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학자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 커다란 충격을 던져준 죽음

'앙뜨와느 로랑 라보아제'(Antoine-Laurent Lavoisier)는 산소의 발견자로서,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근대 화학을 발전시킨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지질학에도 몇몇 독창적인 연구를 남겼으며, 농업을 주먹구구식의 경험적 지식에서 과학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왕립화약국의 국장으로 조국 프랑스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보였으며, 왕정체제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개혁가였다.

라보아제는 51세인 1794년 5월8일 한창 연구할 나이에 처형됐다.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학자중 한사람인 라보아제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 충격은 유능한 과학자를 너무 일찍 잃었다는 데서 온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슬프게 했던 것은 그가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라보아제의 죽음은 유명한 과학자의 임종 가운데 가장 비참했던 것으로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렇지만 결코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정신에 반대하지 않았던 그가 왜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는 거의 얘기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죽음을 조금 더 깊숙하게 파헤쳐 보는 것은 과학과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면을 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갓 스무살에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돼

라보아제는 1743년 8월26일 프랑스 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으며 어머니의 집안은 꽤나 부유한 편이었다. 라보아제가 어린이였을 때의 프랑스는 인간과 사회의 개혁을 외치는 계몽사조의 급류를 타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10년전 철학자 '볼테르'는 '철학 서한'을 출판하여 당시 프랑스 교회의 독단과 편견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이성과 계몽의 활력소로서 과학의 전파를 외쳤다. 그가 8살이었을 때는 당대 최고의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함께 집필한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제1권이 발간되던 해였다.

인간의 자유·조엄과 만인의 평등을 추구하던 계몽사조에서 흐름속에서, 라보아제는 우수한 성적으로 정규교육을 마치고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곧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과학에 더욱 재능과 흥미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20세 되던 해부터 라보아제는 과학에 온 정신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분야 가운데서 지질학과 동시에 화학의 많은 문제들을 탐구해나갔다.

그의 명성이 당대의 과학자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64년 그가 22세때였다. 빠리 시내의 가로등이 너무 어두워서 이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밝게 고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던 빠리경찰국은 이 문제의 해결방법을 협상공모에 붙였었다. 라보아제는 어떤 심지와 연로를 사용해야 가장 밝은 빛이 나며, 랜턴의 반사경의 모양이 어떤 것이어야 빛이 가장 많이 반사되는가를 풀어서 현상공모에 답했다. 2년 뒤인 1766년 왕이 수여한 금메달이 그에게 돌아갔다.

이 수상을 계기로 라보아제의 이름은 최고의 과학자단체였단 빠리 과학아카데미(Paris Academy of Science)의 몇몇 회원들은 이제 갓 스무살을 넘은 그를 마침 공석으로 되어있던 자리에 추천했다. 비록 공석회원에는 그보다 약 10살 정도가 더 많은 다른 화학자가 임명되었지만. 스물이 갓 넘은 젊은이가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사실만도 당시로는 놀라운 일이었다.

빠리 고학아카데미는 약 1백년전인 1666년에 설립된 과학단체였다. 설립 당시부터 아카데미는 왕실의 강력한 후원과 보조를 받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일단 선출되면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월급을 받으며, 연구활동에 필요한 연구비도 지원받았다. 또 아카데미는 각종 연구시설을 넉넉히 갖추고 있었다. 실험실 도서관은 물론 천문대 식물원까지 마련되어 있다.

●― 과학아카데미의 특권

일단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된 과학자들은 모든 특혜와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회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프랑스 최고의 과학자라는 것을 권위있게 보장했다. 프랑스의 젊은 과학자들은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것을 최고의 명예이자 꿈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치열한 경쟁이 나타난 것은 당연했다.

아카데미의 신입회원을 선출하는 방식은 과학문제를 현상공모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논문이나 업적을 발표해서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에나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해석역학의 창시자인 '달랑베르'(d' Alembert)나 확률해석학, 사회수학(Social Mathematics)의 창시자인 '꽁도르세'(Condorcet)를 포함한 몇몇 회원만이 20대에 회원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아카데미 회원의 선출은 전임 회원의 사망이나 사고로 공석이 생기거나 필요에 따라 새회원의 선출이 결정되었을 때만 회원을 새로 선출했다.

