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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로킷"

세종때의 대형미사일 로킷 대신기전(大神機箭)

우리나라 로킷에 대하여 한참 연구하던 어느날 밤 나는 꿈속에서 이순신장군을 만났다.

"장군님 혹 신기전이라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알지…그런데 왜?"

"그것 발사하는 것 좀 볼 수 없을까요? 꼭좀 보고 싶은데요. 그것이 로킷인데 말씀입니다. 그것을 발사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확실히 알 수가 있읍니다. 꼭좀 보게 해주십시요"

나는 장군님을 졸랐다. 가만히 계시던 장군님은 한참 후 입을 여셨다.

"그렇게 꼭 보고 싶다면 내 보여주지"

우리는 좁은 길을 따라 바닷가로 갔다. 그 곳은 넓은 남해안의 군항이었다. 여기 저기 거북선도 보이고 군함도 여러 척 보였다. 지나가던 군인 아저씨들이 다가와서 인사도 한다. 우리는 부두가에 정박해 있는 큰 군함에 올라 갔다. 장군님은 부하를 시켜 신기전을 발사하도록 하셨다.

부하가 신기전을 갖고 와서 배의 갑판에 놓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쉬이잇! 하면서 로킷은 발사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멋있는 배기가스를 뒤로 뿜으면서 말이다. 정말 신기전은 로킷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카메라를 안갖고 온 것을 알았다. 카메라만 갖고 갔더라면 신기전의 발사 장면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신기전이 로킷이라는 것을 모두 믿을텐데…….

1978년 9월26일. 이 날은 우리나라가 제 손으로 만든 중장거리 미사일(missile)의 발사 시험에 성공한 날이다. 세계에서 로킷(rocket)병기의 한가지인 미사일을 제 손으로 만든 나라는 한국까지 포함하여 일곱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의 최고 걸작이라고 일컫는 로킷 미사일을 우리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의 과학도 발달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로킷의 첫 시작은 아니다. 사실은 1958년과 1959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의해서 실험용 로킷이 발사 되었으며, 또한 1959년 4월부터는 인하공과대학(인하대학교)의 병기공학과를 중심으로 1968년 4월까지 13회에 걸쳐 로킷 발사 실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 보다 훨씬 앞서서 6백몇년 전에도 이 땅에서 우리 선조들의 손으로 로킷무기를 만들어 사용 하였다.

한국 최초의 로킷, 주화

우리나라에서 로킷을 맨 먼저 만든 사람은 고려 말엽, 그러니까 1377년에 ‘왕립 화약 무기 연구소’라고 할 수 있는 화통도감(火熥都監)을 왕에게 건의하여 세우고 그 곳에서 화약을 비롯한 18가지의 갖가지 화약무기를 연구하여 제작한 최무선(崔茂宣)이다.

최무선이 그때에 만들었던 18가지의 무기 중에는 화전(火箭)과 주화(走火)라는 것이 있다. 화전은 ‘불화살’이라는 뜻으로 화살의 앞 부분에 솜을 매달고, 쏠 적에는 솜에 기름을 묻혀서 불을 붙인 다음 활로 쏘는 것이다. 이것은 목표물을 불태울 때라든지 적을 혼란시킬 때에 사용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런 불화살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들어와 기름 묻은 솜 대신 화약을 붙이게 되었다. 그러나 화약을 붙이는 방법도 한쪽 끝이 뚫린 원통형 통에다 화약을 담아 붙이는 것이 아니고 메주처럼 그냥 뭉쳐서 화살의 화살촉에 붙인뒤 종이와 헝겊으로 겉을 싸고 실로 묶은 것이다. 불화살은 발사할 때, 화약덩어리에 달린 점화선에 불을 붙여 화살이 날아가는 도중이나 목표물에 도착하는 즉시 화약에 불이 붙어 터지면서, 목표물을 불태운다든지 적을 혼란시키는 무기이므로 로킷으로 불리는 중국의 화전과는 근본적으로 구조가 다르다.

