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소련의 과학계, 특히 연구기관과 대학에 대한 총괄적인 보고서이다. 이 기사는 외국의 과학지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작성한 것. 소련과학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같아 전재한다.
오늘날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물결은 이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것이 되었다. 많은 신문 지면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기사는 낯설고 무관심했던 나라, 소련과 그 사회의 변화에 대해 우리들의 관심을 조심스럽게 자극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다.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과거로부터 전 세계인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마음을 열어놓으면서 소련의 개혁물결은 엄청난 파고로 전 세계인의 관심을 모아가고 있는 것이다.
개혁의 물결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은 오늘 소련이 당면해 있는 처지와 소련인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커다란 운동으로 소련사회에 자리잡아 나아가고 있다.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뒤이은 이 물결은 무엇보다도 경제개혁과 과학의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 소련경제가 소비재생산의 결핍 때문에 소련인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진단에 기초한 것이다. 소련인들은 경제개혁과 함께 과학이 사회발전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소련인들은 오늘날 그들의 과학이 가야할 길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한다.
과학의 대중화!
과거 제정러시아 시대부터 소련인들이 이룩해온 과학의 전통은 단단하다. '멘델레프'라는 한 천재를 낳게 했던 동력은 무엇보다도 소련에 있어 수학과 물리학의 전통이었다. 혁명 전부터 강고하게 형성되어온 소련과학의 역사가 무엇보다도 소련사회의 명백한 중심으로 자리잡히게 된 것은 아마도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부터이리라.
초라한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제정러시아를 타파하고 그들 조국의 길을 사회주의로 선택했던 러시아혁명 후, 그 혁명을 지키고 자신들의 새로운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소련국민의 동의와 함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나온다고 소련인들은 믿어왔다. 불과 70여년 사이에 이룩된 소련의 성장에서 과학의 공로는 분명 엄청났다. 그런, 아무리 훌륭한 것도 그것이 그 나라 국민의 생활상의 요구를 올바로 반영하고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련인들이 직면했던 현실은 소련인들에게 새로운 혁명을 가르쳐주었다.
'당신들의 삶을 살찌우는 과학이 되게 하라!'
소련인들은 말한다. 오늘 우리의 희생이 아니라, 우리의 풍요롭고 발전된 삶을 요구한다고.
이제 소련의 과학이 소련대중의 요구를 반영하고 충족시켜나갈 수 있도록, 소련 과학계는 거대한 변화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과학연구기관체계 및 고 에너지물리학을 비롯한 제반 기초과학의 육성과 소련과학의 저변을 이루는 대학의 연구자활 능력을 갖추기 위한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누구의 눈에도 소련의 과학개혁은 명백한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소련 아카데미
이제까지 알려져온 소련사회전반에 걸친 관료주의적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소련사회를 이끌어온 중추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소련의 거대한 과학연구체계이다.
현대 소련의 연구체계들을 이루고 있는 제반의 기구는 거의 국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연구원들이 오직 과학연구에 전력할 수 있도록, 제반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연구생활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이들 과학자들을 지원하고 그 활동을 보조한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서는 연구보조금을 받기 위한 싸움이라든지, 사무실을 마련하기 위해 당해야 하는 고통 등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것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지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실제로 이러한 국가요구에 부응하여 소련에 거주하는 과학인들은 많은 업적을 낳아왔다. 세계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린 데서부터 핵잠수함제작기술, 핵무기의 개발 등 실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온 것이다.
이처럼 국가계획에 의해 전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과학 연구활동을 관장하는 기구들의 체계는 한마디로 방대하다. 그 유명한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그를 받쳐주는 4천여개의 과학연구소, 그 산하의 수많은 실험실, 그리고 장래 소련대학의 성패를 가늠할 인재양성소로서 오늘날 소련과학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대학 과학부들로 피라밋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실로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소련 과학아카데미이다.
사회적 지위면에서, 아카데미의 회원이 정부의 장관에 필적한다는 사실은 소련내 아카데미의 지위와 역할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소련에서 아케데미의 영향력이 중대하게 된 것은 1933년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아카데미가 이전하면서 부터였다. 본격적으로 많은 아카데미회원들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부분, 가령 기간산업 등에 큰 공헌을 남기면서였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체르노빌 사건에서의 아카데미 부원장 '벨리카노프'의 역할처럼 국가의 중대사 해결에서나, 생명공학 발달에의 '오브치노코프'의 영향력, 평화를 위한 우주개발계획에 관여하는 'R.Z. 사그데프'(Sagdeev)연구소처럼 다방면에서 아카데미는 비중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2백50여개의 연구소와 20만명의 과학자로 구성되어 있는 아카데미는 가히 소련의 과학연구노력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다. 더우기 연구소의 명성과 회원의 개인적 영향력에 힘입어 소련과학전반과 고등교육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또한 아카데미는 뛰어난 학자들이 자신의 동료들을 선택하는 수단으로서 최적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현 과학아카데미의 전신인, '피터'대제에 의해 설립된 성피터스버그 아카데미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다. 아카데미는 설립당시부터 연구소의 대리자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현재의 아카데미는 농업아카데미, 의학아카데미까지 등까지 포함하여, 전 분야를 망라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공화국에서 독립되어 있는 연방의 14개 공화국들에는 각각의 과학아카데미가 있다.