1766년의 선출에서 떨어졌던 라보아제에게는 오래지 않아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의 유럽사람들도 약수의 효능과 구성성분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68년에는 그는 물의 성분을 분석하는 훌륭한 방법을 아카데미에 제출했고, 이번에는 마지막까지 경쟁자였던 '가브리엘 자르'(Gabriel Jars)를 물리치고 당당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 라보아제가 깨뜨린 '음의 질량'이론

아카데미에 들어간 라보아제는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물에서 흙이 만들어진다는 물질의 변환(transmutation)을 시험했다. 물을 계속 증류시켰을 때 그릇의 바닥에 백색가루가 남으며, 이것이 바로 물로부터 흙이 만들어진 증거라는 게 17세의 최고의 화학자였던 '로버트 보일'(Robett Boyle)의 주장이었다.

이후 과학자들은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실제로 실험을 해오면 많은 경우 물이 증발하며 흰색의 가루가 남곤 했기 때문이었다.

라보아제는 그의 뛰어난 실험능력과 정확하고 꼼꼼한 측정을 바탕으로 물이 흙으로 변한다는 1백년이 넘게 믿어진 주장이 오류였음을 밝혀냈다. 이 실험은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고 동시에 보다 대중적인 논문집에 출판되었다. 이 사건은 라보아제의 이름을 일반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퍼지게 했다.

그렇지만 라보아제를 유럽최고의 과학자로 올려놓았던 업적은 뭐니뭐니 해도 산소의 발견이었다. 물질이 타는 것이 결국은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발결하기 이전에는 과학자들은 물질은 플로지스톤(phlogistion)이란 입자가 빠져나감으로서 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설명은 사람들의 경험과 상당히 잘 들어맞았는데, 실제로 나무가 타서 숯이 되고 또 그 숯이 타서 재가 되는 과정은 물질이 어떤 것(지금 우리의 관점으로는 산소)과 결합했다기 보다 물질에서 무엇이 빠져나갔다고 간주하는 것이 훨씬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러나 플로지스톤이라는 가상적인 입자를 사용한 설명은 한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정량적이고 엄밀한 실험의 결과 물체가 타면서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이었다. 플로지스톤이론을 주장하던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플로지스톤이 '음의 질량'(negative weight)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빠져나가면 오히려 무게가 증가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라보아제는 이러한 플로지스톤 이론에 대해 처음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다. 특히 정량적이고 엄밀한 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에게 '음의 질량'과 같은 비과학적 개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 1774년 영국의 화학자인 '프리스틀리'(J. Priestley)가 산화수운(HgO) 으로부터 산소를 분리해냈다. 프리스틀리는 이 기체의 본질을 잘 모른채 리보아제에게 자신의 발견을 얘기해주었다. 라보아제는 새롭게 발견된 이 기체의 여러가지 성분과 특성을 연구한 결과 이것이 바로 물질이 탈 때 흡수되는 기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이 산화하면서도 동일한 작용을 하며, 더 나아가 수소와 결합해서 물을 만드는 것임을 알아냈다.

산소의 발견으로 인해 그 이전의 플로지스톤 이론은 설 자리가 없어졌으며, 라보아제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1775년 그는 왕립화약국의 과학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거주지를 빠리 화약고에 마련된 실험실로 옮겨서 더욱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 프랑스혁명이 몰고온 변화

과학자로서의 라보아제의 명성이 높아가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프랑스는 서서히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싸이고 있었다.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던 성직자와 귀족에 대한 비판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인 앙트와네트의 무능과 사치에 대한 물만도 더욱 커져갔다.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계몽사조의 정신을 습득한 젊은 정치가, 사상가들은 백성을 상대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촉구했다.