주화는 ‘쇠붙이를 녹여서 만든 돈’을 뜻하는 것 같지만, 정말의 뜻은 ‘달리는 불’이라는 뜻이다. 이 주화는 지금의 로킷과 같은 얼개, 같은 동작 원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로킷으로 볼 수 있다.

주화가 이 땅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정확한 해는 알 수가 없지만, 최 무선이 화통도감에서 활약한 시기를 1377년부터 화통도감이 문을 닫은 1387년까지로 본다면, 이 사이에 주화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주화의 상세한 얼개 등을 설명하기전에, 우선 주화에 앞서서 만들어진 외국의 로킷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한다.

스스로 날아가는 달걀

기록에 나타난 세계 최초의 로킷은 1232년 중국의 금(金)나라에서 몽고의 침입을 받아 싸운 변경성 전투때 사용한 두가지의 신무기중 하나인 비화창(飛火槍), 즉 ‘날아가는 불 창’이라는 무기이다. 지금까지 출판된 로킷이나 우주과학 책들은 세계 최초의 로킷을 1232년 중국의 화전(火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중국의 로킷의 구조는 길이 2척(尺)의 약통(薬筒)을 종이로 만들어 창(槍)의 앞에 부착시킨 것이며, 종이통속에는 버드나무재 유황 비상(砒霜)등을 혼합한 연소성 물질을 혼합한 약이 채워져 있다.

이러한 중국의 로킷형 무기 및 화약무기는 원나라(몽고)의 세계 정복 야망에 따라 유러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선보이게 되었으며, 1249년에는 아라비아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전파되었다. 곧 이어 유럽 각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로킷이라는 신무기에 관심을 집중 시킬 수 있게 된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제작된 로킷은 아라비아의 ‘핫산 알라마’(al─Hasan al─Rammah)에 의해서 1285~1295년 사이에 쓰여진 ‘병기와 기마전투에 대한 책’에서 설명된 ‘연소하며 스스로 날아가는 달걀’(self-moving and combusting egg)이라는 이름의 로킷이다. 알라마의 설명에 의하면 이 로킷의 구조는 납작한 2개의 남비를 포개놓고 그 가운데 2개의 큰 로킷을 장치하였으며, 양쪽에 꼬리 같은 막대를 2개 부착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최무선에 의해 ‘주화’라는 로킷이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인 1379년 이탈리아의 카이오자(Chiozza)성에서 벌어진 베니스(Venetian)와 제노아(Genovese)사이의 전투에서 제노아 군대가 카이오자성 속의 베니스군을 공격할 때 로킷형 무기를 사용하였는데, 명칭은 지금 로킷(rocket)이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로케타’(rocchetta)였다.

종이 로킷의 과거와 미래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에 걸쳐 사용되었던 세계 여러나라의 로킷들은 거의가 서로 비슷한 얼개로 되어 있으며, 고려의 주화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무렵에 만들어진 로킷의 얼개는 크게 약통부분과 안정막대부분으로 나눌수가 있다. 약통은 글자 그대로 약(薬) 곧 화약을 담았던 통으로서 지금의 고체 추진제 로킷(Solid propellant rocket)에서는 추진제통(Propellant case) 또는 연료통(Fuel case)이라고 부른다. 이는 종이를 말아서 만들었고, 안정막대는 로킷이 목표를 향하여 똑바로 안정하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서 대나무(竹)를 써서 만들었다. 이 원리는 똑바로 잘 날지 않는 연에다 종이를 가느다랗고 길게 오려 꼬리를 붙이는 원리와 같다.

화약 즉 추진제를 담을 통을 종이로 만들어서 되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는데, 종이 두서너장은 쉽게 찢을 수 있지만 수 십장은 쉽게 찢어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 더욱이 요즘에 외국에서는 대형 로킷의 껍데기도 종이를 써서 만들려고 연구한다는 소식도 있다.