한편 아카데미는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1958년, 시베리아분야를 독립시켜, 극동과 우랄분야를 새로이 탄생시켰다. 중요한 연구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레닌그라드 같은 중심지는 극동지부과 같은 독자적인 부속 단체를 보유하고 있다.
각각 연구소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지만, 실무는 일반적으로 '대(大) 아카데미'라 불리는 크고 작은 통합된 단위에 의해 수행된다. 여기서 대 아카데미는 과학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항을 조정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체제는 1982년, 아카데미가 소비에트정부로 하여금 세라믹 초대형 전도체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활력소였다. 그러면 아카데미는 어떻게 정부의 관심을 유도했는가. 우선 아카데미는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수준 높은 연구소들이나, 대학, 공립연구소에 연구기금을 주도록 권유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점차, 소련정부의 관심이 기울여지면서 이 일은 활기를 띠고 진행되었다. 과학국 부국장 '아놀드 로마노프'에 따르면, 이 새로운 계획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이와 같은 제안은 다른 분야에서도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연구소의 관리체계
한편, 아카데미의 연구소 관리는 상당히 복잡하다. 아카데미는 17개 부로 조직되어 있으며, 각 부는 아카데미 간사가 책임자로 있다. 아카데미 간사는 관련연구소 업무를 관장하는 일이나 특별주제를 보고하는 과학위원회를 조직하는 일 등을 맡는다. 과학위원회는 아카데미의 부원장 및 17명의 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원장과 간사가 매주 1회 만나는 '아카데미 프래디슘'(praedisium)을 구성한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하나 내지 몇 개의 부들에 소속된다. 그들은 거기서 연구소장 같은 중요 직책을 담당할 사람들을 '임명'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카데미는 각료회의 산하기구이며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동시에, 과학기술 국가위원회의 관장 아래 그 일과 미래계획들을 실행한다. 과학기술 국가위원회가 하나의 공장이라면, 아카데미의 업무와 미래계획들은 생산원료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소련의 건설의 일꾼으로 기능해온, 이 거대하고 대단히 체계적으로 보이는 아카데미에도 운영방식에 있어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조심스러운 변화가 진행중이다. 이제까지 소련과학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거대하고 복잡한 체계가 과학자들과 연구원들에게 주는 연구 행정상의 복잡함이나, 이로부터 발생하는 연구원들의 연구소내 안주, 연구의욕의 저하이었다. 따라서 관료화된 행정구조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과학분야에 있어 아카데미와 연구소 운영의 개혁에 집중된다. 연구소의 책임자 및 연구소 실험실의 장까지도 선거의 절차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선거법 시안은 소련정부의 '민주화'(democra iza ion) 계획에 의해서 고무되어 왔고 모든 연구기관에서 토의대상이 되어 왔다.
시안에 의하면, 5년마다 책임자와 실험실의 장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전까지 아카데미 특별부가 임명했었던 연구소 소장은 이제 관련분야 종사자들이 선출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험실장들 또한 실험실 관련분야 종사자들이 선출한다는 것이다. 그런, 선출권을 갖는 관련분야 스탶진 전원이 선거권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과학분야에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제한할 것인지 명백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연구기관을 공식적으로 관장하는 과학협의회의 몇몇 회원은 그 기관의 스탶 전원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연구소 책임자를 연구소 스탶들이 아니라 아카데미의 특별부가 선출해야 한다고 반대안을 내놓고 있다.
이와 함께 아카데미는 공무원에게는 공식적인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소련정부의 조처를 따르려 하고 있다. 그 예로 1987년초, 아카데미는 상임간부의 정년을 75세로 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법은 1990년까지는 시행되지 못할 것 같다. 그외 젊은 회원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12월에 있은 아카데미신임회원 선거에서는 회원사망에 따른 공석보다 더 많은 의석을 채워 정년을 초과한 회원을 제외하고도 2백50명 정도를 선출할 예정으로 실시되었다.
개혁은 연구기관의 자활능력보유와 자활운영방침에서도 보여진다.