1789년은 라보아제가 지금까지의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근대 화학체계의 원리를 주장한 '화학의 원리'(Elements of Chemistry)출판한 해였다. 동시에 그 해는 빠리 시민들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고 왕정을 붕괴시킴으로써 인류역사상 자유민주주의의 첫발을 내딛은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해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처음에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시건에 대해 별로 놀라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라보아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프랑스혁명이 오히려 지금가지 잘못 유지되던 아카데미 체제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그 이전까지 담당했던 정부의 과학자문역할도 계속 수행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혁명정부의 가장 큰 과제였던 '미터법'(meter 法)의 개혁은 아카데미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라보아제를 비롯한 아카데미 과학자들이 간파하지 못한 사살이 있었다. 그것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빠리 과학아카데미라는 기구가 얼마나 나쁜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18세기를 통해 자라온 계몽사조는 인간의 근본적 평등을 주장했다. 계몽사조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은 아카데미 과학자들의 엘리트주의를 지배층의 특권의식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러한 비판자 가운데는 아카데미라는 과학자 단체에 대해 개인적인 적대감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꽤 끼어 있었다.

'마라'(Marat)라는 젊은 지식인은 과학과 정치에 모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뉴턴과학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 논문에서 열과 빛에 대한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함께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아카데미가 인정하길 기대했으나, 아카데미 과학자들이 그에게 던진 것은 형편없는 욕설과 사이비 과학자라는 별명뿐이었다. 혁명 이후 '마라'는 새 정부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다. 혁명후 그가 아카데미를 없애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였다.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프랑스혁명에 동조적이었지만, 아카데미가 지녔었던 특권은 혁명 이후 급속히 약화되었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제창됨에 따라 새로운 과학단체들이 연속해서 만들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새로운 과학단체를 만들려면 반드시 아카데미의 인준을 받아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또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잡지를 만드는 것 도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또한 아카데미를 통하지 않고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학회는 사람들에게 프랑스혁명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음에 반해 아카데미는 구체제인 왕정의 유산으로 인식되었다.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이런 좋지 못한 오해를 씻어버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 아카데미의 폐쇄와 라보아제의 비극

이러한 차에 아카데미에 대한 불만이 기술자, 장인으로부터 직접 표출되었다. 그들의 불만은 아카데미가 아직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기술자, 장인들이 아카데미로부터 특허권을 빼앗아오기 위해 노력하던 때에 라보아제와 아카데미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카데미 과학자들 가운데는 과학교육과 이를 수행하는 제도에 대해 관심이 깊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 인물은 당시 아카데미의 종신 서기를 맡고 있었던 '꽁도르세'였고, 라보아제도 이 교육개념이념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다. 이들은 1792년의 기존의 과학단체로서 아카데미가 수행했던 역할에 과학의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추가해서 새로운 과학단체인 '국민학회'(National Sociery)를 만들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의도는 순수했지만, 실제 결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장인과 기술자들은 아카데미 과학자들이 구체제에서 누렸던 특권을 다시 찾으려 한다고 명렬히 비난했다. 그때까지 아카데미에서 소외되었던 과학자들도 이 제안에 공격을 퍼부었다. 그해 12월 의회에서 열띤 토론 끝에 '국민학회'의 설립안이 부결되었다. 빠리 과학아카데미에 대한 공격은 성공을 거둔 셈이었지만, 라보아제 같은 과학자에게 이 사건은 뼈아픈 충격이었다.

1793년 보다 급진적인 쟈코뱅(Jacobin)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아카데미의 폐쇄는 시간문제였다. 라보아제는 아카데미의 재정서기로 일하고 있었고 미터법 개혁의 마무리 작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폐쇄를 막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했다.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탄원하는 그의 존재가 아카데미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새 정부의 눈에 좋게 보였을 리 없다.

라보아제는 1793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그가 속하지도 않은 한 위원회가 직무유기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다음해 5월8일 그는 사형선고받고 같은 날 단두대 위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것이 가장 뛰어난 화학자였던 라보아제가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던 과정의 전모이다(이것은 프랑스혁명의 쟈코뱅 공포정치의 해약으로도 종종 인용된다).

라보아제의 죽음을 놓고 나온 얘기는 빠리 아카데미 회원이자 해석역학의 완성자였던 라보아제의 동료, '라그량쥬'(Lagrange)의 슬픔에 찬 다음의 탄식이었다. "그의 목을 자르는 데에는 순간이면 족했지만, 이와 같은 과학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몇백년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8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역사·고고학
    • 정치외교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