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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우유부단함, 용맹무쌍한 어느 시인이 처형되는 아픔, 갈릴레오에 대한 교단의 심판 등이 지동설이 확립되기까지 숨겨진 일화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가 자신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을 위하여 생산활동을 시작했을 때, 인류를 사로잡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운동하고 있고 어떤 원리로 이루어져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인류의 생산활동은 자연과 직접적으로 맞부딪치는 곳에서 시작됐다. 이때 자연은 인류에게 피해를 가져다주는 원망의 대상인가 하면, 때로는 도움을 주는 다정한 친구이면서 동시에 신비로운 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자연은 인류에게 그의 생존을 위해 자연에 대해 보다 많이, 정확히 알 것을 깨우쳐주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신비스러움을 따라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자리잡히기 전까지 이시대 사람들에게는 '상식의 세계'가 자연을 파악하는 주요한 측정기준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전(前)근대시대 우주에 대한 인류의 시각은 아주 단순했다. 그들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 가운데 하나는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지구는 둥글다. 또 태양은 틀림없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다."

이 순박한 '사실'이 당대의 과학, 고대노예제의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이 사실들은 어느새 노예제사회를 옹호하는 논리가 되기도 했다.

신의 대리자인 로마의 교향이 있는 지구는 당연히 천체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논리와 이를 둘러싼 사회질서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는 전(前)근대사회의 전시기에 걸쳐 만고불변의 진리로 과학사상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

천체에 대한 지구중심의 이론, 신중심의 과학사상과 철학이 깨어지고 인간중심의 과학사상, 태양중심의 천체설이 태어나기까지는 실로 오랜 세월에 걸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토록 오랜 세월 인류를 지배해온 천동설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지동설은 왜 천문학에 하나의 '혁명'을 몰고왔던 것일까?
우리는 대단히 놀러운 일에 접하면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변전'이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데, 이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는 인류의 소박한 경험과 지배이데올로기가 맞물려 형성되었다는 천동설에 대해 왜, 어떻게, 무엇을 부정했던 것일까? 우리의 궁금증을 따라 지동설의 역사를 살펴보자.

●―지구는 우주의 중심

고대의 인류가 천체의 운동방식과 운동원리를 파악하는 방법은 오직 육안과 상상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관찰했다.

별이 떠오르는 모양이 둥글었으며, 사람이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별자리가 달라졌다. 특히 월식 때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는 항상 만곡선을 그렸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은 태양이 지구의 주변을 돌고 있으리라는 단순한 추론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이것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방도가 당시로서는 없었다.

이때 천상계와 지상계를 구분하고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구조를 설명한 학설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최초로 발생했다. 그리스 식민지, 마케도니아 출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설의 창시자였다. 귀족계급으로서 제반의 학문에 능통했던 그는 천체의 운동에 대해 자신의 '도그마'를 이용하여 '지구중심설'을 내놓았다.

이 이론은 천상계와 지상계를 구분하고 천체는 신이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천상계의 운동은 완전한 원운동이며 지상계의 운동은 불완전한 직선운동이라는 것이 주요골자였다. 그리고 사물은 그 본성에 따라 운동하는바, 우주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무거운'지구가 그 본성에 의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지구중심으로 천체가 편재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세론(世論)의 간단한 추론(태양이 지구주위를 돌고 있다)을 당시 신중심의 지배이데올로기(만물의 운동의 제1원인은 신이다)에 맞추어 세밀화 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은 마찬가지의 기초원리로 구성된 '프톨레마이어스'의 천동설에서도 보여진다. 중세의 전 시기에 걸쳐 천체과학이론의 정설로 받들어졌던 프톨레마이어스의 천동설의 핵심은 천체가 지구 주위를 완전하게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AD127~151 사이에 활약한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어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그 주위에 지구로부터의 거리순으로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이 있으며 이들 7개의 행성 다음에 항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는 지구를 천체의 중심에 놓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지구란, 주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로마교황이 있는 신성한 장소라는 당시의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지구에 대해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고, 마침내 중세 전 사회에 걸쳐 이 '지구중심설'을 의심할 바 없는 진실로 규정했다.

이렇듯 오랜 세월에 걸쳐 '지구중심설'을 탄생시키고 유지해온 고대와 중세의 천체과학 역사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구해졌던 소박한 상식적 감각과 함께, 일을 부정해낼 수 있는 과학적 실험과 연구를 저해한 교회의 권위 및 압제, 지배계급 과학자들의 관념론에 기초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타났을 때조차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들이 보아왔고 믿었던 단순한 사실, 고대의 제국과 증세의 교회가 인정하고 세뇌시켜온 사실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천동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사람들의 일상적인 '진리'로 굳게 믿어온 것이다.