아카데미는 산하의 몇몇 연구소에 상업적 계획에 참가할 자유를 허용 했다고 말한다(레닌그라드에 있는 실행연구소와 같은 기관들). 이것은 생산부서나 사기업과의 계약에 의해, 국제적 판로를 개척할 수 있는 연구기관들이 자활하기를 바라는 정부의 권고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현 아카데미원장 '마르추크'(G.Z.Marchuk)는 그러한 처지에 있는 아카데미연구기관은 거의 없고 정부는 기본 연구에 대한 지속적 원조를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못 박는다. 어쨌든 이러한 변화는 최근 몇 년 동안 이루어져온 변화보다 더 많은 것을 수반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과학연구소들
소련 연구소는 소련과학에서 뗄 수 없는 단위이다. 그 수는 현재 약 4천개를 넘는다. 연구소는 엄격한 규율로써 운영되는데, 연구소의 책임자는 아카데미의 특별 부서에 의해 선출되며, 반드시 프래디슘(praedisium)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책임자는 사망하였거나 연구소 운영 능력에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때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카데미 연구소의 모든 임용이 그렇듯이 책임자는 5년에 한번씩 재임용된다. 이것은 무능력하거나, 의욕적이지 않는 책임자들과 고위인사들을 떠밀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너무 형식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연구소 내부운용에 있어서 책임자는,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과학협의회와 함께 일을 한다. 기술적으로, 협의회는 책임자나 아카데미에 조언한다. 또, 책임자들이 자원배치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협의회의 자문을 구하는 정도는 연구소마다 확대되어 가는 것 같다. 몇몇 연구소에는 연구학위 심사를 관장하는 제2 과학협의회를 가지고 있다. 때때로, 과학협의회와 책임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해 많은 논쟁을 벌이지만, 대부분 자체적으로 조정, 처리되고 있다. 이렇게, 제반의 사무가 책임자를 정점으로 하는 연구소 집행부에 의해 처리되고, 국가에 의해 연구원들의 생활과 연구소 운영에 관련된 제반의 것을 지원받는다는 사실은 소련연구소의 연구활동을 드높이는 조건이 되고 있지만, 이에 따르는 부작용 또한 심각하다. 복잡한 체계 때문에 생겨나는 연구인가신청서의 서류 작성과 인가과정의 복잡함에 대한 연구소내 실험실 연구원들의 불만과, 안정된 생활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주저앉는 경향이 그것이다.
연구소의 활동은 가히 소련과학의 젖줄을 이루고 있다. 혁명 초기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주지하고, 연구체계들의 상호긴밀한 활동관계를 강조해온 데 따라, 소련내 연구소들은 연구활동에 주력할 뿐만 아니라, 소련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교육의 실질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구소의 고위층 사람들은 또한 대학책임자로 임명되어 직접, 중요한 교과과정을 맡기도 한다.
소련의 대학들
1986년말 선출된 소련 아카데미 원장 '마르추크'는 소련과학체계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인터뷰에서 소련과학계에 대한 그의 의견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연구현장의 활성화와 연구활동을 촉진하고 개혁하는 일은 전적으로 아카데미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에 덧붙여, 그는 산업이 연구결과에 대해 보다 높은 관심을 가질 때만 연구풍토는 변하므로, 무엇보다도 아카데미의 방계조직이 번성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자리에서 마르추크는 대학을 연구소의 '하위'에 위치짓는, 연구소의 일반적 견해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대학간부가 연구기관 종사자들에 필적하는 자격을 갖추고 있을 뿐더러 대학은 소련과학의 밑거름으로서 자체의 연구능력과 독자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 역시 잊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소련의 대학이 겪고 있는 가장 어려운 점은 대학이 자체 연구 실험시설과 체계를 가지지 못한 점이라고 한다. 과학과 기술의 주된 사용자인 생산 부(部)들이 전 비용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은 오늘날까지도 스스로 연구할 준비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추크의 견해에서 오늘, 소련대학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소련대학의 양과 질은 대단하다. 그것은 소련 중등교육이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대학문을 들어서고 나가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마디로 소련의 고등교육은 거대하다. 대학인구는 소련의 전체를 통틀어 5백만에 달하고, 해마다 백만명의 신입생을 모집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년 국가에서 실시하는 입학·졸업 시험을 치러야 한다. 몇몇 대학들은 자체적으로 응시자를 모집하는 입학시험을 치른다. 소련에서 고등학교 졸업자가 대학, 연구기관 등을 통틀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비율은 20%를 밑돈다. 치열한 경쟁의 관문을 뚫고 대학문을 들어서면, 5년간의 수료과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교육하는 기관은 총8백96개이다. 5년간의 교육과정 중 처음 3년은 해당 교육기관의 울타리내에서 보내고, 이 과정을 수료하면 다른 종류의 기관으로 가서 남은 2년을 보낸다.
대학을 졸업하면 대부분 그들의 교과과정과 연관을 가졌던 연구소가 그들을 맞이한다. 본격적인 연구단계로 접어드는 이 과정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그간의 교육과정과 지원분야의 전문지식에 대한 심사이다. 대부분의 연구단계는 연구소의 과학위원회가 심사한다. 예외적으로 대학이 특별한 분야에서 자체 연구를 실행해온 경우, 대학은 이 연구단계를 직접적으로 심사할 권한을 갖는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은 많은 분야에서 자체 심사권을 가지고 있다. 연구단계의 심사는 꽤 엄격한 과정을 거치는데 수련(PhD)단계와 박사학위(DSCS) 단계는 논문을 심사한다.
