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삐 움직이는 세상에서 게으름은 좋게 보일수가 없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게으른 농부는 파종과 수확을 제대로 할리 없으며 게으른 사무실직원은 전체의 사무능률을 떨어뜨리게 마련. 서양에서는 중세때부터 '게으름은 7개 죄악 중의 하나'로 규정되었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게으름을 하나님에 대한 거역처럼 설교했고 그래서 특히 수도원같은 데에서는 청빈과 함께 부지런함이 크게 예찬되고 강조되었다.
●─ 자기 보존의 수단
그러나 모든 현상에 대해 편견보다는 합리적, 과학적 조명이 강조되는 오늘날 게으름은 부정적 측면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 많은 의학자, 생리학자, 동물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게으름, 좀 객관적 표현을 한다면 비 활동성(inactivity)은 동물이나 사람에게 에너지축적의 기회를 제공한다. 대단히 훌륭한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한다는 얘기이다.
환경이 나쁜곳에 사는 동물들의 경우 그들이 생존을 유지하는데 열쇠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비활동성이다. 사막에 사는 ‘둥근벌레’, 학명으로 ‘디틸렌쿠스 디파사시’라고 불리우는 벌레는 생존조건이 나빠지면 모든 대사활동을 정지해 버린다. 마치 죽은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거의 대사활동을 하지 않아 체력소모가 없게된다. 실험실에서 이런 상태로 얼마나 생존할지 측정해 봤더니 무려 23년간을 지낼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척추동물중에는 박쥐가 게으름뱅이로 유명하다. 북미대륙에 많이있는 갈색박쥐는 날씨가 추워지거나 먹을것을 구하기 어려울때에는 잠자코 죽은듯이 쉬고 있는데 이때의 대사비율은 현저히 감소해서 활동기의 40분의1밖에 안되는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보통의 쥐나 토끼도 실은 게으름을 많이 피운다.
보기에는 날렵하고 계속 움직이는것 같지만 하루에 13시간이나 자거나 조는것이다. 이들은 어느정도 먹기만 하면 나머지시간은 가만히 쉬는것으로 ‘생존의 전략’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맹수중에서는 사자가 잘 쉬기로 유명하다. ‘조지 샬러’라는 동물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사자가 활동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렇게 충분히 쉼으로써 그 맹렬한 체력이 활동할때 발휘되는지 모른다.
누구나 흔히 관찰할수 있는 경우로는 고양이를 들수있다. 고양이는 조금 자리가 편하다 싶으면 웅크리고 자는듯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쥐같은 먹이가 눈에 뛰면 엄청난 순발력을 보인다.
죽은듯 잠자코 있는것은 동물의 세계에서 에너지보존뿐아니라 자기의 생명보호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죽은것처럼 꾸밈으로써 산것만 잡아먹는 강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류의 것으로는 거미, 주머지쥐, 뱀등이 있다.
미 대륙에 사는 ‘돼지코 뱀’(hognose snake)은 생기기는 독사처럼 생겼으나 매우 유순한 편이다. 이 뱀은 공격자를 만나면 대단히 사나운듯한 몸짓을 한다. 그러나 이런 연극이 통하지 않다 싶으면 순간적으로 죽은듯한 자세를 취한다. 꼼짝않은채 턱을 늘어뜨리고 혀까지 내밀어 죽은뱀처럼 보이도록 한다. 이같은 멜로드라마는 우습기는 하지만 흔히 공격자를 멀리하는데 유효하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일부 뱀들은 마치 썩은 나무등걸처럼 보인다. 움직이지 않고 색갈도 나무등걸처럼 보이니까 새나 곤충들이 앉았다가 뱀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이경우는 자기보호와는 반대되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천재중에 게으름뱅이 많아
![다윈 데카프트 아인슈타인](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198804/S198804N025_IMG_01.jpg)
그럼 사람의 일을 보자. 사람들은 피곤할때 조금씩 쉬거나 밤에는 대체로 잠을 6~8시간정도 잔다.(어린아이는 더많이)
위에서 말한 동물들과 같은 비활동성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단한 괴로움을 느낀다. 움직이지 않는것은 그래서 벌(罰)이 된다.
실제 너무 잠을 많이 자면 현기증을 일으키거나 근육이완증세같은 좋지 못한 결과가 생긴다. ‘꼼짝않고 서있기대회’가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는데 이때 우승자는 15시간 25초를 버텨냈다. 눈도 깜짝이지 않는 보다 힘들고 보다 정밀한 무동작시합에서는 ‘리틀버드’라는 사람이 1시간 14분을 견뎌냈다.
