이다.

JPL의 반격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서디너'라는 작은 도시에는 제트추진연구소(JPL)가 자리잡고 있다. NASA소속 연구소중의 하나인 이 연구소는 달착륙선이 착륙할 곳을 선정하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혹성 즉 화성 금성 토성 등에 보낼 탐색선을 설계 제작 연구하는 임무도 갖고 있다.

미국은 1961년 9월부터 달에 탐색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탐색선이 달의 인력에 이끌려 달을 향해 떨어질 때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내곤 했다. 물론 사진찍는 일은 달에 충돌하기 직전까지만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달의 사진들은 달표면 3백m 이상 상공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찍기가 간단했다는 말은 아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64년에 발사된 레인저 7호가 처음으로 근접 달사진을 찍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1965년에 발사된 레인저 8호는 7천1백37장, 같은 해에 발사된 레인저 9호는 5천8백14장의 달사진을 지구로 보냈다.


소련이 달 연착륙에 성공한지 5달 뒤인 1966년 6월 미국은 서베이어(Surveyor) 1호를 발사, 달에 연착륙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단 한번의 시도로 달 연착륙을 성공시킨 것이다.

아뭏든 서베이어계획은 1968년까지 7차례 시도, 그중 5번을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유인우주선이 착륙할 예정지를 모두 조사하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달로 발사된 서베이어 7호는 각종 실험기구를 가지고 떠났다. 달 표면에 안착한 서베이어 7호는 달의 흙을 파서 달의 토양에 대한 여러 실험을 수행, 그 자료를 지구로 보내주었다. 서베이어 계획이 많은 과실을 맺자 이에 고무된 미국은 다시 루나 오비터(Lunar Orbiter)계획을 착수했다. 1966년에 발사한 루나 오비터 1호는 달의 궤도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으로써 그 동안 크게 뒤졌던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많은 추격을 하게 되었다.

루나 오비터계획으로 1967년 8월까지 5차례 우주선이 발사되었는데 모두 성공리에 임무를 마쳤다. 이 계획의 성공으로 거의 완벽한 달의 지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의 기록들을 깨뜨리다

유인 우주비행계획인 미국의 머큐리 계획과 소련의 보스토크 계획은 서로 비교하기가 좀 거북할 정도로 소련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다음 계획인 제미니 계획을 통해서 달탐험에 필요한 각종 기술을 익혔다. 즉 장기간 우주비행(2주 이상),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바꾸는 기술, 랑데뷰(Rendezvous, 두 우주선이 근접한 거리에서 같이 비행하는 것), 도킹(docking, 두 우주선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로 되는 기술), 우주산책(우주선이 고장났을 때 밖에서 고쳐야 하므로 필수적이다) 기술 등을 습득해 나간것이다.

제미니계획을 통하여 얻은 성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우선 제미니 7호가 13일간의 우주비행을 한 기록을 꼽을 수 있다. 또 1966년에 발사된 제미니 9호의 우주비행사 '유진 서넌'은 2시간 4분이라는 당시로는 최장의 우주산책 기록을 세우며 소련의 기록들을 하나씩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 12월 15일과 12월 4일에 각각 발사된 제미니 6호와 7호는 서로 2~3m까지 접근하는 랑데뷰 기록을 세웠다. 또 1966년에 발사된 제미니 8호는 아제나로킷과 35분동안 도킹하는데 성공했다.

이 도킹과정에서 제미니 우주선에 이상이 생겼다. 그 때 우주비행사 '암스트롱'은 이를 침착하게 잘 해결, 후에 최초로 달나라탐험을 수행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 이외에 궤도변경실험, 강력한 우주선 지대인 반 알렌대 통과실험 등 달탐험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술을 익혔다.

아무렵 소련은 보스호드(Voskhod) 1호를 발사하였다. 1964년 가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우주선에는 사상 처음으로 3명의 우주비행사가 탑승했다. 이듬해인 1965년에 발사된 보스호드 2호의 우주비행사 '레오노프'는 인류 최초로 10분간 우주산책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미국보다 3개월 빠른 기록이지만 당시 발표했던 사진 등이 아주 희미해서 미국의 일부 과학자들은 가짜라고 주장한다. 1967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미소(美蘇)의 우주경쟁력을 비교하여 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표)

 

마지막 경쟁

1966년 7월 미국은 아폴로 2호를 발사했다. 우주선은 없고 단지 강력한 로킷의 발사 뿐이었다. 이날 궤도에 올려 놓은 2단로킷의 무게는 26.5톤으로 사상 최대의 무게였다. 2단로킷은 달 탐험에 사용할 새턴 5형로킷의 초보적인 단계였던 것이다.