이때 심사당국은 지원자들이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논문사본을 돌리도록 조치한다. 논문사본을 받는 사람들은 논문에 비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할 자격이 주어져 있는데, 이에 대해 응시자는 비판적 견해에 관한 자기의견을 표명해야 한다.
■레닌그라드대학
아름다운 '네바' 강이 흐르고 있는 러시아혁명의 요람지 레닌그라드에는 학문적 업적과 대학 자체의 연구수용능력, 활발한 학문교류로 국제적 명성이 드높은 레닌그라드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2만명의 학생이 내일의 소련을 향해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레닌그라드 대학은 현재 외국의 15개 대학과 러시아어코스에서 학생교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대학과는 수학 및 자연과학분야에서 매해 15명의 학자와 학생들을 교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대학의 장점은 소련 대학들 가운데 대학내부연구에 뛰어나다는 점에 있다.
레닌그라드 대학이 내부 연구를 착수한 것은 1920년대로, 현재는 9개의 연구소가 자체 가동중에 있다. 그 유명한 모스크바 국립대학이 3개의 연구소 밖에 없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레닌그라드대학이 자체 연구수용능력을 자랑으로 여길 만하다. 연구소는 외부 연구소가 하는 것처럼 치밀하게, 교육에 관하여 주의를 기울였다. 학생들은 3학년말이 되면, 이들 연구소 중 하나에 참여해서 졸업할 때까지 조사원으로 일한다. 연구업무의 규모는 대단히 커서, 거의 2천명 가량이 연구소에 고용되어 있다.
이중 40%는 대학간부진들인데 그 중에서도 4백64명은 엄격한 심사를 거친 교수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카데미 산하 연구소와 같이 충분한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지 못한 실정인 이들 연구소의 업적에 대해 몇몇 이론(異論)이 있다.
■노보시비르스크 특별학교
노보시비르스크 특별학교는 수학과 물리학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특수교육시키는, 소위 소련의 엘리트 교육 정책에 입각하여 설립되었다. 소련에는 노보시비르스크 특별학교 외에도 이런 특수학교가 11개나 있다.
총 5백50명의 재학생들은 모두 각 지방 및 민족단위의 수학과 물리학 '경시대회'를 통해 선별된, 우랄에서 동부에 이르는 소비에트 전지역의 과학 엘리트들이다.
학교 연구과장이고 물리학자인 '미하일 라브렌티에프' 박사는 과학분야의 소수정예로서 선발된 이들은 시험의 운도 많이 개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학교는 숙박시설이 완전히 갖추어져, 전 교과과정을 학교내에서 소화하게 되는데, 고등학교과정을 마치고 1~2년을 이수하는 최종학교이다. 경시대회에서 불리한 여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선발 여학생 수는 정해져 있다고 한다. 특수 학교 커리큘럼은 고등학교 과정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즉 커리큘럼은 학생들이 이수과목의 기초를 다지는 데 촛점이 맞춰져 있다.
■노보시비르스크 대학
노보시비르스크 대학은 물리학·수학 계통의 특별학교와, 졸업생을 고용하는 연구소를 같이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대학의 특징이라 할 만한 것은 교육과정이 기초과목 위주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물리학 수강생의 경우 교과과정의 1/3가량이 수학에 할당되어 있으며, 3학년까지는 실험시간이 1백60시간 정도로서 상대적으로 적게 할당되어 있다.
특히 물리학 과정이 엄격, 매해 2백20명의 졸업예정자 중 1백40명 정도밖에 졸업을 못하는 실정이다. 진급을 못하는 학생들도 많아서 매해 15~20명 가량의 학생을 다른 곳으로부터 받아들인다.
4~5년의 학문연구기간 동안 학생들은 매해 1백가지 종류의 코스를 각각 평균 64시간 이수해야 한다. '디칸스키'(Dikansky) 교수의 말에 따르면, 학생들은 수업시간 외에도 교과과정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이의 대가는 4년 후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물리학 관계의 15분야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노보시비르스크 대학은 순수물리학 분야보다 응용물리학에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디칸스키 교수는 최근 몇년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넓히기 위해 생물물리학 교과과정을 만들자는 주장을 계속해 오고 있다. 물론 이 교수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른 대학들처럼 노보시비르스크 대학 역시 중도탈락학생들 사이에서 만연되어 있는 과학에 대한 관심의 감퇴현상에 포용성 있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다시금 대학에의 관심이 증대될 것이라는 믿음을 항상 가지고 대해오고 있다.
■이르쿠츠크대학
'이르쿠츠크' 대학 부총장 '빅토르 이사예프'는 학교가 무엇이 가장 자랑스러운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도서관, 컴퓨터 센터, 과학교육의 순서로 대답했다.
이르쿠츠크 대학은 현대 소련에서 기묘한 역사를 갖고 있다. 17세기를 전후하여 이르쿠츠크는 중국과 함께 전통적으로 번성한 상업도시였다. 1917년 혁명 직후에 '레닌'은 그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도시에 대학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는 반혁명의 온상이 돼버려 반란은 1921년까지 진압되지 못했다. 대학은 바로 이 정치적 공백기간 중에 설립되었다.
