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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만으로 쌓은 신전을 중심으로 고도의 도시 문명을 이룩하고 독특한 문자를 사용했던 마야문명의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미국 카네기 연구소팀이 발굴한 「코판」유적의 구기경기장. 구기는 마야인에게 있어 종교적으로 중요한 으미가 있는 것이었다.

마야문명은 세계의 여러 고대문명 중에서도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기원이나 사회의 형태, 기괴한 문자, 돌연한 쇠퇴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수없이 많다. 최근에 와서 세계각국의 조사활동으로 그런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지난 84년 7월 '온두라스'의 라 엔트라다 지역에서 시작,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마야문명국제조사단(라 엔트라다 프로젝트)의 활동에서 밝혀진 내용을 기초로 마야문명을 살펴보자.

갑자기 멸망한 개성이 강한 문화

마야문명이란 어떤 문명이었을까. 마야문명은 중미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멕시코 남동부에서 벨리즈, 온두라스 서부, 엘살바도르 서부에까지 미치는 지역에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기원전 2000년경에서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선고전기(先古典基), 서기300년경부터 900년경까지의 고전기, 서기900년경부터 16세기 스페인 침입까지의 후 고전기이다.

선 고전기는 농경과 정주취락생활이 시작된 시기이다. 마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나온 정주취락의 흔적은 '벨리즈'의 '쿠엘리요' 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연대는 기원전 25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고 보고되어 있다. 그 뒤 거석인두상(巨石人頭像) 등으로 유명한 올메카문명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마야사회는 점점 발전되어 갔다. 이 선고전기 말기에 마야지역의 남부 고지대와 태평양 연안 일대에서는 계급분화가 상당히 진전된 사회가 발달해 있었다고 보이며 그뒤 마야문명 최대번성기의 예술양식이나 문자의 원형을 볼 수가있다.

이어 고전기에는 낮은 지대에서 마야문명의 최대번성기를 맞는다. 서기600년경까지의 고전기 전기에는 멕시코 분지 '테오티와칸'의 영향을 상당히 강하게 볼수 있고 그 뒤의 고전기 후기에는 보다 개성적인 마야문명의 꽃이 피었다. 이 시기에는 여러 도시도 생겨났다. 이렇게 번영을 자랑하던 마야문명도 기원800년을 지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많은 도시가 황폐해졌다. 어째서 그렇게 화려하던 문명이 돌연 멸망해간 것일까. 그것은 마야연구가 시작된 이래의 가장 큰 과제중 하나이다. 토지피폐에 의한 농업생산의 저하, 인구의 과잉, 악성전염병의 유행, 통상체계의 변화등 여러가지 원인이 거론되고 있으나 확실한 정설은 없다.

이 저지대 마야문명이 붕괴된 후의 후고전기에는 마야문명의 중심이 북부의 '유카탄'반도로 옮겨져 거기에 외부로 부터의 영향도 더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문화를 전개시킨다. 그러나 이것도 16세기에 스페인인들의 침공으로 무참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해독하기 어려운 마야문자

이러한 마야의 역사 속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고 세계 각국의 마야유적 조사활동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것은 고전기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이고전기의 문화사회에 대해 좀 더살펴보자. 이 무렵 번영했던 많은 도시에는 세습왕조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각 도시간에는 왕족간의 혈연관계가 맺어져 있는 곳도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도시간에 전쟁도 가끔 있었던것 같다.

이 시기에 각도시에 세워진 석비에 새겨재있는 것은 주로 왕과 그 일족에 대한 내용인것같다. 인물은 이마가 머리위까지 넓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있다. 마야인들은 그런 얼굴을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어릴 때에 머리를 널빤지 사이에 끼워 일부러 두개골 모양을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석비에는 그런 인물상 외에 일반적으로 마야문자가 새겨져 있다. 마야문자의 기괴함과 복잡함은 달리 그런 예를 찾아 볼수 없으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문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것을 해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 현재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수자나 역법(曆法)에 관한 문자등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마야인의 역체계(曆体系)는 2백60일을 1주기로하는 역과 3백65일을 1주기로 하는 역을 짜서 맞춘 '캘린더 라운드'라는 것과 어느 하나의 시점에서의 일수를 나타내는 장기력이라는 것 등이 있어 대단히 복잡하다.

