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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름, '다임러''벤츠''포르쉐'

스포츠카 하면 '포르쉐'(Porsche), 포르쉐 하면 스포츠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포르쉐라는 이름은 '다임러' '벤츠'의 이름과 함께 자동차역사상 불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포르쉐는 '페르디난트포르쉐'(Ferdinand Porsche)박사의 이름을 딴 것으로서, 자동차개발과 더불어 살아온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 포르쉐란 마크가 달린 제1호차가 공장에서 굴러나왔을 때, 그는 75세의 생일을 맞이하고 있었다.

1875년,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에 속하는 맛페르스돌프 근처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철판가공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포르쉐집안에 경사가 났다. 그렇게도 바라던 옥동자가 태어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에게 기계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18세가 되었을 때는 비엔나에 있는 '베라 엑가'라는 회사에 입사하여 전기기사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그는 그때까지 축적된 기계·전기지식을 자동차에 응용해볼 것을 결심하여, 전기 자동차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이무렵, 19세기말은 증기기관 혹은 전지를 이용한 이른바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의 개발에 유럽 전역이 열을 올리고 있었을 때였고 이로 인한 산업혁명이 일어난 시대였는데, 다임러(Daimler)와 벤츠(Benz)가 각각 독립적으로 휘발유를 이용한 내연기관을 장치한 자동차를 처음으로 선보인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 뉴스에 현혹되지 않고 전기모터에 집착하여 1898년에 회사를 설립, 1900년엔 요즘 유행되고 있는 전륜구동식 자동차를 만들어, 파리에서 열린 자동차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많은 자동차제작회사가 이무렵에 설립되어, 이른바 초창기의 '자동차전국시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새로운 자동차를 개발했을 경우에는 차의 성능을 증명해야만 했는데, 자동차경기에 출전해서 우승을 하든가 아니면 속력에 대한 기록도전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1900년 9월 23일, 오전 6시, 젠메링크 고개를 한대의 전기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다. 주행구간은 10km. 핸들을 잡고 있던 사람은 페르디난트 포르쉐 자신이었고 차의 이름은 로너(Lohner) 1호였다. 이때의 실험속도기록은 시속 40.23km라는 당시의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했다.

포르쉐의 전기자동차는 그후에도 계속 제작되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향상되는 휘발유내연엔진의 성능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이후 포르쉐는 아우스트로 다임러(Austro Daimler)사에 주임설계기사로 영입된다. 그는 다임러의 이름을 전세계에 떨치게 한 최고의 공로자였다. 1913년 그가 만든 비행기 엔진이 기록적인 시속 1백36km을 내게 했는데, 나중에 이 엔진이 세계 제1차대전을 맞아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공적으로 인해 그는 드디어 이 회사의 총지배인이 되었고 비엔나 공과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정부로부터는 프란츠 요제프 십자장(十字章)이란 최고 훈장까지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1918년 제1차대전이 독일 오스트리아동맹군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포르쉐는 트럭과 비행기엔진 만들기에서부터 민간용 자동차제작에 전념하게 된다. 1921년 어느 여름날, 전후(戰後) 처음으로 개최되는 이탈리아에서의 그랑프리 자동차경주에, 자동차애호가이면서도 영화 제작자였던 '콜로브라트'(Kolowrat) 백작의 초청을 받아 구경을 간 것이 그의 훗날의 자동차개발 방향을 결정짓게 된다.

그는 '콜로브라트'백작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어 소형의 경주용 자동차를 개발했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차가 SOHC, 4기통, 1100cc 엔진을 장비한 '자샤'(Sascha)였다. 이 자샤란, 콜로브라트백장의 이름 '자샤 콜로브라트'에서 딴 것으로, 백작의 재정적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붙인 것이었다.

이 자샤는 유럽에서 소형급 자동차경주때마다 우승하여, 포르쉐와 아우스트로다임러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떨치게 한다.

그러나 1926년 다임러가 벤츠와 합병, '다임러·벤츠'사가 창립되자 이 회사는 점차 고급승용차에 더 큰 의욕을 보이는 바람에 1929년 포르쉐는 다임러·벤츠사를 사직한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붸르케'사가 그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포르쉐는 그동안 억제해왔던 정열을 단숨에 토하는듯이 소형고성능차 개발에 전력투구를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슈타이어형(型) 30'이었지만, 1930년 슈타이어사의 지원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슈타이어는 옛날 포르쉐가 있던 아우스트로·다임러사에 흡수되는 판국이 되서 포르쉐는 더 이상 남한테 예속돼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한다.

1930년 그는 슈트드가르트에 돌아가 집 한채를 빌어 자동차설계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이야말로 명실공히 자기것이었던 셈이다. 1932년 포르쉐는 소련정부의 초청을 받았다. 모스크바에 가본즉 그를 소련의 자동차산업 최고책임자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57세의 나이로 언어의 문제도 있고 하여 이 권유를 사양하고 독일로 돌아왔는데, 이번엔 또 히틀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


히틀러의 요구로 폴크스바겐을 제작

히틀러는 1934년 2월 베를린에서 열린 자동차쇼에서, "독일은 모터사이클과도 맞먹는 싼값인, 정말로 대중을 위한 국민차(国民車=폴크스바겐)를 대량생산하여야 한다"라고 연설했다. 그리하여 1934년 6월 22일 그 일을 포르쉐가 맡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VW3'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히틀러가 세계 제2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자 포르쉐는 국민차 생산보다는 군사차량이나 탱크를 개발하는 일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때 포르쉐는 그 유명한 레오파르트, 티겔, 마우스 전차들을 개발하였다. 오늘날에도 포르쉐의 기술은 NATO군사력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45년, 독일은 손을 들었다. 히틀러의 협력자로 지목된 포르쉐 일가는 부녀자를 제외하고는 전원 체포되었다. 그때가 7월 30일이었다. 그러나 11월 1일, 그의 결백이 증명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이번엔 프랑스의 푸죠(Peugeot)자동차 회사의 사장이며 포르쉐의 친구인 '피엘 푸죠'(Piel Peugeot)의 고발에 의해 프랑스군에 체포되었다. 전쟁중에 포르쉐 그룹이 프랑스 사람들을 독일에 데려다가 혹사했고, 프랑스의 많은 자동차기재를 약탈해갔다는 것이 그 고발내용이었다.


포르쉐 356


그러나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1947년 8월 포르쉐박사와 그의 아들은 드디어 석방되었다.

이후 재건사업에 돌입한 포르쉐그룹은 1950년 처음으로 포르쉐란 이름이 붙은 차를 생산하게 되었다. 특히 '포르쉐 356'은 1951년 르망(Le Mans)의 24시간 경주에서 평균시속 1백22km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당당히 우승했다. 이때부터 '끈질기고 빠른 소형차'라면 '포르쉐'라는 대명사까지 얻는 영광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게 된다. '포르쉐 944'는 시속 2백50km, 911형은 2백60km를 자랑하기에 이른다. 1983년 이후로는 936, 956 및 962모델이 선보이고 있다.

스피드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이상적인 자동차, 포르쉐는 이렇게 포르쉐박사의 천재적인 식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8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조경철 교수 · 연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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