사실상 이르쿠츠크 대학은 역사학 분야, 특히 동양연구와 문헌학에서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 또 이르쿠츠크 대학 졸업자 중 대(大)아카데미의 객원회원이 25명이나 된다. 솔직히 이르쿠츠크는 훌륭한 지방대학이다. 동부 시베리아에서 과학과 수학에서 가능성 있는 최고의 학생들은 이미 노보시비르스크의 특별학교에 의해 걸러지고, 그곳 대학에 입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처럼, 이르쿠츠크는 과학·수학과 학생모집에는 과거보다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최근에는 법학, 신문학, 역사학 연구에서 우수함을 자랑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학술도시-아카뎀고로독
소련인들의 과학에 대한 열정과 혼신의 노력은 아카데미의 명성과 연구소의 엄청난 연구와 대학교육, 대학에 대한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아카데미 지구를 둘러본 사람이면, 오늘날 소련과학이 있기까지의 무엇이 그 충실한 자양분이었나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연구원들로 가득찬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노보시비르스크의 '아카뎀고로독'(아카데미 지구)은 시베리아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의 북쪽 35㎞에 자리잡은, 특수목적 도시로서는 소련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학술도시이다.
1957년에 설립된 아카데미 도시는 시베리아개척과 개발을 목적으로 한 '크루체프'정책의 초기시대의 기념물이다. 크루체프 정책은 아직 실행중에 있지만, 그토록 열정적이던 크루체프가 했던 것보다는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다.
아카뎀고로독은 이제 주요한 과학·기술 중심지가 되었다. 수십 개의 학술연구소는 차치하고라도 이 도시는 아카데미의 시베리아 분야의 사령탑 역할을 한다. 그리고 몇몇 생산부들과 농업 아카데미 연구소, 의학 아카데미 연구소가 있다. 연구소는 약 1백여개로서, 7만명의 사람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10년전만 해도, 아카뎀고로독은 빌딩가와 상점들이 즐비한, 적어도 산업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 비교하면 목가적으로 보였다. 지금도 이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제 아카뎀고로독은 과학기관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소련 교육의 센터로서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연구소의 많은 사람들은 시베리아 학생들의 과학과 수학분야의 특별학교나 시내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한다. 연구소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카뎀고로독은 생활의 전부가 되고 있다. 특별학교에서, 대학으로, 연구소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일상사로 된 것이다. 그러나 생활이 단조롭고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외로운 전략촌은 언제부터인가 어린아이들의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 많은 아카뎀고로독 출생자들은 그들 부모들처럼 과학자의 꿈을 키우기 보다는 다른 장래를 위해 도시를 떠나는 것이다.
아카뎀고로독과 외부와의 교류는 활발하다. 특히 고 에너지물리학 분야의 경우, 국제회의 참석차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타처나 외국에서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노령의 중후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연구소 스탭들은 무척 나이가 많은 편이다. 관리들은 30년전 개발초기에 비해 연구소의 종사자의 순환속도가 매우 떨어지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다. 어쨌든 이곳 사람들은 조국 소련의 건설을 위해 오지의 시베리아 벌판에 이주하여 살면서, 이 고립이 주는 외로움과 고통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겨운 희생에도 불구하고 삶의 고립은 분명 견디기 어려운 것이리라.
그러면, 저 유명한 아카뎀고로독은 성공적 정책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서는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시베리아의 과학도시 노보시비르스크가 실질적인 지적 중심지로 성장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수학과 핵물리학 연구소들은 연구측면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한편 경제학과 산업기계 연구소는 자력으로 운영이 가능하며, 1966~1985년까지 연구소 책임자를 역임한 A.G.아간베기얀(Aganbegyan)은 경제모형분야의 권위자로서, 최근에는 소비에트 5개년 계획에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교육중심지로서 아카뎀고로독은 명성을 얻고 있다. 대학과 그 졸업생들은 소련사회 어디에서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에 대한 집중적 연구의 경제적 영향력을 가늠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노모시비르스크에서 수행되는 대부분의 산업은 실행단계에 있다. 특히 지구물리학상의 조사와 광석처리영역은 소비에트산업에서 이 분야들이 상당한 발전에 이르렀을 정도로 훌륭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이 전략촌에서 이루어진 훌륭한 과학적 성과들은 인재의 배출과 함께 오늘의 소련 산업과 과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오랜 시간과 열정으로 품위와 연륜을 쌓아가고 있는 이 도시는 명실공히 소련과학의 요람으로서 자리잡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에너지 물리학
아카데미에서 대학,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시베리아까지, 오늘 소련 사회의 중추인 과학은 전 국토와 인재, 자원을 망라하여 방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방대함이 얼마나 탄탄한 토대위에 세워질 것인가는 소련의 기초과학분야에 투하되는 노력과 그 연구성과의 활용에 달려 있을 것이다.