석비에 새겨진 마야문자의 문장에는 거의가 역법이나 천문학에 관한 것만 쓰여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로 석비에는 왕의 즉위나 전쟁의 승리등에 관한 기록이 주로 새겨져 있음을 알수 있게 되었다. 또 특히 중요한 센터(정치 종교상의 중심)에는 문장문자(紋章文字)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마야사회를 해명하는데에서도 문자로부터의 정보는 대단히 중요해지고 있다.
 
마야문명 최대번성기의 대표적 유적인 「티카르」신전. 높이47m.

석기만으로 건조한 거대한 신전

마야종교의 신들은 천지창조의 신'이차무나', 비의 신 '차크', 옥수수의 신 '윰 카슈', 죽음의 신'윰 시미르'등 그수가 많으며 그 신들은 인간에게 이익을 줄수도, 해를 줄수도 있다고 믿어졌다. 그런 신에게 공물이나 피를 바치는 의식은 중요하며 때로는 인신희생도있었던 것 같다. 중요한 유적에서는 흔히 구기장(球技場)의 흔적을 볼수 있는데 구기도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 되어진다. 그 경기법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양쪽에서 서로 공을 밀어붙이면서 득점경쟁을 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주거는 주로 돌이나 흙을 쌓아올린 토대위에 지었다. 일반서민의 집은 나무나 풀로 엮어 만들었으나 지배층의 집은 석조가 많았다. 또 큰 도시의 중심부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신전이 세워졌다. 마야최대의 도시인 '티카르'의 4호 신전은 높이가 약70m나 되었다. 금속을 이용할줄 몰랐던 마야인은 이런 거대한 건조물을 석기만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신전 속에서는 비취등 아름다운 부장품이 있는 왕의 묘도 발견되었다.

이런 마야문명 연구중 1984년 7월부터 착수되었던 탐사작업인 라 엔트라다 프로젝트의 의미와 그 성과에 대해 살펴보자. 프로젝트는 온두라스의 북서부 라벤타 계곡과 플로리다 계곡이라는 두개의 인접한 계곡사이를 조사지역으로 하였으며 조사범위는 1백50㎢에 이르렀다. 이 조사팀의 이름은 이 지역의 중심마을인 '라 엔트라다'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이 두개의 계곡은 마야지역 중에서 가장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마아문명이 퍼져나간 경로와 다른문화와의 교류양상을 해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다. 또 라 엔트라다 가까이에는 '코판'과 '키리과'라는 두개의 중요한 센터가 있다. 그곳에서는 이미 대규모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 두쪽이 정치적으로 대립된 관계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라 엔트라다는 이 두 센터와 거의 등거리에 있어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를 알수 있는 주목되는 지역이다.

라 엔트라다의 여러 유적은 앞의 두센터와 비교하여 규모가 작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마야유적 조사는 대규모유적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중소규모의 유적이나 대유적에서 떨어진 지역의 조사가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사결과가 마야의 중소센터의 성격, 그리고 마야사회의 보다 전체적인 구조를 해명하는데 기여될 것이 기대되고 있다.

유적의 분포를 밝히다.

온두라스에는 12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의 건기와 그 이후의 우기와의 두계절밖에 없다. 고고학조사에서는 건기가 주요활동기인데 이 시기를 놓치면 개시부터 여러가지 나쁜 조건속에서 활동을 해야만 한다.

조사는 먼저 조사지역 답사와 주요한 유적의 측량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답사는 조사지역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걸어다니며 유적분포를 밝히고 유적의 연대, 성격등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측량을 통해 만들어진 지도는 그 뒤의 조사연구의 기초가 된다.

우기 동안에는 지면이 질척질척하고 풀도 무성하여 그런곳을 계속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곳을 무거운 측량기재를 멘 2명이 오토바이에 타고 유적까지 가다가 물구덩이에 굴러 온통 물에 젖은때도 있었다. 남쪽나라라지만 우기에는 기온이 내려가 비에 젖으면 추위를 견디기 힘들게된다. 그럴 때 농부의 아내가 끓여내준 뜨거운 커피는 마음까지 따뜻하게 녹여주는듯 했다. 이것은 조사원들이 털어놓은 얘기이다.

탐사조사대의 조사효율은 그렇게 훌륭한 것은 못되었지만 1984년 크리스마스 휴가가 시작되기 전에는 라 엔트라다 유적군의 개요가 거의 밝혀졌다. 그리고 이런 답사ㆍ측량으로 모은 기본적인 데이타 이외에 2가지의 중요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문자가 새겨진 그릇을 발견

하나는 어느 주민이 가지고 있던 토기류 수집품이다. 그는 탐사대가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유적 바로 옆에 살고 있었으며 그 집은 거의가 유적에서 파낸 돌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매일 잠을 자는 침대도 유적에서 나온 조각이 있는 돌로 만든 것이었다.