주화의 전체 구조를 앞에서부터 보면 안정 막대에 해당하는 대나무의 맨 앞 부분에 쇠로 만든 화살촉을 달고, 조금 떨어진 뒷 부분에 종이로 만든 원통형의 약통을 달고, 그리고 맨 아래 부분에는 새깃으로 만든 깃을 달아 놓았다.

이러한 모양의 주화는 지금부터 10여년 전의 설이나 추석 때에 로킷이라 하여 구멍가게에서 몇십원만 주면 살 수 있었던 것보다 크기가 좀 큰 것을 생각하면 된다. 10여년 전에 구멍가게에서 팔던 로킷은 길이 25cm의 가느다란 대나무의 윗부분에 길이 5cm의 화약이 들어있는 원통형 종이통이 달려 있다. 이것을 쏠 적에는 길가에 흙을 모아 놓고 거기에 꽂아 종이약통의 아래에 붙어 있는 점화선, 즉 심지에 불을 붙이면 조금 있다가 ‘쉬이잇’하면서 포물선을 그리며 수십m를 날아갔다.

동서양의 같은 생각

최무선은 자기가 만든 로킷의 이름을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주화, 즉 ‘달리는 불’이라 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까닭은 로킷의 동작과정을 눈여겨 살펴보면 금방 이해가 간다.

로킷을 발사하려면 우선 로킷을 발사대에 올려 놓고, 약통 속의 화약에 연결되어 약통 밖으로 나와 있는 점화선에 불을 붙여준다. 그러면 점화선이 타 들어가서 약통속의 화약에 불이 붙어 연소가스를 만들고, 이 연소 가스는 약통 아래에 뚫려 있는 분사구멍(Nozzle)을 통하여 약통 밖으로 내뿜는다. 이때 만들어지는 힘이 추진력인데, 이를 옆에서 보면 화살이 불을 뿜으며 앞으로 달리는 것처럼 보이므로 달리는 불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15세기에 유럽에서는 로킷을 ‘풀라잉 파이어’(Flying Fire)곧 ‘나는 불’이라고 불렀는데, 이것 역시 로킷이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고려의 주화는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여러가지 종류로 발전되다가 세종 때부터 더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개발에 힘입어, 세종 29년(1447)의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록에는 소 중 대주화의 세가지 종류로 나뉘어 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세종 때에는 한글과 측우기 등의 발명과 물시계 등의 제작에서 말해주듯이 과학 국방 사회 예술의 여러분야에서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발전이 컸다. 세종의 북방 개척 계획에 힘입어 갖가지 훌륭하고 과학적인 화약 무기들이 연구 개발되어,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등이 압록강과 두만강 가에 이른바 4군과 6진을 개척하는 등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세종 29년(1447) 말에 들어서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사용된 많은 수효의 기록만 보아도 당시 로킷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11월22일과 12월2일의 두 차례에 걸쳐 함경도와 평안도로 보낸 갖가지 주화의 수효가 소주화 2만4천6백개, 중주화 8천8백40개, 대주화 90개 등 모두 3만3천5백30개 이다.

한국 로킷의 첫 설계도

지금까지 한국 최초의 로킷인 주화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주화에 대한 자세한 구조의 설명이나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고려의 주화가 한국 최초의 로킷형 화학무기로 밝혀 졌는지에 관하여 살펴 보자.

