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통의 연구소에 노조가 설립되면서 제기된 문제점들의 실상
정부출연연구소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KAIST와 대덕연구단지내의 각 연구소들은 그동안 쌓여왔던 갖가지 문제점들이 노동조합의 섭립과 더불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연구소 내외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과학기술계통의 정부출연연구소는 석·박사급의 엘리트들이 집결한 대표적인 두뇌집단인만큼 외부세계에는 '선택된 과학자'들쯤으로 비쳐져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원들 스스로가 평가하는 연구소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비민주적 풍토와 저임금 차별대우 등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노동조합이 금년초에 실시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연구소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총응답자 4백명중 불과 0.6~2.8%만이 이 연구소는 '모범적' '합리적' '민주적'아라고 대답했을 뿐 대부분(66.5%~72.2%)이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이라고 평가했다. 또 '현재 월급에 대한 만족도'에서는 51.2%~98.9%가 불만족스럽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자신의 생활수준'을 묻는 설문에서는 연구원급의 47.5%가 저소득층, 3.9%가 빈곤층, 46.3%가 중산층이라고 대답해 대체적으로 중하위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설문결과는 선임연구원급 기능급으로 구분돼 집계되었음).
이같은 설문결과는 안정된 연구분위기에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꽤 거리가 있는 셈이다. 정부출연연구소의 황승욱연구원(노조부위원장)은 "올해 연구소에서 공채를 실시해 69명을 새로 뽑았는데 서울출신 지망생이 거의 없었다.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온 우수인력들이 국책연구소를 기피하는 대신 민간기업연구소나 공사쪽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루 빨리 연구소의 문제점들이 해결돼야만 젊은 과학기술자들로부터 매력있는 직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대체 어떤 문제점들이 있기에 국책연구소가 많은 연구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과학기술계통의 정부출연연구소(이하 연구소로 호칭)의 속사정을 살펴보자.
연구소의 관료적 분위기
연구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무엇보다도 '관료적 분위기'가 연구소를 지배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연구소의 관료적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연구과제선정 및 실험기기도입의 경우, 연구프로젝트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실제 연구업무를 수행하게 될 연구원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으며, 실험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기계장치나 실험기기도 일일이 정부에 보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프로젝트가 연구원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위에서 떨어지다보니 자신의 전공과 동떨어지는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얘기다.
연구소의 제반 운영방향에도 연구원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창구가 전무한 실정이며 일방적인 지시만 내려올 뿐이라는 것이다. 많은 연구원들은 자율성을 바탕으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연구소에서조차 관료사회의 경직된 풍토가 지배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앞서 예로 든 전자통신연구소의 설문을 구체적으로 보면 연구소가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이다'고 답한 비율이 선임연구원급 65.3%, 연구원급 66.5%, 기능급 72.2%로서 박사급의 선임연구원이나 석사급의 연구원들은 물론 기능직까지도 연구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연구소의 관료화는 정부(과학기술처)로부터 예산을 배정받고, 연구소장 등 간부진이 임명받는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로 지적된다. KAIST의 경우 전직·현직 소장이 장관출신이며 전직 소장은 육사출신, 장관급이 KAIST원장을 맡는게 한편으로는 KAIST의 비중을 높게 본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으나 그보다는 연구원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사람이 연구소 살림을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들이 우세하다.
연구소내의 수직적인 조직계층, 보직의 문제 등도 관료풍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자통신연구소 통신정보기술연구단 구만녕선임연구원의 지적을 들어보다
"하향적 운영관리 측면만을 치중한 결과, 연구소라는 특수한 조직체의 자율적이고 활발한 연구분위기 조성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과감하게 수직된 조직체계에서 수평적 조직체계로 구조적인 변화를 단행해야 한다. 자율성이 상실된 관리중심의 '지시-보고' 조직형태로 전락될 수 있다.
또 연구소라는 특수한 집단에서 대표적인 구조적 문제점의 하나가 보직에 대한 집착이다. 젊고 유능한 박사학위 소지자가 보직을 맡음으로써, 오로지 행정업무중심의 관리자 역할로 전락되는 현상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크나큰 손실이다."