다음 날 소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프로톤(Proton) 3호를 발사했다. 하지만 이 우주선의 무게는 12.2톤으로 미국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로써 그동안 소련에 뒤졌던, 대형발사체에서도 미국은 소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국의 아폴로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7년 1월 아폴로계획은 큰 시련을 맞는다. 연습중 화재가 일어나 우주선에 있던 3명의 우주인이 사망하는 사고를 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아폴로우주선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개조작업이 실시되었다.


아폴로계획이 이룬 성과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새턴 5형로킷의 개발과 활용을 들 수 있다. 1967년 아폴로 4호부터 장착되기 시작한 새턴 5형로킷은 그 뒤 여러 비행을 통해 달 탐험에 충분히 이용될수 있는 로킷임이 증명됐다.

한편 소련의 소유즈계획도 1967년 소유즈 1호가 발사됨으로써 시작된다. 그런데 소유즈 1호는 발사한지 하루만에 비극을 낳는다. 지구로 돌아오다 낙하산에 문제가 생겨 소련의 첫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소련의 소유즈계획도 1년 반 이상이나 연기되었다.

소련은 소유즈와 코스모스계획을 이용, 달 탐험에 필요한 랑데뷰, 도킹기술을 익히고 실험했다. 특히 1967년에 발사된 코스모스 186호와 코스모스 188호는 지구궤도에서 서로 자동으로 도킹, 우주정거장 건설실험을 하였다. 이는 소련이 우주정거장에서 달 탐험용 우주선을 발사할 것이라는 예측을 불러 일으켰다. 실제로 소련은 우주정거장 건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68년 말까지도 미국의 새턴 5형에 필적하는 강력한 추진력의 로킷개발에는 실패했다.


마침내 경이의 날은 왔다.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된 아폴로 11호가 5일 후인 7월 20일 달 표면에 도착한 것이다. 최초의 달 사나이 '암스트롱'을 태운 아폴로 11호가 7월 24일 무사히 지구로 귀환함으로써 달선착을 놓고 10여년간 지속되었던 우주경쟁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1995년에 완공할 예정인 미국 2번째 우주정거장의 상상도


컴퓨터기술의 우세가 결정적

당시를 기억해 보면 소련과 미국의 경쟁은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되기 3일전 소련은 루나 15호를 달에 발사, 달 궤도를 선회하게 했다. 그래서 한 때는 이 우주선에 사람이 탑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미국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강력한 달 로킷의 제작과정, 컴퓨터기술, 전자공학의 우세가 승부를 결정지은 것이다.


소련은 미국의 달 탐험이 성공한 일년 뒤인 1970년 루나 16호를 발사, 달의 흙을 파가지고 왔다. 이때 소련의 과학자들은 경제적이고 안전한 무인 로봇을 이용했다.

다음은 화성으로

인류는 언젠가는 화성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화성정복을 위해 미리 준비해야 될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2년 이상의 긴 우주여행에 인간이 적응하는 훈련, 둘째 화성탐험에 필요한 거대한 우주선을 제작할 재원, 세째 거대한 화성행 우주선을 조립할 수 있는 우주정거장 등이다.

달 탐험 경쟁에서 참패한 소련은 화성은 반드시 먼저 가겠다는 굳은 결의 속에 꾸준한 준비를 해오고 있다.


이러한 준비의 일환으로 그들은 상당한 수의 화성탐사선을 발사해왔다. 그렇지만 미국에 비해 크게 앞선 분야는 없다.

소련은 작년에도 화성탐사선인 포보스 1호와 2호를 발사했다. 그중 포보스 1호는 조정 잘못으로 인해 이미 고장난 상태다. 다만 금년 1월에 화성궤도에 진입할 포보스 2호의 성과가 기대된다.
반면 미국은 이미 바이킹탐사선을 화성에 착륙시켜 많은 자료를 얻었다.

