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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먼저?」의 논쟁 "내가 이룩한 것을 가로채려 하다니…


누가먼저?의 논쟁


위대한 과학적 업적이 거의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면 누구에게 최초의 발견자라는 명예가 돌아갈까? 판정내리기 무척 어렵다. 뉴턴 다윈 등 대과학자들에게도 치열하고 치사하게 보인 우선권 다툼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논쟁의 결과 과학의 발전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1950년대 DNA분자구조의 해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했던 과학적 경쟁의 이면을 기술한'이중나선(Double Helix)'이라는 책이 있다. 이책이 1967년 노벨상 수상자 왓트슨(J.D.Watson)에 의해 출판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매우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이 책에는 DNA구조의 해결과 발견에 있어서 우선권을 획득하려는 당대 일류 과학자들의 공명심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 따라서 고고하게만 상상되던 과학자상(像)에 큰 회의를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아뭏든 '이중나선'은 과학적 발견에서 우선권이란 어떤 것이며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를 아주 잘 보여준 것이었다.

과학사를 더듬어 보면 과학적 발견에서 우선권은 매우 중요한 권리임을 알게 된다. 때로는 우선권을 획득하기 위해 논쟁이나 다툼으로까지 치닫는 것도 볼 수 있다. 과학적 발견에서 우선권의 문제는 근대 이후로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사실 옛날에는 자신의 결과를 타인에게 알릴 수단이 변변치 못했으므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해도 그것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이것을 비밀로 하는 경향이 더 많았다. 많은 의사들이나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비법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다. 비법을 독점함으로써 이득이 계속되기를 바랐던 탓이다. 그래서 특별히 어려운 전문용어로 비법의 노출을 방어하여 왔다.

그러나 인쇄 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자신의 생각이나 발견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려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실은 비밀로 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오히려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다는 것이 영예로 여겨지게 되었다.

차츰 발견의 우선권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더욱이 왕립학회같은 초기의 과학단체들은 우선권에 대한 인정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자신의 발견이나 업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우선권이 보장되기를 원했다.

우선권의 보장은 많은 과학자들을 자극, 과학의 발전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우선권의 문제가 과학자들간의 갈등이나 다툼을 유발시킨 적도 있다. 이런 논쟁은 매우 빈번히 일어났고, 그 증거로 독일에서는 우선권다툼(Prioritätsstreit) 이라는 새로운 단어까지 창출되었다.

●- 뉴턴과 라이프니쯔의 미적분학 타이틀전, 결국 무승부로

가장 치열하고도 집요했으며 한편으론 비열하기조차 했던 우선권의 논쟁은 근대과학의 영웅뉴턴(Issac Newton)과 관련되어 있다.

뉴턴은 말년에 자신이 이룩한 과학적 발견들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했다. 즉 다른 과학자와의 우선권 다툼으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싸움은 후크(Robert Hooke)와의 일전이었다. 이 논쟁은 후크가'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제1권을 발표했을 때, 그 기본 개념이 뉴턴 자신의 것을 표절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일어났다.

뉴턴은 격노해서 당장 자신의 필사본에서 후크의 저서로부터 인용된 부분을 삭제해 버렸다. 또 '원리'의 제3권(행성의 운동법칙을 해결한 뉴턴의 책)을 출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학회 회원들을 위협했다. 그후 그는 17년간 후크를 부단히 괴롭히며 적대시 했다. 1703년 후크가 죽을 때까지 뉴턴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그의 또 다른 책 '광학'의 출판을 거부하였고 학회 회장직의 수락을 거부하는 등 후크에 대한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시하였다.

물론 후크의 내용이 뉴턴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뉴턴의 이런 과민한 모습은 이후로도 쉽게 발견된다. 자신에게 대응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싸움과 보복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중 매우 극적이고도 집요했던 것을 소개한다. 미적분학(Calculus)의 발견을 둘러싸고 벌어진 독일의 당대 제1의 학자 라리프니쯔(Gottfried Wilhelm von Leibniz)와의 싸움이었다.

뉴턴의 상대자 라이프니쯔 역시 근대의 가장 심원한 철학자이며 과학자의 한사람이었다. 미적분학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속도와 변화율을 계산하는 획기적인 수학의 발견이었다. 그러기에 당대 석학 두사람의 논쟁도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서로 공개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자신의 우선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왕립학회라는 공식기구를 등에 업은 뉴턴이 이내 대세를 잡았다. 뉴턴은 학회장으로서 라이프니쯔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우선권을 입증하기 위해 '각국 신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전부 뉴턴 측근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위원회의 비평과 보고서를 뉴턴 자신이 익명으로 쓰고 있었다. 둘 사이의 결정적인 대결은 라이프니쯔가 자신을 비난한 존 킬(Jone keill)을 제소하면서 일어났다.