이렇듯 사람은 활동적인편이고 이것이 우수한 두뇌와 결합해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대한 학자, 천재적인 예술가 가운데 게으름뱅이가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자가 오래쉬고 짧은시간안에 큰 힘을 내듯 사람의 경우에도 비슷한 원리가 작용하는것은 아닐까? 광범하고 치말한 조사가 진행된바는 없지만 아이들의 경우 몸동작이 재빠르고 쉴사이 없이 왔다갔다하는 아이들이 머리가 좀 모자라는 때가 많다. 특히 창조적이거나 분석적인 두뇌작용에서···.
어쨌든 몇가지 예를 보자.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놀랄만큼 조용히 서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어떤 문제가 생겼을때 그것을 반추하면서 골똘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소크라테스는 하루종일 서있었다고 그는 써놓고 있는 것이다.
과학사가들중에는 이런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찰스다윈’이나 ‘아이작 뉴튼’이 운동이나 좋아하고 세상의 여러가지 일에 관심갖는 활동가였다면 진화론이나 만유인력의 법칙같은 장대한 이론을 구상할수 있었을까?”
아인슈타인 역시 둔하게 보이는 명상적인 사람이었다. 즉 이들 세사람은 비활동적, 인간사회의 평가 개념으로는 게으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별나게 게으르게 보인사람으로는 영어의 체계화에 위대한 공헌을한 ‘사무엘 존슨’박사가 있다. 그는 으례 점심때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겨우 몇시간 집필을 했다.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게으른데 어떻게 그방대한 영어사전을 편찬했을까 궁금히 생각한다. 그러나‘존슨’박사는 일단 일을 시작하면 한시간에 1천8백여개의 단어를 써내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
‘셸록 홈즈’탐정소설로 유명한 ‘코난 도일’경은 그야말로 무기력하고 게을러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냥 병든 사람처럼 멍청히 앉아있기가 일쑤였다. 허나 그런 시간에 그의 머리는 그의 몸둥이와는 달리 복잡하고 치밀한 과학적 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소설은 우연을 개입시켜 적당히 얘기를 풀어나간게 아님을 독자들은 알것이다. 합리적인 추리, 과학적 근거에 입각해 ‘홈즈’는 사건의 매듭을 풀어 나간 것이다.
영문학사에서 길이 기억될 작품을 남긴 ‘마르셀 푸르스트’는 10여년간을 거의 침실에서 보내면서 작품을 써냈다. 그의 침실은 두터운 커튼으로 외부와 차단되었고 벽에는 코르크를 발라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했다.
‘제임스 보스웰’씨는 이렇게 말한바 있다. “이상하게도 영국에서는 게으른것으로 평판이 난 사람들이 위대한 저작을 많이 남겼다”.
프랑스에서는 ‘르네데까르트’가 게으름으로 유명했다. 그는 난로없이 못사는 사람이었다. 난로가에서 불을 쬐면서 조는듯한 모습으로 거의 매일을 보냈다. 그래서 ‘버트랜드 러셀’은 데까르트에 대해‘ 그는 난로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철학을 만든 사람’이라고 유머러스한 평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난로를 좋아한 데까르트가 추운 스웨덴에 초청되어 스케줄관계로 아침5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그는 그곳에서 폐렴에 걸려 곧 죽고 말았다. 동양에서는 아마도 석가모니가 가장 게으르게 보였을 법하다. 12시간의 계속적인 명상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불경에 쓰여있지 않은가. 오늘날 어떤 부처상(像)을 보더라도 조용하고 명상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 적당히········
천재 아닌 보통사람의 경우에도 게으름을 나쁘게만 볼것은 아니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예컨대 쉬고 싶은 상태에서 몸을 위한다고 조깅을 하면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훨씬 많다. 피곤할때의 조깅은 심장에 큰부담을 주며 관절염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점심 먹은뒤의 잠 즉 ‘시에스타’를 즐기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심장질환이 적은 편이다.
사람에겐 자기의 육체, 정신적인 조건에 맞는 활동과 비활동을 안배하는게 절대로 중요하다. 신곡(神曲)으로 이름난 ‘단테’는 기독교 윤리의 바탕에서 게으름이라는 죄를 지은자가 지옥에서 끊임없이 일하는 형벌을 받도록 묘사했다. 사람들은 이런 형벌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열심히 움직이려고 노력했고 타인에게도 결코 게으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과거에는 사람들이 내세(來世)를 염두에 두었다. 현대의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장수(長寿)를 염두에 두고있다. 그렇다면 게으름에대한 인식은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부지런한 사람은 장수하지 못하는 예를 우리는 흔히 보게된다. 그래서 나도 게으름을 피워가면서 과학기사나 쓰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게으름을 하나님에 대한 거역처럼 설교했고 그래서 특히 수도원같은 데에서는 청빈과 함께 부지런함이 크게 예찬되고 강조되었다.