우주정거장 건설은 소련이 앞서

소련은 지구 궤도에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곳에서 달 탐사 우주선을 발사한다는 계획도 세운 적이 있다. 그들은 17톤의 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릴 수 있는 프로톤이라는, 새턴 5호로킷 반 정도 크기의 로킷이 있다. 이 로킷을 이용하여 소련은 살류트(Salyut)라는 이름의 우주 정거장을 1971년 4월에 발사했다. 이 우주정거장의 무게는 약 18.5톤 정도.

그런데 살류트는 우주비행사가 탑승한 소유즈우주선과 지구궤도에서 도킹, 각종 실험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유즈우주선은 일종의 연락선인 셈이다.

미국도 1973년 우주정거장을 건설한다. 달 탐험에 사용하였던 새턴 5형로킷을 이용, 74.7톤의 스카이랩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 미국 최초의 우주정거장은 1979년 지구에 떨어져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아뭏든 이 스카이랩은 1974년까지 이용되었다. 하지만 그후 미국은 우주정거장을 새로 건설하지 않았다. 반면 소련은 지금까지도 우주정거장을 이용한 각종 실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인 우주 비행사가 우주에 머문 최장 기록은 84일 1시간 15분 31초에 불과하다. '깁슨'등 3명의 우주비행사가 1974년 스카이랩에서 작성한 기록이다.

하지만 소련의 우주비행사 '티토프'와 '마나로프'는 지난 88년 12월 15일까지 이미 3백60일을 지구궤도에 있는 우주정거장 미르에 머물고 있다. 아직도 그들은 미르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세계 최초로 일년 이상 우주에서 지낸 기록을 보유하게 될 것 같다. 1986년에 발사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소련의 최신형 우주정거장 미르의 크기는 보조장치까지 합하여 길이가 25m 정도이다. 무게는 30~40톤 정도.


미·소 우주왕복선 비교
 

에네르기아의 등장

미국의 과학자들은 대형 우주정거장을 지구궤도에 건설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도구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우주정거장 건설에 사용될 부품을 지구궤도로 실어 나를 우주왕복선이 필수적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아폴로와 스카이랩계획이 끝나던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81년 4월 12일에는 첫번째 비행(콜럼비아호) 이 성공한 이래 지난 86년 1월의 챌린저호 폭발사고 때까지 23번의 우주비행을 하였다. 그동안 많은 인공위성을 지구궤도로 운반했으며 수십명의 우주비행사 및 기술자를 양성하였다.

지난 해 9월 29일에 재개된 미국의 우주왕복선은 우주정거장의 건설에 톡톡히 한몫 할 것이다. 특히 1993년 착공하여 1995년에 완공할 예정인 길이 1백16m, 폭 90.4m 의 본격적인 우주정거장 건설계획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소련이 1987년 5월에 발사실험한 에네르기아는 60m 길이에 4개의 액체추진제와 추력보강용로킷을 부착한 것이다. 이 로킷은 1백t 이상의 우주선을 지구궤도에 올릴 수 있는 강력한 로킷으로 앞으로 소련 우주개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련은 에네르기아로킷에 우주왕복선을 업혀서 소련 최초의 우주 왕복선 부란호를 출범시켰다. 성공으로 평가된 이날의 실험에서 부란호는 자동조종으로 착륙했다.

관계자들은 앞으로도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승무원을 태우지 않고 자동이착륙장치를 계속 이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국의 한 우주과학 전문가는, 소련의 우주왕복선은 발사에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도 빨리 소련의 에네르기아 정도의 우주발사체를 보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경제적이면서도 강력한 추진력의 우주발사체를 어떻게 제작하는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미소(美蘇)는 지금까지 불꽃 튀기는 우주경쟁을 벌여 왔다. 마치 국운을 우주에건 양, 한치의 양보없이 뜨거운 승부를 연출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개방과 개혁을 내세운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양국은 우주경쟁에서도 화해의 몸짓을 내보이고 있다. 지나친 경쟁보다 상호협조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화성의 탐사선 발사계획에서는 협조분위기가 두드러졌다.

사실 양국은 서로 나름대로의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축적된 우주노하우를 교환한다면 막대한 노력을 덜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NASA를 설립, 분산돼 있던 미국의 전 우주기술력을 동원했떤 31년 전의 교훈이 지금 미소 양국의 과학자의 가슴에 물결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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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채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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