우선권 분쟁을 위임받은 왕립학회는 '소위원회'를 구성했고 1712년 공식적인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킬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인정했고 이 기회를 이용, 뉴턴의 우선권을 방어하려고 시도했다,. 결국 '소위원회'는 라이프니쯔가 영국발(發) 편지를 이용해 뉴턴의 방법을 복사했다고 결론지었다. 즉 표절의 기회가 서신교환을 통해 발생했다고 단정, 라이프니쯔를 정죄하였으며 대신 뉴턴에게 '첫 발견자'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후일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미적분학의 발견은 공동의 영예로 돌려졌다. 하지만 뉴턴은 당시의 승리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715년 왕립학회의 공식회지인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1ㆍ2월호 전부에 라이프니쯔를 반대하고 정죄하는 논술만 게재, 공식학회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버렸다.

그러고도 그는 만족하지 안았다. 왕립학회의 특별회의를 소집, 각국 외교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승리를 공표하고 라이프니쯔를 비난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라이프니쯔의 베를린학회는 이에 필적할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1716년 라이프니쯔가 죽을 때까지 뉴턴의 공세는 지속되었고 승리는 뉴턴에게 돌아가는듯 했다.

그러나 역사는 라이프니쯔에게 부분적 승리를 되돌려 주었다. 그가 죽은 후 수학에서는 그가 제안한 부호(dx, dy 그리고 summa의 첫 글자를 ∫로 쓰는 등)를 채택했고 적분학(calculus integralis) 이라는 말을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 다윈과 월러스가 진화론을 나누어 가져

사건추이가 이와 비슷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르게 난 우선권 논쟁이 있다. 이는 우리가 '진화론'으로 알고 있는 개념이 얻어질 때 일어났다.


진화론의 대표적 주창자로 널리 알려진 다윈(Charles Darwin)은 명문 과학자 집안 사람이었다. 또 그 자신도 위대한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다윈은 23세때 측량선 비글(Beagle)호의 지구일주항해에 선상(船上) 자연학자로 동행하게 된다. 비글호의 긴 여행에서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진화에 대한 생각을 굳히고, 진화를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찾고 있었다.

그는 동물 사육가들이 동물을 길들여서 개의 변종이나 집비둘기같은 변종들을 만들어 냄을 주시했다. 여기서 그는 인공적인 선택이 인공적인 적응을 얻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이렇게 적응된 것들을 계속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 자연에서는 이러한 선택이나 적응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그 해답을 계속 찾던 중 다윈은 1838년 10월 맬더스(Malthus)의 인구론을 읽고 위대한 힌트를 얻었다. 존재에 유리한 변화들은 보존되고 불리한 것들은 소멸된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같은 유리한 변화의 보존과 불리한 변화의 거부가 곧 진화의 메커니즘이라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은 채 몇개의 산만한 수필(essay)식으로 가볍게 적어놓고 있었다. 1856년 다윈은 당대의 위대한 지질학자였던 라이엘(Lyell)에게 자연선택이론에 대해 토의했다. 그러자 라이엘은 우선권을 위해 연구결과를 빨리 출판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의 견해는 아직 출판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설명하면서 '나는우선권 때문에 발표하는 것을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2년후 1858년 6월 18일은 다위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날이 되었다. 월러스(Alfred Russel Wallace)라는 35세의 젊은 자연학자로부터 한통의 논문이 우송되어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논문에서 월러스는 진화에 대해 다윈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이미 진화에 대한 생각은 널리 퍼져 있었고, 그도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고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다윈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다윈은 처음에는 매우 겸손하게 자신의 우선권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대응했다. 허나 곧 극심한 혼란과 비통에 빠졌다. 그는 라이엘에게 며칠동안 계속해서 심한 정신적 갈등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다윈은 자신의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커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토로했다. 편지를 받은 라이엘은 곧 린네학회(Linnean Society)를소집, 다윈의 자연선택에 관한 발췌본(에세이로부터)과 월러스의 것을 비교 검토했다.

학회는 누구에게 우선권을 부여할 생각은 없으며 중요한 것은 과학적 발견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같은 정신을 담은 서문을 첨부한 채 다윈과 월러스의 공동명의로 논문을 출판시켰다. 다윈은 부랴부랴 8개월만에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 다음 해에 책으로 내었다. 그것이 유명한'종의기원(Origin of Species)'이었다.

이 책에서 보여지듯이 다윈은 탁월하고 매우 비범한 학자였다. 월러스도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분명 다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독립적으로 '야생동물의 삶도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개념을 얻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에는 복수(複数)발견이나 동시(同時)발견에서 흔히 보여지는 우선권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윈은 대중적인 관심을 얻은데 만족했다. 월러스는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이 중요함을 보인 주창자로서 만족해했다. 이례적으로 평화로운 결론이었다.