이 권위가 파괴되고 새로운 '진리'에 사람들이 눈뜰 수 있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동설'을 탄생시키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교회의 권위를 뒤엎고 자연과학의 독립성을 옹호하며,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싸움이 필요했다. 오직 이 과정을 올바로 거침으로써만이 지동설 또한 제대로 태어나고 과학의 발전 역시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상식적 원칙을 뒤엎는 혁명에 성공했던 '지동설'은 바로 이러한 지난한 싸움의 격변기,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탄생했다.

●―격동의 시대, 르네상스

14세기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중심 세계를 부정하고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 스스로 보다 나은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세계를 선언한 운동이었다. '교회의 권위와 중세의 암흑적 질곡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추구했던 이 시기는 자연과학이 비로소 '과학'으로서 제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때였다.

고대 노예제와 중세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뒤엎으며 시작된 르네상스는 근세의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어가는 과도기이기도 하다. 신중심 세계를 부정하며, 인간중심의 세계를 선언한 이 시대는 중세와 근세의 세계관이 뒤섞여 서로 싸우는 격동의 시대이자, 자연과학의 기초가 다져진 시기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이제까지의 낡고 고루한 사회적 의식과 관념, 생활과 질서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나타났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은 자연과학이 종교로부터 독립될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연구의 관심분야도 신학과 종교에서 부의 소재가 되는 현세의 자연과 기술로 이전되어 갔다.

이와 같이 자연과학이 종교로부터 분리되어감에 따라, 교회의 권위에 짓눌린 사상과 과학원리, 자연현상에 대한 성서의 기록과 교회의 견해도 붕괴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그리스도 교회와 신학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싸움이 행해졌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자역과학은 연구방법에서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원리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한 '이론과 의식'의 변화가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자연과학분야의 연구방법과 연구의욕, 연구시설들의 양과 질적발전이었다.

일례로 영국의 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에 보다 적극적으로 작용하여 부를 발견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조직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연구가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실험이 도처에서 행해지고, 실험과 그 결과 및 그 정신이 추앙받을 수 있는 단초가 발생한것이다.

●―지동설, 천동설을 뒤엎다

경제적으로 '중상주의'를 표방하던 르네 상스시대는 나라의 번성과 대중의 복지(부)를 증진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육로와 해로를 따라 '부'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이 머나먼 여행은 그들이 이제까지 써온 '항해법과 수단'의 한계를 극복할 것을 요구했다. 활발한 대양항해활동은 특히나 천체관측에 기초한 배의 위치결정이 요구됨에 따라 정밀한 항성표(恒星表, Star Catalogue)가 필요했다. 이제까지의 관측치에 보다 잘 합치될 이론이 요구됨으로써 천체에 대한 연구도 배가되었다. 물론 항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것은 '나침판'의 발견이었지만, 천체에 대한 연구 역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증대되었고 보다 세밀화되었다.

확실히 '지동설'은 그에 부응했던 연구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지동설이 준비되기까지 문제는 앞서 살펴보았던 요인들이 늘 그 전진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뒤엎는 과정을 통해 생성된 이 천체이론은 초기에는 '태양중심설'이 주요골자이긴 했으나 천체의 운동이 원운동이라는 논리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은 왕과 같아서 그 주위를 신하인 혹성이 돌고 있고, 우주는 태양을 중심으로 닫혀져 있으며, 유한하고 거대한 구에 그 각각의 천체가 부착되어 있는 집합이라고 보았다.

사실상 태양중심설을 최초로 표명했던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지구는 태양의 궤도중심도 아닐 뿐더러 우주의 중심도 아니다. 만일 달에 인간이 있다면, 우리가 달을 보는 것처럼 우리 지구가 달에있는 사람에게 보일 것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공표한 1543년보다 무려 30년 전에 이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와같은 당대의 과학적 증언들을 수집하면서, 프톨레마이어스의 체계를 하나씩 부정해 갔다.

1543년 그가 죽기 불과 수주일 전에야 발간된 '천구(天球)의 회전에 대하여'에 따르면, 모든 구면(球面) 중 가장 최고의 것은 항성의 구면이라고 한다. 아울러 항성은 자기 자신과 그 밖의 모든 구면을 포함하며,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프톨레마이어스의 체계를 뒤엎는 것이면서, 행성과 그 궤도의 주기가 여러가지 관측사실에 부합되는 설명이었다. 이러한 설명은 기존의 지구 중심적 체계가 지녔던 약점 가운데 혹성들의 움직임에서 발견된 '비정규성'을 규명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논리가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로서, '신부'인 그에게 요구되었던 임무인 '달의 개정'작업을 빼놓을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급속도로 발달한 해상무역은 이제까지 써왔던 달력의 부적확함을 뛰어넘어 보다 정확하고 신빙성있는 새로운 달력을 요구했던 것이다.