해외박사우대 풍토와 계약제
박사와 석사들이 대거 밀집해 있는 연구소에서는 이들을 어떤 인사제도로서 합리적인 관리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에 연구원들은 강력히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마디로 박사우대, 더 정확히는 해외유치박사우대풍토가 문제의 핵심이다. 연구소에서는 '골품제도'라는 은어로 비유되고 있기도 하다.
KAIST노조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조재환씨는 "연구소내의 인사에 있어 해외박사에 비해 국내박사는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또 무조건 박사학위를 중요시한 결과 석사학위를 갖고 연구경력을 쌓아 선임연구원이 될 수 있는 호봉에 도달해도 박사가 아니면 진급이 안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석사급 연구원들은 장래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연구소를 자기 직장 내지 평생직장으로 보지 않고 유학 떠날 때까지의 대기소쯤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실제의 연구업적이나 학술잡지에 실린 논문으로 연구자를 평가하는 풍토가 아쉽다고 말하고 있다.
석사급 연구원들이 연구소를 잠시 머무는 곳쯤으로 여기는 까닭에 이직률이 높다는 것인데, 이는 다시 연구프로젝트의 연속성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국내과학기술의 축적이 어려워진다는 얘기가 된다. 해외에 유학가서 박사학위는 따오지만 국내에서 과학기술의 기초가 축적되지 않고 있는 게 오늘날의 실정이라는 것.
국내의 과학기술전문인력도 대접받는 풍토가 되어야 하며, 이제는 한국의 기술인력도 반드시 외국에 나가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양성해야 할 때라는 주장들이 많다. 아라미드 펄프의 개발이 순수 국내박사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국내의 연구인력에도 우수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국에서는 "우수인력의 유치를 위해서 해외박사 초빙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사문제와 관련해서 '계약제, 역시 연구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폐해를 지적하는 대표적인 문제점이다.
'노비문서'라는 말로 풍자되는 계약제란 과기처산하 정부출신연구소의 연구원(선임 및 책임연구원 포함)으로 들어올 때 2년간 계약을 하며,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다시 계약을 연장해야만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한마디로 연구원들의 신분이 제도적으로 불안정하게 돼있는 셈이다.
KAIST의 한 연구원은 "계약제가 외국에서는 더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하기 위해 생긴 제도인데 국내에서는 소속부서장의 개인적 판단에 따란 연구원들의 실직이 가능한 일종의 압력수단처럼 돼버린 느낌이다. 잘리지 않기 위해 연구를 열심히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계약제가 초래한 부정적 현상의 하나가 주인의식의 결여다. 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책임연구원들조차 "우리는 나그네다" "여기 주인이 어디 있는가"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고 보면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일반 연구원들의 주인의식 부재는 이해할만하다. "연구소에는 5년 이상 있으면 최고참급에 속할 것"이라는게 KAIST 연구원의 말이다.
KAIST 노조위원장 이인우씨가 한때 해고당했다가 노조측의 강력한 실력행사끝에 복직된 적이 있는데, 당시 해고사유도 계약기간만료에 따른 재임용거부였다. 이는 계약제가 노조활동탄압 등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선례여서 앞으로 두고두고 불씨가 될 전망이다.
석사초임, 기본급 29만6천원+수당
별정직이라는 연구소 특유의 가(假) T.O.제도 역시 연구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별정직의 연구원은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전문가가 연구소내에 없을 때 외부에서 위촉, 단기간에 걸쳐 연구토록 하는 게 원래의 취지.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에서 필요한 만큼의 연구원을 증원시켜 주지 않아 일종의 편법으로 별정직을 채용한다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경비는 프로젝트예산으로 충당하게 되므로 실제연구비용은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별정직의 보다 큰 문제점은 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고 처우가 불리하다는 것. KAIST노조에서는 전체 평연구원 약 6백명가운데 30% 정도가 위촉연구원(별정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급 이외에는 별다른 대접을 못받고 있으며 신분보장도 취약한 실정인데, 자신이 정식 연구원인 줄로 알고 근무하는 경우마저 있다는 것이다.
부서에 따라서는 별정직의 숫자와 정규 연구원의 숫자가 맞먹는 곳도 있다는 것이고 보면 본래의 취지와는 동떨어지게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인원동결에서 비롯된 이같은 현상에 대해 '연구소가 자율적으로 필요한 예산·인사를 결정치 못하고 정보출연연구기관준칙에 일률적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진단이다.