●─ 자기 보존의 수단
그러나 모든 현상에 대해 편견보다는 합리적, 과학적 조명이 강조되는 오늘날 게으름은 부정적 측면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 많은 의학자, 생리학자, 동물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게으름, 좀 객관적 표현을 한다면 비 활동성(inactivity)은 동물이나 사람에게 에너지축적의 기회를 제공한다. 대단히 훌륭한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한다는 얘기이다.
환경이 나쁜곳에 사는 동물들의 경우 그들이 생존을 유지하는데 열쇠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비활동성이다. 사막에 사는 ‘둥근벌레’, 학명으로 ‘디틸렌쿠스 디파사시’라고 불리우는 벌레는 생존조건이 나빠지면 모든 대사활동을 정지해 버린다. 마치 죽은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거의 대사활동을 하지 않아 체력소모가 없게된다. 실험실에서 이런 상태로 얼마나 생존할지 측정해 봤더니 무려 23년간을 지낼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척추동물중에는 박쥐가 게으름뱅이로 유명하다. 북미대륙에 많이있는 갈색박쥐는 날씨가 추워지거나 먹을것을 구하기 어려울때에는 잠자코 죽은듯이 쉬고 있는데 이때의 대사비율은 현저히 감소해서 활동기의 40분의1밖에 안되는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보통의 쥐나 토끼도 실은 게으름을 많이 피운다.
보기에는 날렵하고 계속 움직이는것 같지만 하루에 13시간이나 자거나 조는것이다. 이들은 어느정도 먹기만 하면 나머지시간은 가만히 쉬는것으로 ‘생존의 전략’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맹수중에서는 사자가 잘 쉬기로 유명하다. ‘조지 샬러’라는 동물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사자가 활동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렇게 충분히 쉼으로써 그 맹렬한 체력이 활동할때 발휘되는지 모른다.
누구나 흔히 관찰할수 있는 경우로는 고양이를 들수있다. 고양이는 조금 자리가 편하다 싶으면 웅크리고 자는듯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쥐같은 먹이가 눈에 뛰면 엄청난 순발력을 보인다.
죽은듯 잠자코 있는것은 동물의 세계에서 에너지보존뿐아니라 자기의 생명보호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죽은것처럼 꾸밈으로써 산것만 잡아먹는 강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류의 것으로는 거미, 주머지쥐, 뱀등이 있다.
미 대륙에 사는 ‘돼지코 뱀’(hognose snake)은 생기기는 독사처럼 생겼으나 매우 유순한 편이다. 이 뱀은 공격자를 만나면 대단히 사나운듯한 몸짓을 한다. 그러나 이런 연극이 통하지 않다 싶으면 순간적으로 죽은듯한 자세를 취한다. 꼼짝않은채 턱을 늘어뜨리고 혀까지 내밀어 죽은뱀처럼 보이도록 한다. 이같은 멜로드라마는 우습기는 하지만 흔히 공격자를 멀리하는데 유효하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일부 뱀들은 마치 썩은 나무등걸처럼 보인다. 움직이지 않고 색갈도 나무등걸처럼 보이니까 새나 곤충들이 앉았다가 뱀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이경우는 자기보호와는 반대되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천재중에 게으름뱅이 많아
![다윈 데카프트 아인슈타인](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198804/S198804N025_IMG_01.jpg)
그럼 사람의 일을 보자. 사람들은 피곤할때 조금씩 쉬거나 밤에는 대체로 잠을 6~8시간정도 잔다.(어린아이는 더많이)
위에서 말한 동물들과 같은 비활동성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단한 괴로움을 느낀다. 움직이지 않는것은 그래서 벌(罰)이 된다.
실제 너무 잠을 많이 자면 현기증을 일으키거나 근육이완증세같은 좋지 못한 결과가 생긴다. ‘꼼짝않고 서있기대회’가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는데 이때 우승자는 15시간 25초를 버텨냈다. 눈도 깜짝이지 않는 보다 힘들고 보다 정밀한 무동작시합에서는 ‘리틀버드’라는 사람이 1시간 14분을 견뎌냈다.