1986년 7월17일, 소련정부는 초대형 전도 3000GeV의 양자 가속장치를 설치하는데 약 10억 루블의 기금을 제공하겠다고 공표했다. 그 이후, 소련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은 상당한 호조를 보이고 있다. 마침내 양자 가속장치로 인해 3TeV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양자들 사이의 충돌을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새로운 기계에 대한 탐색작업으로부터 먼 미래에 대한 세밀한 준비까지를 총괄함으로써 연구소의 경영은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단선지하철도를 부설한 직경 5m의 터널은 총길이 21km중 수 km가 이미 굴착되었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새로 충원된 초과노동력을 수용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조국 러시아를 생각하면서 눈물짓게 한,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경치가 수려했던 이 지역 대부분이 소택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개발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고에너지 물리학과 과학의 다른 분야에 있어서 투자의 상대적 이익에 관해 서구에서는 논의될 법한 것이 아무런 논쟁도 없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고에너지 물리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중앙위원회는 연구소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기초과학이 중요하다는 점과 고에너지물리학은 특히 근간을 이루는 학문이며, 대형 기계류는 기술발달의 자극제이기도 하려니와 국제적 합작을 유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점들이다. 작년 7월의 결정은 예상 외로 많은 자금이 요구되는 주요 프로젝트에 대해 소련당국은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보여준 일례이다.
미국에서는 결정이 아직 유보돼 있는가 하면, 영국은 제네바에 있는 유럽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소 CERN의 유임된 회원자격에 대해 꽁무니를 빼려고 하는 실정으로 미루어볼 때, 모스크바 남쪽 90km에 위치한 '세르푸코프'의 이 계획은 고무적이지 않을 수 없다.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소가 원자력사용을 위한 국가위원회 산하에 있는 것이 도움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계획은 야심적이었지만, 신중하고 조심성있는 기술에 근거하고 있다. 마침내 순환터널은 3개의 가속장치를 수용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자금사정상, 이중 두 개, 즉 400GeV짜리 가속기와 초대형 전도자석을 갖춘 3TeV기계를 만들 예정이다.
연구소는 5년 후, 제2의 초대형 전도가속장치의 설치를 다시 정부에 의뢰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이 전략의 현명함을 믿지는 않지만, 관심과 지원은 대단하다.
노보시비르스크 핵물리학 연구소에 근무하는 니콜라이 디칸스키 교수는 세르푸코프를 방문하기 위해서 캘리포니아 여행을 중단했다. 그의 방문 목적은 계획자들에게 제1고리에 있는 양자뿐 아니라 반(反)양자도 가속화시키는 전자 냉각 기술을 적용하면, 제2초대형 전도고리가 설치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연구소 부 책임자인 '빅토르 야르바'(Victor. A. Yarba)교수는 이 논의는 세르푸코프에 이미 알려진 방식대로 기계를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논의는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 고에너지 물리학에서조차 5년이란 긴 시간인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기존의 70GeV 양자 가속장치는 진공실을 대치하고 작동중인 진공관을 축소시키며 분자급수기를 바꿈으로써 8초 사이클(주파)마다 양자의 수를 5배 증가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각 다발은 6×${10}^{4}$의 양자를 포함한다.) 그다음 이 기계에서 나오는 양자다발은 커다란 터널에 있는 온열고리로 공급되어 400에서 600GeV 사이로 가속화된다. 가속된 양자는 다시 초대형전도고리로 옮겨져서 3TeV까지 가속화된다.