고학력자가 고임금을 받는 게 현재 우리나라 임금구조임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소의 임금실태를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타직종에 근무하는 같은 학력자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지고 있다. 전체 연구원의 반 가량 되는 석사급 연구원의 봉급수준이 민간기업체 석사학위소지자의 60%쯤 될 것이라는 게 당사자들의 주장이다.
대학원을 졸업, 석사학위를 받고 3년전 전자통신연구소에 들어온 H씨의 경우, 연봉으로 따져 약 7백만원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H씨는 만약 다른 회사에 갔더라면 최소한 3백만원은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석사학위를 갖고 KAIST에 들어가면 4호봉을 부여받는데, 기본급 29만6천원에 수당 4만원, 능률제고수당 13만원이 월급의 전부이며 연간 4백%의 보너스가 기본급기순으로 지급된다. 1년에 1호봉씩 승급을 하나 금액으로는 불과 1만3천원이 오를 뿐이므로 석사급 연구원은 초임은 물론, 경력이 쌓일수록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게 된다는 주장이다. 대부분 박사들인 선임연구원은 비슷한 경력이라 할 대학의 조교수에 미치지 못하며, 정교수와 비교되는 책임연구원 역시 뒤떨어지는 봉급을 받고 있어 전반적으로 연구원들이 비슷한 학력·경력의 일반기업체 혹은 대학에 재직하는 연구두뇌에 비해 푸대접받고 있는 셈이다. 앞서 인용한 전자통신연구소의 설문조사중 '월급에 대한 만족도'를 직급별로 분석해보면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이 연구원 5.9%, 선임연구원 37.5%이며 '불만족스럽다'는 연구원 90.2%, 선임연구원 51.2%로 나타났으며 기능직은 거의 1백%가 불만족을 표시했다. 이같은 설문결과는 연구원뿐 아니라 상위직이라 할 선임연구원들도 월급에 적지 않은 불만을 표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표, '임금의 적정수준이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라는 설문에서는 '공사·대기업보다 많아야 한다'는 대답이 77.4%(연구원)과 66.7%(선임연구원)을 차지했으며, '공사·대기업과 같은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한 비율이 각각 22.6%와 33.3%로 나타났다. 결국 1백%가 연구소의 임금이 공사나 대기업보다 최소한 같거나 상회해야 한다고 답하고 있어 현실과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연구원과 유리된 프로젝트선정
연구원들에 있어서 근로조건이나 임금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게 있다면 연구활동을 통해 국가나 사회에 기여하고 진리탐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연구활동에의 매진만큼 연구자에게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연구원들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된다. 일방적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연구를 수행할 따름이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단절없이 연구해야만 탁월한 업적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공과 동떨어진 연구업무가 주어지면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연구프로젝트는 국책과제, 정부·기업 공동프로젝트, 기업프로젝트, 기초프로젝트 등으로 구분된다. 이중에서 특히 기업프로젝트는 항상 예산이 부족한 연구소측이 로비를 해서라도 따와야 한다는 것. 이런 일을 전담하는 사람이 바로 책임연구원이다. '영업활동'이라고 빗대어 말하는 '프로젝트 따오기'를 잘하는 책임연구원이야말로 아랫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유능한 간부인 셈이다.
책임연구원이 프로젝트를 따올 때 평연구원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연구원들의 토론을 거쳐 프로젝트를 따올만큼 여유있는 입장이 아니며, 연구소의 관료적 분위기가 그런 과정을 용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프로젝트의 결정과정이 비민주적이다보니 '과연 누구를 위한 연구인가'라는 회의를 느낀다는 연구원도 있다.
"요즘 첨단과학을 부르짖고 있는데, 물론 일부 첨단기술의 개발성공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기초과학이 더욱 중요시돼야 할 때라고 본다. 첨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일반국민들에게 환상만을 심어줄 수도 있다. 국민대중에게 필요한 것보다는 정부에서 원하는 연구만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KAIST의 한 연구원은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다.