세종 30년(1448)에는 그동안 세종대(代)에 들어와 개량한 갖가지 총과 대포 및 화약무기와 발사물 등을 종합하여 그 크기와 제작방법 등을 함께 기록한 ‘총통등록’이라는 책이 편찬 되었는데, 이 책 역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1474년 편찬된 ‘국조 오례 서례’의 ‘병기도설’에 총통 등록에 기록된 모든 종류의 화기에 대하여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있어 당시의 로킷을 비롯한 각종 화기의 구조와 규모를 알 수 있다. 이 병기도설에는 대포와 각종 소형총 11가지, 이들 총통(총과 대포)에서 발사되는 대전(大箭)및 전(箭 : 화살)11가지, ‘질려포통’(둥근 나무 그릇 속에 화약과 끝이 날카로운 쇠조각, 쑥 따위의 물질을 넣고 적의 진지나 배에 던져 폭발시키는 폭탄의 일종) 3가지, ‘발화통’(종이폭탄) 4가지, 지화(地火), 화차(火車), 화전(火箭), 그리고 로킷인 신기전(神機箭) 4가지등 당시의 모든 화약무기 36종류가 실려있다. 이를 종합하여 볼때 주화는 틀림없는 로킷형 화기이며, ‘화포식언해’라는 책에 주화 약통과 신기전 약통은 서로 같다고 한 점 등으로 볼때 총통등록의 출판을 전후하여, 즉 1448년 까지는 주화로 불리었으며 그 이후부터는 신기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로부터 2개씩, 화전, 소신기전, 중신기전(행주산성 유물기념관)


길이 5.6m의 대형 로킷
 

영국의 콩그레브로킷^스미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에 전시중인데 우리나라의 대신기전과 비슷한 크기로 1805~1810년 사이에 개발된 것이다.


병기도설에는 ‘신기전’을 4종류로 구분하여 크기와 구조를 설명하였는데 대(大)신기전부터 살펴보자.

대신기전의 약통(추진제통)은 종이로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2척(尺)2촌(寸)2분(分)5리(釐)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69.5cm이다. 겉둘레는 9촌6분(직경으로 바꾸면 9.55cm), 내경은 2촌2분(6.87cm)이며, 통의 두께는 5분7리(1.78cm)이다. 약통의 양끝은 종이로 붙이고 그 위를 끈으로 묶었는데 묶은 나머지 길이는 1촌5분6리(4.87cm)이다. 그리고 통의 아래 바닥의 중앙에는 직경 1촌2분(3.75cm) 크기의 구멍, 즉 분사구멍(nozzle)이 뚫려 있다.

약통은 길이 17척(531.08cm), 윗직경 1cm, 아래직경 2.95cm의 쇠촉이 부착되지 않은 대나무의 위 끝 부분에 묶어 놓았고, 아래 끝부분에는 새깃으로 만든 깃(안정날개)을 달았다.

이 깃은 기록에는 새의 깃으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넓이 3cm에 길이 84cm크기의 새깃은 없으므로 가죽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대포에서 사용한 전(箭)의 날개에는 가죽으로 만든 것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기전 약통의 상세한 내부구조는 생략하기로 하고 주요한 특징만을 소개한다. 약통에는 화약을 넣어 위 끝을 종이로 여러겹 접어 막고 그 위에 ‘대신기전발화통’을 올려 놓는다. 약통의 윗면과 발화통의 아래면 중앙에 각각 구멍을 뚫어 약선(도화선)으로 연결한다. 이와같이 약통의 윗면에 폭탄인 발화통을 부착시켜 놓고 약선으로 연결하는 것은 목표지점으로 신기전이 날아가는 도중이나 거의 다 날아 갔을 즈음에 폭탄인 발화통이 자동적으로 폭발하게 하기 위함이다. 발화통까지 포함된 대신기전의 전체길이는 약 5.6m가 되는 대형 로킷이다. 그 당시에 가장 큰 대포였던 ‘장군화통’(將軍火筒)에서 발사된 대전(大箭)의 길이가 1.9m였던 것만 보아도 대신기전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대신기전은 주로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서 압록강 건너에 있는 오랑캐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사정거리는 1.5km에서 2km 정도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압록강 하구에서 물이 흐르는 넓이가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이만큼 큰 로킷은 19세기 초인 1805년 영국인 ‘콩그레브’(William Congreve)가 제작 사용한 6─Pounder로킷이다. 이 로킷의 약통은 길이가 55cm이고, 직경이 11cm이며 안정막대를 포함한 전체 길이는 4.3m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대신기전은 외국보다 3백50년이나 앞서서 대형 로킷을 갖고 있던 셈이다.