모든 가속장치와 마찬가지로 꽉 채워진 각 고리는 사용할 양자다발을, 수시간 이상 보존하는 저장기능을 할 수 있다. 입자들간의 충돌은 양자다발들을 적절히 추출하거나, 길이 250m가량의 전자 자석을 이용하여 양자회로를 돌림으로써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조정과정은 새 기계가 설치될 예정인 1993년 당시의 기계 설계자들에게는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현재 사람들은 각 6m길이의 초대형전도자기의 생산에 더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초대형전도자기 생산에는 여러가지 난관이 있다. 가령 이 생산을 착수하려면, 7백여명의 숙련 노동자들이 필요한데, 이들과 이들 가족을 수용할 시설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1963년, 연구소가 설립된 이래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은 3만명으로 늘어났는데(그 중 1/3이 어린이들이다), 이들의 기본생활을 연구소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문제는 외지 연구소에서 온 파견근무자들로 인해 한층 더 복잡해졌다. '두브나'에 있는 핵 연구소(사회주의 국가들 협회에 의해 운영되는 국제연구소)는 세르푸코프에서 비임(beam)시간의 약 30%쯤 사용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파견된 사람들 역시 이 지역에서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련 산업의 자극제로서의 세르푸코프의 역할을 규정짓는 것은 무척 어렵다. 초대형 전도 고리가 작동될 예정인 1993년까지 그 연구소는 한시간에 3만리터의 액체 헬륨을 생산해내는 소련에서 제일 큰 저울공장을 경영하게 될 것이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전자물리학 기계분야의 '에프레모프'연구소는 그다지 전문화되지 못한 온열자석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전자산업과 더 직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연구소 존재의 가장 지속적이며, 적어도 확실한 부산물은 이 연구소가 맺고 있는 국제적인 연계일 것이다. 현재 이 연계망은 확대일로에 있다. '싸끌레이'로부터 온 프랑스인 그룹은 세르푸코프를 방문한 최초의 그룹이다. 그 이후로 CERN이나 미국의 그룹들과 50회에 걸친 공동연구가 있었다. 1987년 9월, 연구소는 새 기계를 위해 계획된 실험에 대해 토론한 공동연구회를 일주일간 열었다. 이 공동연구의 이면에는, 건설합자를 시도할 수 있는 유망한 파트너들의 관심을 유도하겠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다. 주최측은 이 공동연구회에 일본 대표들까지도 참여했다는 것을 하나의 성과로 여겼다. 사회주의블럭 협회에 의해서 운영되는 국제조직인 두브나(Dubna)도 타국가들을 끌어들이는 한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확대일로에 있는 국제적인 연계망의 성공여부는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기계를 계획된 시간내에 설비 할 수 있는 능력보유에 달려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상징 바이칼호
이제까지 우리는 베일에 싸여 있었던 소련과학계를 찾아 그 신비의 베일을 벗겨보았다.
이러한 소련의 과학은 그 역사적 전통과 함께 오늘의 소련정부의 과학지원정책이 그 주요한 디딤돌이 되고 있지만, 그 주요구성분은 무엇보다도 과학영재들의 연구활동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베리아의 거대한 대지, 그곳에 묻혀 있는 과학적 소재들은 오늘의 소련과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불모의 땅으로 치부되었던 동토, 시베리아는 수많은 산업자원과 과학적 소재가 숨겨져 있는 소련 산업과 과학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남부에 위치한 바이칼호는 어쩌면 소비에트 계획의 상징이랄 수 있을 만큼, 그 장쾌함을 자랑하고 있다. 내해로 통하는 유일한 유출구가 있는 지점에서 60km 떨어진, 이르쿠츠크에 있는 앙가라강의 전망은 바이칼의 규모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앙가라강은 강폭이 1km이상이 되며, 양기슭을 오가는 나룻배에게 곤란을 줄 정도로 흐름속도가 빠르다.
바이칼호는 거대하다.
시계(視界) 넓은 9월 말 맑은 날에 서쪽 기슭에 서 있으면, 동쪽 기슭에 솟아 있는 바위더미의 봉우리가 보인다. 그러나 아주 맑은 날에도 안개에 가려진 기슭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바이칼호는 앙가라강의 유출구에서도 지름이 20여km나 뻗어 있다. 물론 이보다 더 넓은 곳도 있다. 한편 바이칼호의 길이와 수심은 더 수수께끼이다. 호수로서 세계 최대규모인 바이칼호는 길이가 700여km, 수심이 1,640m에 달한다. 바이칼호는 세계 민물의 1/3~1/4 가량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앙가라강의 평균유속으로 호수의 물이 4백년에 한번 빌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엄청나다.
이르쿠츠크의 호소학연구소 책임자로 새로 임명된 '미하일 그라쳬프'박사에 따르면, 생물학자들의 관심은 아마도 훨씬 예리해질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이르쿠츠크대학에서 연구중인 바이칼호에 서식하는 어린 바다표범은 '어떻게 바다 포유동물이 내륙의 민물호수에 적응하게 되었을까'라는 문제를 제기케 한다. 호수에는 1천6백m의 수압에 적응된 해저서식 어류와 열대지방 해양에서 익히 볼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해면 동물류를 포함해서 약 2천5백종의 토착종이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서는 호수의 신비함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가까이 가보면 훨씬 새롭게 느껴진다.
앙가라강 오른쪽 강둑을 구비치며 난, 이르쿠츠크에서 오는 길은 먼저 암층으로부터 백m 높이의 곳에 이른다. 그런데 이곳 암층 위의 호수는 비어 있다. 1km를 더가면 러시아식 통나무집들과 일요일 저녁이면 마을 아낙들로 반쯤 차는 그리스정교회가 있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호수 가길은 1km 가량 더 지나서, 조사연구 배 몇척이 정박해 있는 선창에서 끝난다. 그곳 너머에는,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한 빛깔로 물드는 호수가를 깍아지른 낭떠러지 밖에 없다.
호수는 바이칼호 주변의 교통로 구실도 한다.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보트나 범선을 이용하며, 겨울에는 썰매나 스키를 이용한다. 선창에서 북쪽으로 수km정도 가면, 이르쿠츠크 천체물리학 연구소가 관장하는, 수백m 높이의 꼭대기에 설치된 태양망원경이 있다. 그곳에서 20km 북쪽으로 가면, 이르쿠츠크 대학 생물학부 소속의 연구소가 나온다.