5공화국 통폐합조치의 후유증
제5공화국 초기에 있었던 일련의 통폐합조치가 오늘날 지적되고 있는 제반 문제점들을 잉태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연구소들이 통폐합된 결과, 연구소가 비대화·관료화됐으며 정부간섭이 심해져 자율성이 침해받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소는 예산의 80~90%를 정부로부터 보조받고 있어 구조적으로 자율성을 지니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금년도의 정부출연액수는 KAIST가 3백38억원으로 가장 많으며 에너지연구소 2백83억원, 동력자원연구소 1백99억원, 화학연구소 75억원, 전자통신연구소 1백50억원, 기계연구소 1백18억원 등인데 당국으로부터 철저히 예산사용을 통제받고 있다는 것이다.
돈줄을 쥔 정부로부터 엄격한 통제하여 놓여 있는 것과 함께 물리적인 통폐합조치로 인해 야기된 구성원 상호간의 벽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KAIST의 경우 1966년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1971년 설립된 한국과학원이 81년 1월 통폐합, 오늘날의 한국과학기술원이 되면서 각각 연구부와 학사부를 이루었다.
그러나 연구와 교육으로 서로 기능이 다른 두 기관을 하나로 합친 데 대해 비판의 소리가 높다. 통폐합후 행정기구가 비대해졌는가 하면, 책임연구원급의 이직이 많았다는 지적도 있다. KAIST노조측은 이같은 문제점을 들어 연구부와 학사부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노조, 연구소 위상정립과 처우개선을 추진
지금까지 살펴본 정부출연연구소의 문제점은 작년말부터 최근 사이에 설립된 노동조합을 통해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들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 문제가 안될 수도 있고 또 해결하는 방향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노조가 생각하는 문제해결의 방향은 어떤 것일까.
참고로 과학기술계통 연구소의 노조설립현황을 살펴보면 87년12월4일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노조가 결성된 이래 12월9일 KAIST, 12월 22일 화학연구소가 잇따라 노조를 결성했다. 금년에 들어와서는 1월에 해양연구소, 4월에 유전공학센터와 인삼연초연구소, 5월에 동력자원연구소와 에너지연구소, 6월에 시스템공학센터 등의 순서로 노조가 생겨났다.
이들 연구소 노조는 KAIST와 전자통신연구소 등이 우여곡절끝에 단체협약을 체결했으나 아직도 확고한 뿌리는 내렸다고 보기에는 힘든 상태. 정부가 실질적인 운영권자이고 보니 일반 기업체의 노사관계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즉, 연구소장 등 간부진이 1백% 사용자로서의 권한이 없기 때문에 단체교섭이 그만큼 난항을 겪게 된다는 얘기다.
아뭏든 노조측은 연구소내의 제반 문제점을 개선해보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연구소의 '위상정립'을 일차적인 과제로 꼽고 있다. 동력자원연구소의 김은일노조위원장은 "장기적인 과학기술정책이 과연 있는 것인가. 연구소의 기능재정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근복적인 연구소의 진로정립에 일반 연구원들의 견해가 폭넓게 반영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자통신연구소노동조합 황승욱부위원장도 역시 위상정립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소가 수행해야 할 연구방향이 무엇인지를 당국도 모르는 것 같다. 매년 제로베이스(zero base)로 연구예산을 책정하고 있어 장기적인 대책이 불가능하다"며 대덕연구단지내 연구소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확고한 위상의 정립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계약제의 폐지나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개선도 연구소의 위상정립문제와 함께 중요시되는 개선요구사항. 전자통신연구소는 소규(所規)를 개정해 실질적으로 연구원계약제를 폐지키로 했으며 KAIST는 능률제고수당 가족수당 등을 신설키로 했다. 이밖에도 연구소 운영에 연구원들의 참여폭이 확대되는가 하면 근무환경개선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합의사항이 정부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가 하면 박사와 비박사간의 차별대우시정 등은 여전히 문제거리로 남아 있다.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예측불허
한편, 정부측은 연구소노조측의 주장에 강경하게 대응할 태세여서 만만치 않은 앞날이 예상된다. 지난 6월27일 열린 긴급경제장관회의헤서 나웅배부총리는 "운영·인건비 등 일체가 국민세금인 정부예산으로 유지되고 있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노조가 설립목적을 무시한 채 인사권 간여, 단일호봉제 주장, 연구테마선정 등 부당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것은 정부로서 수용하기 힘들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정부출연연구기관 노조의 불법부당한 요구가 계속되고 단체행동이나 파업사태가 확대될 경우에는 정부의 연구활동예산체제를 전면 재조정, 출연액수의 감축과 연구기관의 기능축소 등을 적극 검토하고 대신 대학부설연구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부의 강경방침이 천명된 이후 노조활동이 활발한 연구소에는 예산동결조치를 통해 실질적인 삭감을 단행하고, 노조가 없는 연구소나 유명무실한 연구소는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내용의 정부안이 비공식적으로 입수됐다는 게 노조측의 주장이다.