대신기전을 응용하여‘불을 흩어 놓는 신기전’이라는 뜻을 가진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이라는 로킷도 만들었는데, 전체적인 크기는 대신기전과 같다. 다만 산화신기전은 대신기전의 발화통을 사용하지 않고 약통의 윗부분을 비워놓고 그곳에 안정막대가 부착되지 않은 여러개의 소형 로킷인 지화(地火)와 소형 종이폭탄인 소발화(小發火)를 서로 묶어 점화선으로 연결한 점이 다르다. 목표지점에 산화신기전이 도착할 때쯤 불이 소형로킷에 점화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며 폭발하게 설계된 무서운 로킷인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로킷의 그림은 1621년 편찬된 ‘무비지’라는 병기책에 보이는 화전 그림이다. 중신기전은 대나무를 이용한 길이 4촌5분(14.06cm)의화살에 길이 6촌4분(20cm)의 약통을 달고 있는 형태이다. 맨 앞에는 무게 2전(銭; 약5.5g)의 화살촉을 달았고, 맨 끝에는 폭 5분3리(1.7cm) 길이 5촌7분(17.8cm)의 새깃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있다. 약통의 밑에 뚫려 있는 분사구멍의 직경은 2분3리(7.2mm)이다. 약통의 윗부분에는 소발화라는 소형 폭탄이 장치 되어 있다. 사정거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크기로 보아 2백~3백m정도 날아갈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신기전은 신기전 중에서 가장 작은 막내 신기전이다. 길이 1백cm의 대나무를 안정막대로 사용하였고 맨 앞에는 중신기전과 같이 쇠촉을 달았고 촉에서 조금 뒤로 떨어진 부분에 직경 2cm, 길이 15cm의 약통을 달았다. 맨 아래에는 새털로 안정깃을 달았다. 약통에 뚫려있는 분사구멍의 크기는 1분3리(4mm)이다. 사정거리는 2백m 내외로 보여진다.

이밖에 약통제작법, 추진제 채우기 등에 관한 많은 자료가 있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로킷의 발사대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지겠다.
 

산화신기전의 설계도
 


과학적인 이동식 로킷발사대

로킷의 발사틀은 여러가지 화약 무기의 발사틀 중에서는 그 구조가 가장 간단하다. 왜냐하면 발사틀은 로킷이 날아갈 발향만 정해주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당시 로킷의 발사대는 빈화살통이나 낚시대 걸이와 같이 로킷을 걸거나 뉘어 놓을 수 있는 것이면 된다. 현대군대에서 사용하는 로킷포의 발사틀이 연통토막처럼 앞뒤가 뚫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신기전의 발사틀이 제대로 연구 개발된 것은 문종임금이 화차(火車)를 개발한 다음부터 이다. 이 화차는 로킷인 신기전 1백발을 발사 할 수 있게 설계된 신기전발사틀과 지금의 총알에 해당하는 세전(細箭) 2백발을 거의 동시에 발사할 수 있게 설계된 총통틀중에서 하나를 설치하였다.

화차는 흔히 임진왜란 때에 변이중이수레 위에 승자총(勝字銃) 40개를 실어 점화선을 몇개씩 모아 계속해서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박진이 경주 전투에서, 권율이 행주산성 전투에서 이것을 사용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도 2백여년 앞서서 문종왕이 손수 연구하여 발명한 것이다.

문종은 세종의 세자로 있을 때부터 동생인 임영대군, 금성대군과 함께 화기의 연구를 도울 정도로 과학에 뛰어난 흥미를 가졌다. 화차는 문종이 착상한것을 토대로 임영대군이 1451년 5월에 제작하여 문종화차라 불렀다. 이때에 만든 설계도를 보면 폭넓은 연구와 많은 실험을 거친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는데, 실록(實錄)에 적힌대로 문종화차는 문종의 독창적인 발명품임에 틀림없다.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우리나라에서 왕이 직접 새로운 무기를 발명한 예는 문종 이외는 없는 것 같다. 그때의 일반적인 수레는 바퀴의 바퀴축위에 수레의 차체를 올려놓는데 견주어 문종화차에 사용한 수레는 바퀴축 위에 기둥 두개를 세우고, 그 위에 차체를 올려놓아, 신기전의 발사각도를 최고 40도까지 높일 수 있게 하였다. 만일에 당시의 일반적인 수레에 신기전발사틀을 올려놓았다면 신기전의 최대 발사 각도는 기껏해야 20도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