바이칼의 수질은 바이칼호로 하여금 현시대의 전설을 낳게 한다. 호수 가장 자리 깊이 5m나 되는 곳에 있는 조약돌이 보인다면, 물이 얼마나 맑은지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라쳬프 그룹은, 훗날 측량기준으로 될 수 있는 베이스 라인을 설정하기 위하여, 구할 수 있는(혹은 만들 수 있는)한 가장 고감도 기구를 사용할 계획이다. 물의 순도는 제지·펄프산업부가 10여년 전에 남서쪽 기슭에 두 개의 제지-펄프공장(하나는 지류쪽에, 다른 하나는 호수에)을 세우기로 결정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후 부터 조심스럽게 염려의 소리가 일고 있다. 일례로, 최근 '페터 카피쨔'는 두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하루 2십만㎥의 부산물이 종국에 가서는 호수를 오염시킬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들을 지지했다. 2년전 제지·펄프산업부는 서부러시아로부터 노동력이 충원되어 가구를 생산할 때까지 시한부로 두 공장을 휴업한다는 데 동의했다. 어떤 이는 유출처리를 정교화시킴으로써 펄프공장의 오염가능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두 공장에서 사용하는 클로로리그닌을 소각할때 형성된 이산화물로 인해 수질은 상당히 손상된 상태이다.
바이칼호의 전설은 환경보호에 대한 소련의 여론, 특히 지식인의 여론에 전환점을 준다.
환경보전이라는 평화적 목적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이 운동은 합법적 차원에서 브레즈네프 시대의 지적 파산에 대한 우회적 항의의 일환을 이루었음을 필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운동에 많은 이들의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우리의 세계적 유산' '우리의 대중적 문제'에 대해 호소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들은, 대기를 오염시키는 교외 공장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시베리아에서 새 출발을
시베리아 유형이 불운이라면, 시베리아 자원근무는 어리석은 처사이어야 한다. 과연 그러할까? '미하일 그라쳬프' 박사는 이르쿠츠크의 호소학 연구소장으로서, 산악지대와 동부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평원에 있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국에 근무하고 있다.
그라쳬프는 20명의 동료들을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동쪽으로 이주했다. 그는 시민 아파트에서 동료들 10명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외에도 노보시비르스크에는 시베리아로 갈 채비를 다 해놓은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그라쳬프 외 수많은 과학자들이 시베리아에서 왕성한 연구의욕과 활동을 보이며, 소련과학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이르쿠츠크는 대학과 호텔이 각각 하나씩 있는, 인구 1백만의 전형적인 소련의 도시이다. 이 고도(古都)를 흐르는 강 너머에 아카뎀고로독이 있다. 그곳은 그라쳬프가 호소학 연구소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아카데미의 시베리아 본과에서 온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바이칼호가 학술연구 프로그램의 중심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실제로, 그라쳬프와 그의 동료들의 바이칼호로부터 파생하는 관심과 연구는 지대하다. 생물학자인 그라쳬프는 발전도상에 있는 소비에트 기계사용산업을 위해 많은 공장을 준비하는 동안, 이미 수생 미생물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핵심멤버들을 모았는가 하면, 바이칼호 연구에 응용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기계설계자 그룹을 만들었다.
그의 동료 중 한 사람인 '세르게이 쿠츠민'은 이중광선 분광 광도계를 붙인 유동 색층분석기를 개발했다. 이 색층분석기는 서구에서 이용되고 있는 유사한 기계들 보다도 더 경제적인, 정제된 용제를 사용한다고 한다.
한편 그라쳬프는 바이칼호의 종(種)의 진화역사에 기술을 적용시키는 데 열성적인 분자 생태학자를 찾고 있다. 그라쳬프는 바이칼호가 소비에트 영역으로 국한되기에는 너무나 흥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이칼호에 대해 국제적인 관심이 모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선 서구 생물학자들이 바이칼호를 답사하고, 이들과 바이칼호에 대해 공동연구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이로부터 서구과학과 탄탄한 연계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 같다.
그외 그라쳬프는 이르쿠츠크 대학에 대해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
" 우리는 더 많이 가르쳐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머지 않아, 그라쳬프의 의욕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물론 벅찬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새로운 팀의 활력을 북돋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다른 많은 시베리아 개척자들처럼 그라쳬프의 모험은 소련과학자들에게 귀감을 되고 있다.
불과 백여년전만 해도 후진 농업국이었던 이 나라의 오늘의 있기까지 소련인들이 걸어왔던 과학적 발자취는 그라쳬프를 위시한 수많은 과학자들의 용맹과 연구정신, 시베리아 개척을 필두로 한 연구노력 바로 그 자체가 이루어 놓은 것이리라.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많은 부분이 오늘의 소련과학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이 전 국토, 전 분야, 전 국민의 생활로 파급되고 있는 오늘, 그 무수한 과학의 인적, 물적 자원을 무기로한 소련과학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움직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개척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