정부출연연구소가 앓고 있는 진통에 대해 많은 과학기술인들은 과학입국을 지향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연구활동이 위축되지 않는 방향으로 합리적인 개선책이 도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박사노조위원장 김은일씨 다수 연구원들의 의견에 따라야 연구소의 제위치 찾기가 시급
박사와 노조위원장-어울릴것 같지 않은 두가지 직함을 보유한 사람이 있다. 동력자원연구소의 노조위원장이자 태양열연구실의 박사인 김은일씨(34). 최근 과학기술분야의 정부출연연구소에 잇따라 노조가 결성되고 있으나 박사가 위원장을 맡은 최초의 경우여서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아직 노조사무실이 마련되지 않아 연구실로 찾아가 만나보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해 학술논문을 작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박사가 노조위원장을 맡았다고 해서 관심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어떤 생각에서 노조를 이끌게 됐읍니까?
"그동안 노조결성을 위한 산발적인 움직임이 있어왔으나 그때마다 와해되곤 했어요. 그러던중 기능직이 중심이 돼 규약을 만드는 등 준비를 하면서 저희 연구원들을 찾아왔어요. 그래서 평소 노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동료들과 함께 논의한 결과, 우리가 창구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과학기술자의 노동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일반 노동현장의 그것과는 강조점이 약간 다르다고 봅니다. 당순히 빵을 더 얻겠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만족을 느껴야 하겠다는 겁니다."
-연구하랴, 노조일 보랴 매우 바쁠 것 같은데요. 하루일과는 어떻습니까
"아직은 노조없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노조조직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차례 점심시간이나 퇴근후에 노조일을 처리하고 있읍니다. 사무실이 마련되면 반(半)전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구라는 게 중간에 손을 떼면 연속성에 큰 문제가 생기므로 걱정이 되긴 합니다."
1976년 항공대학 항공기계공학과를 졸업, 79년에 KIST 태양에너지연구소에 들어간 김박사는 82년 7월 프랑스 빠리로 유학을 갔다. 빠리7대학 고체물리학부에서 '건물에서의 에너지해석을 위한 기초이론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뒤 4년만인 86년 8월 귀국, 동력자원연구소 태양에너지파트에 근무중이다.
-요즘 연구소마다 진통을 겪고 있는데요. 프랑스에서 경험한 연구소의 분위기는 어떻든가요?
"제가 빠리에 있는 동안 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 산하의 선형가속연구소에서도 근무를 했읍니다만, 한마디로 출퇴근 등 연구생활이 철저히 연구필요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또 청소에서부터 각종 행정처리까지를 연구팀의 리더가 다 해주기 때문에 일반 연구자들은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인상적이었읍니다."
-연구소의 박사우대풍토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박사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부를 더 하겠다는 욕구때문에 박사학위까지 땄읍니다만, 한편으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현실도 무실할 수 없었읍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학위소지여부가 큰 문제가 안되더군요."
-앞으로 연구소노조의 활동이 잘 돼나갈 것 같습니까.
"일개 노조가 당국의 발상을 뒤집어놓기는 힘드는 게 사실입니다.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어야겠읍니다. 저희가 나름대로 일해나가면 국민도, 언론도, 정부도 이해하고 따라와줄 것입니다. 저는 연구소노조를 노사대립관계에서보다는 한배를 탄 입장에서 연구실무자로서의 정당한 발언권을 행사한다는 측면으로 보고 있읍니다."
-순서가 바뀌었읍니다만, 노조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역시 연구소가 제자리를 찾아야겠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게 고려된 문제였어요. 물론 불만족스런 임금이나 복지문제도 중요합니다만…. 최근에 정부출연연구소의 기능재정립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것도 타율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연구소의 주인인 다수의 연구원들이 자율적으로 연구소를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