이 근방에서는 유적의 돌을 집이나 다른 건축에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개인의 집뿐만 아니라 라 엔트라다 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카톨릭교회까지도 유적의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지방사람들에게 유적의 중요성을 알게하여 그것을 보호하도록 하는것도 조사대의 중요한 임무중 하나이다.

그러나 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토기류의 훌륭함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집에서 가까운 '엘 아브라' 유적에서 파냈다고 했다. 코파도르, 구아르포파, 우르와라고 불리는 타이프의 다채색토기, 그리고 대리석과 앨러배스터(alabasterㆍ雪花石膏)제의 그릇등이 있었다. 이것들 중에서 코파도르와 구아르포파 다채색토기는 코판에서 흔히 볼수있는것이며 우르와 다채색토기, 대리석, 앨러배스터제 용기는 스라평원, 요호아호안등 마야문명권외라고 생각되는 지역의 전형적 유물이다. 이런것이 한데 있는것은 두 지역의 중간지역인 라 엔트라다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일 것이다.

더욱 흥미깊은 것은 두가지 문화요소의 융합을 볼수 있는 것이다. 스라평원과 요호아호안의 문화요소인 우르와 다채색 토기에 그려져 있는것은 마야 상인의신 '에크추아'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앨러배스터제 그릇은 역시 스라평원의 문화요소이지만 거기에는 마야의 전형적인 문화요소인 마야문자가 새겨져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앨러배스터제그릇은 코판에서 그 단편이 두조각 발견되었을뿐 이렇게 완전한 모양으로 출토된 것은 없었으며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 쓰여있는 마야문자를 알수있는 부분만이라도 읽어나가 보자(그림참조). 1, 2의 문자는 마야 역법에 관한 것이며 서기 775년에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13, 14, 15, 16의 문자는 코판의 16대째 왕 '야슈파크'의 이름과 그 서명이며 17, 18의 문자는 코판의 문장(紋章)문자와 그 서명인 것이다. 또 12의 문자는 혼인 관계를 나타내는 문자라고 알려져있다.
 
엘 아브라 유적에서 출토된 앨러배스터제 그릇에 새겨진 마야문자

그밖의 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못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코판과 이 유물의 출토지인 엘 아브라 사이에 견고한 유대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또 12의 문자가 혼인관계를 나타낸다면 코판의 왕 야슈파크의 아내의 한사람에 의하여 엘 아브라가 통치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물관을 만들 계획
 
라엔트라다 프로젝트의 조사지역

또 하나의 성과는 '로스 이고스' 유적의 석비류발견과 재발견이다. 금세기 전반, 미국의 '모레이'라는 고고학자가 이 유적을 찾아 그 석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석비는 그뒤 행방을 알수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조사팀이 그 석비를 재발견하고 또 새로이 사람 모습을 새긴것 같은 돌기둥을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석비는 상당히 파손된 상태로 재발견되었다. 도굴자가 위쪽부분을 잘라가 버린것 같다. 마야의 석비나 토기는 수집가들에게 상당히 비싼 값에 팔리기 때문이다. 모레이의 기록을 보면 서기 781년에 해당되는 날짜와 그 유적의 문장문자라고 생각되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음을 알수 있다.

85년 10월까지 조사지역 전체의 약 80%의 답사가 끝나고 4백75 유적이 확인 되었다. 이 수치는 이지역의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엘 아브라, 로스 이고스 유적은 이런것 중에서도 최대급의 유적이다. 그러나 그밖에도 이 지역 유일의 구기장이 있는 '론카도르' 유적과 높이 12m나 되는 피라밋이 있는 '엘 푸엔테'유적을 비롯한 규모와 중요성이 있는 다른 여러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이지역 사람들이 유적의 중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재 라 엔트라다에서는 마을의 예산으로 고고학박물관을 만들 계획이 진전되고 있다. 박물관이라지만 유적에서 나온 돌로 지어 지금까지 식당으로 쓰던 곳을 개조한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문화유산을 지키고 자손에게 전해주려고 한다는 것은 대단히 뜻이 있는 일일 것이다.

조사는 아직 시작된 단계일 뿐이고 지금까지 얻어진 것도 라 엔트라다에 풍부하게 잠들어있을 고고자료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더 계속될 발굴성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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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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