당시 사용했던 달력은 율리우스력으로, 그 부정확함은 해상무역뿐 아니라 농업의 추수기 조절, 교회의 부활절 규정 등에 많은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한 달력의 부정확함은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천체의 이론이 옳지 않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어쩌면 보다 정교한 달력이 요구되고, 이를 개정하는 작업에서 '관측되는 사실과 일치하는 이론'을 중시하던 코페르니쿠스였기에, 이제까지의 불합리한 천체론, 지구중심설은 뒤엎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시인의 감각으로 열렬히 옹호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지구가 만물의 중심이 아닐 뿐더러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한 점에서 실로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는 그의 이론이 '성서의 적'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그의 이론을 집대성한 책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는 발간되고도 70여년이 지난 1616년 갈릴레오 시대에 와서야 금서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코페르니쿠스 사후, 시인 '조르다노 부루너'는 그의 탁월한 시적 감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열렬히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는 천체의 하나로서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우주는 무한하며 창조된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코페르니쿠스가 카톨릭교회와의 충돌을 모면하고자 남겨두었던 얘기들을 쏟아부은 것이었다. 분노한 로마교회는 그를 화형에 처했다. 그러나 교회의 이같은 행위도 이미 과학자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잡아 가는 생각들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케플러와 갈릴레오로 이어지는 혁명적과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내에 있었던 한계조차 극복하며 그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사회의 관념론적 세계관을 근본부터 뒤엎는 것으로서, 종교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부루너의 부활'이자, '코페르니쿠스의 양심선언'이었다.

유명한 독일의 과학자 케플러의 천체이론은 '정신이 천체를 움직인다'는 자신의 초기시절의 관념을 부정하고, 법칙적으로 작용하는 물리적 힘이 천체를 움직인다는 자연과학적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혹성의 궤도를 규정하고 있는 법칙을 반영한 케플러의 3법칙 중 그 첫째는 혹성은 태양을 하나의 촛점으로 하여 '타원궤도'를 그린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2세계설(천상계는 신적 세계로서 지상계와 구분되고 각각은 서로 다른 운동을 한다)를 부정할뿐만 아니라,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설조차 부정한 것이었다. 그의 이론은 이후의 자연과학의 기초를 다진 것이다.

●―갈릴레오가 완성한 지동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도전하는 보다 명쾌한 이론은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의 지동설이다. 그는 달이 지구와 같은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가 제작한 망원경으로 관찰한 달의 모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과는 판이했다. 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공모양의 평평한 표면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표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상게와 지상계를 구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갈릴레오는 천상계와 지상계의 동질성을 회복시켰다.

달이 지구와 같은 모습이라는 주장을 포함한 그의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이론보다 더욱 정교하고 과학적인 것이다. 마침내 지동설은 완결되었다.

"목성 주위를 4개의 위성이 돌고 있듯이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많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믿어온 상식적 원칙을 부정했다. 혼란스러움이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시대의 전반적인 변화와 이 이론들의 정교함과 현실성은 사람들을 설득시켜 나갔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반(反)종교의 르네상스 시대가 낳은 과학이론의 집합점이었으며 실로 그의 시대 이후, 혁명적 과학의 역사를 탄생시킨 요람이었다.

'지구중심설'에서 '태양중심설'로의 변화는 지구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혁명적 착상에 근거하여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이르러 완결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 체계의 기초에는 이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대한 부정이 자리잡혀 있었고, 실재하는 현실을 중심으로 과학을 놓으려 했던 실천적 노력과 사고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로 이 성과가 이루어지기까지 시대적 배경을 이루었던 르네상스의 운동과 자연과학의 종교로부터의 독립운동은 소중히 여겨지지 않으면 안된다.

근대 과학 혁명이 이룩되는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일화들, 코페르니쿠스의 우유부단함과 용맹무쌍했던 시인 부루너의 처형의 아픔, 갈릴레오에 대한 심판 등은 이 싸움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것이었는가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인류의 자산이 없었다면,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과학혁명은 시작될 수 없었고, 자연과학의 '과학적 탄생'은 요원했을 것이다.

실로 근대 자연과학, 그 중심에 있었던 지동설의 탄생과정은 과학의 '혁명',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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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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