이렇듯 사람은 활동적인편이고 이것이 우수한 두뇌와 결합해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대한 학자, 천재적인 예술가 가운데 게으름뱅이가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자가 오래쉬고 짧은시간안에 큰 힘을 내듯 사람의 경우에도 비슷한 원리가 작용하는것은 아닐까? 광범하고 치말한 조사가 진행된바는 없지만 아이들의 경우 몸동작이 재빠르고 쉴사이 없이 왔다갔다하는 아이들이 머리가 좀 모자라는 때가 많다. 특히 창조적이거나 분석적인 두뇌작용에서···.
어쨌든 몇가지 예를 보자.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놀랄만큼 조용히 서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어떤 문제가 생겼을때 그것을 반추하면서 골똘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소크라테스는 하루종일 서있었다고 그는 써놓고 있는 것이다.
과학사가들중에는 이런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찰스다윈’이나 ‘아이작 뉴튼’이 운동이나 좋아하고 세상의 여러가지 일에 관심갖는 활동가였다면 진화론이나 만유인력의 법칙같은 장대한 이론을 구상할수 있었을까?”
아인슈타인 역시 둔하게 보이는 명상적인 사람이었다. 즉 이들 세사람은 비활동적, 인간사회의 평가 개념으로는 게으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별나게 게으르게 보인사람으로는 영어의 체계화에 위대한 공헌을한 ‘사무엘 존슨’박사가 있다. 그는 으례 점심때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겨우 몇시간 집필을 했다.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게으른데 어떻게 그방대한 영어사전을 편찬했을까 궁금히 생각한다. 그러나‘존슨’박사는 일단 일을 시작하면 한시간에 1천8백여개의 단어를 써내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
‘셸록 홈즈’탐정소설로 유명한 ‘코난 도일’경은 그야말로 무기력하고 게을러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냥 병든 사람처럼 멍청히 앉아있기가 일쑤였다. 허나 그런 시간에 그의 머리는 그의 몸둥이와는 달리 복잡하고 치밀한 과학적 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소설은 우연을 개입시켜 적당히 얘기를 풀어나간게 아님을 독자들은 알것이다. 합리적인 추리, 과학적 근거에 입각해 ‘홈즈’는 사건의 매듭을 풀어 나간 것이다.
영문학사에서 길이 기억될 작품을 남긴 ‘마르셀 푸르스트’는 10여년간을 거의 침실에서 보내면서 작품을 써냈다. 그의 침실은 두터운 커튼으로 외부와 차단되었고 벽에는 코르크를 발라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했다.
‘제임스 보스웰’씨는 이렇게 말한바 있다. “이상하게도 영국에서는 게으른것으로 평판이 난 사람들이 위대한 저작을 많이 남겼다”.
프랑스에서는 ‘르네데까르트’가 게으름으로 유명했다. 그는 난로없이 못사는 사람이었다. 난로가에서 불을 쬐면서 조는듯한 모습으로 거의 매일을 보냈다. 그래서 ‘버트랜드 러셀’은 데까르트에 대해‘ 그는 난로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철학을 만든 사람’이라고 유머러스한 평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난로를 좋아한 데까르트가 추운 스웨덴에 초청되어 스케줄관계로 아침5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그는 그곳에서 폐렴에 걸려 곧 죽고 말았다. 동양에서는 아마도 석가모니가 가장 게으르게 보였을 법하다. 12시간의 계속적인 명상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불경에 쓰여있지 않은가. 오늘날 어떤 부처상(像)을 보더라도 조용하고 명상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 적당히········
천재 아닌 보통사람의 경우에도 게으름을 나쁘게만 볼것은 아니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예컨대 쉬고 싶은 상태에서 몸을 위한다고 조깅을 하면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훨씬 많다. 피곤할때의 조깅은 심장에 큰부담을 주며 관절염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점심 먹은뒤의 잠 즉 ‘시에스타’를 즐기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심장질환이 적은 편이다.
사람에겐 자기의 육체, 정신적인 조건에 맞는 활동과 비활동을 안배하는게 절대로 중요하다. 신곡(神曲)으로 이름난 ‘단테’는 기독교 윤리의 바탕에서 게으름이라는 죄를 지은자가 지옥에서 끊임없이 일하는 형벌을 받도록 묘사했다. 사람들은 이런 형벌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열심히 움직이려고 노력했고 타인에게도 결코 게으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과거에는 사람들이 내세(來世)를 염두에 두었다. 현대의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장수(長寿)를 염두에 두고있다. 그렇다면 게으름에대한 인식은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부지런한 사람은 장수하지 못하는 예를 우리는 흔히 보게된다. 그래서 나도 게으름을 피워가면서 과학기사나 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