어떤 물체를 멀리 던질때, 가장 좋은 발사 각도는 45도이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문종화차는 신기전이 발사될때 신기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셈이다. 최대 발사각도가 20도 정도인 일반 수레로는 신기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절반 밖에 발휘할 수 없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퀴축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귀에 차체를 올려 놓는 구조의 화차수레를 만들었으니 꽤 독창적인 고안인 셈이다.

신무기의 두려움

그러면 신기전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먼저 좋은점부터 알아보자.

첫째로 신기전은 로킷이므로 화차를 이용하여 발사하면 몇 사람이 많은 수효를 발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한번에 한발의 화살밖에 쏠 수 없는 활에 견주면 그 차이는 크다. 둘째로 신기전에는 폭탄이 들어 있어서 적의 진지를 불태울수도 있다.

그때에 썼던 대포는 화살의 한 종류로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전(箭) 이었는데, 전의 앞에는 쇠촉이 달려 있고 가운데나 끝부분에 쇠나 가죽이나 새털로 만든 날개가 달려 있을 뿐이어서 폭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배를 부수거나 목표물에 충격을 주는 데에 그쳤을 뿐이고 신기전과 같이 목표물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 결국 신기전은 적군에게 겁을 주고 놀라게 해서 적진을 혼란시킬 수 있는 특수 효과를 갖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옛 기록에도 나와있다.

“주화를 쏘면 맞는 자가 꼭 죽고, 그 날아가는 형상을 보거나 소리를 듣는 자들은 모두 두려워서 항복을 하고, 밤 싸움에 사용하면 분출 가스의 빛이 하늘에 비치어 적의 사기를 먼저 빼앗는다. 복병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곳에서 사용하면 연기불이 어지럽게 비춰 적의 무리들이 놀라고 겁에 질려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노출한다.”

로킷의 앞 쪽에는 발화통이라는 폭탄이 장치되어 있는데, 이 발화통 속의 화약에는 전체 화약무게의 27%에 해당하는 쇳가루가 들어 있어, 이 쇳가루가 발화통이 터질때 뜨거운 파편 구실을 한다. 발화통이 터질때 주위에 있는 적이나 말은 뜨거운 쇳가루가 몸에 박혔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말 위에 타고 있는 적군은 상하거나 말에서 떨어졌을 것이니 효과가 무척 컸을 것이다.

그래서 옛 기록에는 ‘신기전 응적최긴지물(神機箭 應敵最緊之物)’곧 신기전은 적을 맞아 싸우는데 가장 긴요한 물건이라고 하였다.

신기전의 나쁜점은 명중률이 낮고, 만드는 기술이 어려우며, 제작시간이 많이 들고, 화약을 많이 사용하는 점 등이다. 한개의 대신기전에 사용된 화약이 양이 3kg정도인데, 당시 한번 소총을 사용하는데 들어간 화약의 양은 겨우 30g 정도 였으니 1백분의 1에 불과하다.

이렇게 우수한 로킷 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선조들은 임진왜란때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이유는 문종때 7백여대나 제작했던 화차가 1백50년 뒤인 임진왜란 때에는 겨우 30여대 남짓했으니 관리가 얼마나 소홀했었는지 짐작이 된다. 세종과 문종 뒤에도 이분야에 대하여 꾸준히 연구하고 보완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임진왜란이 좀 늦게 일어나서 세종때의 로킷과 문종의 화차를 제대로 충분히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선조들이 그때의 어떤나라의 무기나 로킷과 견주어도 조금도 뛰떨어 지지 않는 훌륭한 로킷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두뇌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고, 그 좋은 머리가 후손인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것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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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채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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