●- 동시발견이 단독발견보다 더 전형적이다

우리는 이 우선권의 문제를 어떻게 볼것인가? 우선권의 문제는 과학적 발견이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동시발견'이나 '복수발견'과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이러한 발견의 형태는 과학이 큰 속도로 발전하게 되는 근대에 오면서 매우 흔한 경우가 되어버렸다.

어떤 과학사회학자는 과학상의 발전에 있어서 단독발견보다는 오히려 여러 사람에 의한 동시발견이 더 전형적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만큼 어떤 과학법칙이나 이론의 발전에 있어 주위 환경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얘기다. 또한 이는 과학발전이 당시의 시대적 조류와 부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발견과 우선권 논쟁의 다른 예들을 들어보자. 갈릴레오는 자신의 업적인 망원경의 이용이나 목성위성의 발견을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우선권을 주장한다고 논박하였다. 한편 우리는 기체의 압력과 부피와의 관계를 밝힌 업적을 보일(Boyle)에게 부여하고 이를 보일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직도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마이오트(Mariotte)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물이 원소가 아니고 화합물이라는 사실은 당대의 세 저명한 과학자를 논쟁장으로 이끌었다. 헨리 카벤디쉬(Henty Cavendish)냐, 와트(Watt)냐, 라보아지에(Lavoisier)냐? 천문학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해왕성의 위치를 예언한 사람을 정하는 일이었다. 애덤스(John Couch Adams)냐, 르베리에(Urban Jean Le Verrier)냐?

의학에서 천연두접종은 제너(Jenner)와 피어슨(Pearson)과 라바우트(Rabaut) 중 누가 처음이냐? 수학에서도 라플라스(Laplace)나 베르누이(Bernoullis)르장드르(Legendre) 가우스(Gauss) 코오시(Cauchy)등 이 우선권 논쟁에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사회학의 창시자를 놓고 콩트(Comte)와 생시몽(St-Simon)의 후계자들 사이의 논쟁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동시발견과 우선권 다툼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세기 말, '에너지 보존법칙'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이었다. 최초 발견의 영예를 얻기 위해 무려 12명의 과학자가 발벗고 나섰던 것. 여기에는 메이어(Mayer), 줄(Joule), 콜딩(Colding), 헬름홀츠(Helmholtz), 카놋(Carnot), 세퀸(Séguin), 홀츠만(Holtzman), 헌(Hirn), 모어(Mohr), 그로브(Grove), 패러데이(Faraday), 리비히(Liebig) 등 쟁쟁한 학자들이 연루돼 있다.

●- 우선권 논쟁, 차츰 열기 식어

동시발견이나 복수발견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려면 과학의 발전, 과학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우선권의 문제 이면(裏面)에서 보여지는 과학자들간의 비열하기까지한 모습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인가?

'이중나선'의 출판 후 런던 타임즈를 비롯한 많은 매체들의 반응은 다음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과학자들도 결국엔 역시 인간이다(Scientists are human after all).

그러나 이 말의 액면그대로 과학자의 우선권다툼을 개별 과학자들의 이기심이나 경쟁심으로 돌려 버릴 것인가? 그것은 각각의 과학자들에 대해 더 깊이 연구되어보아야 할 일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월러스는 벌써 예외가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하야 할 것은 과학발전의 속성이라는 측면이다.

과학은 그 속성상 새로운 이론이나 새로운 현상들의 발견을 통해서 진보한다. 또 그러한 내용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공유되었을 때 진보는 가속화된다. 그리고 진보의 댓가로 과학자들에게 우선권이라는 이름으로 명예를 지불되어진다. 그러므로 우선권은 매우 영예로운 것이며,이 정당한 댓가에 의해 과학은 한층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과학이 사회내에서 제도적으로 정착되었고 또 하나의 직업으로 된 현대에 있어서는 정당한 댓가는 필수적이다. 또한 자신의 진로나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치하고 있다. 이러한 댓가의 가장 찬란한 예가 현재 모든 과학자들을 사로잡는 '노벨상'이다.

다만 유념해야할 일은 위대한 과학적 진보는 개인의 천재성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큰 업적이 나올 수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연구풍토의 조성, 전체적인 연구수준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한 개인의 영예일 뿐만아니라 한 나라의 과학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한편 현대에 있어서 우선권의 문제는 과거보다 훨씬 쉬워졌다. 각종 과학잡지등에 공식적으로 게재되거나 각종 학회등을 통한 공식 발표에 의해 우선권이 부여된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직접적이고 소모적인 우선권 다툼은 일어안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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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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