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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와 진주성싸움유물을 전시한 국립 진주 박물관

가야문화의 윤곽을 파악할수 있는 좋은장소

국립진주박물관


신석기시대부터 낙동강 하류와 그 지류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야와 그 선사문화유물과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싸움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 국립진주박물관이다.

 

진주성 안에 자리잡은 박물관


임진왜란 때 삼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의 옛터 진주성(경남진주시남성동) 안의 5천여평 부지에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탑의 선을 우리의 고건축 양식으로 조화시킨 현대식건물(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1천5백평)로 자리잡은 진주박물관은 1984년 11월2일에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가야지역에서 이루어진 선사와 원사시대의 유물및 유적을 복원전시하고 가야시대의 출토유물을 유물별·종류별로 전시함으로써 가야문화의 특성을 재현하고 있다. 또 정기적인 기획전시와 학술강연회를 통해 박물관의 전시기능과 교육기능을 활성화하고 관련된 문화영화와 비디오 상영으로 시청각교육도 함께 하고 있다.
 

전시유물은 신석기시대 유물 5백38점, 청동기시대 유물 4백79점, 원삼국시대유물 2백52점, 가야시대 유물 1천4백3점, 통일신라시대 유물 5백35점, 고려시대유물15점 조선시대유물 2백49점과 진주성싸움 관련 유물 약2백점등 모두 3천4백71점이다.
 

유물의 종류별로는 금속제품 7백65점, 옥석제품 9백20점, 토도제품 1천4백3점, 골갈패제품 1백88점, 목죽초칠 23점, 피모지직물 6점 서화탁본 54점 무구류 1백9점 기타 3점이다. 이런 유물의 대부분은 1910년대에 일본인들이 발굴했던것을 회수한 것이다.

 

옛 가야문화의 유물


낙동강과 그 지류에 접하는 내륙지방이 가야의 옛땅이었다. 낙동강과 그 지류 유역의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는 온화한 기후와 알맞는 강우량등 자연조건이 농경에 적합하였다. 이러한 자연지세와 기후를 배경으로 하여 오래전부터 이 지역의 하천지대에는 사람이 살기시작하였고 그 결과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남아있다.
 

가야의 선사문화는 신석기시대 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개더미나 유물포함층으로 남아있는 이 시대의 유적은 주로 강가에서 발견 되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진양 산청 거창등지의 경남 내륙지방 구릉지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 신석기인들의 활동범위가 바닷가나 큰 강 유역에서 내륙 깊숙한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붉은칠한토기(丹塗磨硏土器) 석기 골각기 장신구등 여러가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빗살무늬토기이다. 이 토기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있으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이 지역 신석기문화를 여러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전기는 융기문(隆起紋)과 눌러찍은 빗살무늬가 구연부 주변에만 새겨지고 중기에는 굵은 침선문(沈線紋)계의 전형적인 남해식 빗살무늬가 그릇전체 혹은 일부에 정연하게 새겨져 있으며 후기에는 다시 무늬를 새기는 면적이 좁아지면서 침선문은 점차 퇴화되고 조잡해지면서 급기야는 무늬가 없어져버린다.
 

이 무렵의 유물로 진주박물관에 있는 대표적인 것이 청동기시대의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의 붉은간토기 이다. 사천에서 발굴된 높이 19.1cm, 입지름 9.9cm, 배지름 18.0cm의 가지무늬토기는 회백색 토기의 어깨 부분에 검은 가지무늬가 들어있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지금과 경남과 전남지역에서만 만들어지던 특수한 토기로 알려져 있다. 보통 고인들과 돌널무덤의 껴묻거리로 출토되고 있으나 경남진양군대평면 한들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에서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고운 진흙으로만 빚어만든 우수한 작품이다.
 

붉은간토기(紅陶)는 역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함안예곡리에서 출토된 높이 12.6cm, 입지름 7.0cm, 배지름 12.8cm의 것이다. 그릇 겉면과 목 안쪽에 산화철을 바르고 갈아서 구워 만든 것이다. 바탕흙에 비교적 가는 모래가 많이 섞여있어 거칠지만 그릇의 균형이 잡혀있고 붉은색이 잘 드러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리토기

 

일본 야요이 문화에 영향미친 청동기문화


낙동강과 그 지류 유역의 신석기문화는 대개 기원전 4000년 경부터 시작하여 3천여년 동안 계속되다가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하여 북쪽으로 부터 밀려온 무문토기문화와 접촉하면서 서서히 소멸되어간다. 즉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1000년경을 전후하여 끝이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가지고 북쪽에서 내려와 선주민(신석기문화인)을 정복하거나 동화하여 이 지역의 새로운 주인공이 된 것이다.
 

옛 가야지역의 곳곳에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앞 시대의 것에 비하여 그 수도 많고 종류도 많다. 유적이나 유물이 발굴출토되는 지역도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큰 하천을 낀 구릉지대로 변한다.
 

특히 진주를 중심한 서부경남의 남강유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유물들은 일본 야요이 문화에 영향을 미친 흔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시기의 유물로 미루어 주민들은 농경을 발전시켰고 계급이 분화된 사회로 급격히 발전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시기가 기원전후에서 대개 3세기까지로 문헌상으로는 삼한시대 또는 원삼국시대라 부르는 시대다. 이 시기를 고고학상으로는 초기 철기시대라 한다.
 

이 시기의 출토유물로는 토기류 장신구류 이기류(利器類·날을 쓰는 소형의 도구나 무기) 무기류 무장구 마구류등이 있으며 출토지역은 경북의 성주 고령과 경남의 내륙지역 거창 함양 합천 의령 산청 진주와 평야지대인 김해 고성 창원 사천으로 광범위하며 전북의 남원에까지 미치고 있다. 출토유물중 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퀴달린토기 갑옷 투구 말얼굴가리개 금동관등이 있다.
 

의령군대의면에서 발굴된 바퀴달린토기(車輪飾土器 보물637호)는 높이 18.5cm, 너비 24.0cm 크기이다. 굽다리 위에 속이 비어있고 좌우에 서린 무늬의 뿔이 달려있는 활모양의 원통잔을 얹고 그 좌우에 수레바퀴를 장식한 모양이다. 이와 같이 바퀴를 좌우에 붙여준 이형(異形) 토기는 이밖에도 함안 말산리 34호분에서 출토된 것이 한점 있다.
 

갑옷과 어깨가리개 및 투구는 경북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발군된 가야유물이다. 갑옷과 어깨가리개의 크기는 등판높이 40.6cm, 가슴판높이 34.7cm, 몸통폭 49.6cm이다.
 

갑옷은 장방형 철판 여러장을 못으로 박아 붙여 만든 것으로 등을 가리는 부분과 좌우 가슴을 가리는 부분등 3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른쪽 가슴의 것은 입고 벗을 때 편리하도록 떼어져 있다. 어깨가리개는 장방형의 판을 목에 끼울 수 있도록 반원형의 홈을 판 후 어깨의 곡도에 맞도록 휘어 만든 좌우의 두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어용 무구는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주로 가야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투구의 크기는 높이 15cm, 지름 25.7cm다. 각기 길이가 다른 철판 4장을 위로 좁혀가면서 접합시켜 올리고 그 위의 터진 공간을 다시 한장의 철판으로 덮어씌워 복숭아씨 모양의 철모자로 만들었다. 모자 밑에 붙어있는 철판 3장은 원래 접합시켜 늘어뜨려 머리 밑과 목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녹이 슬어 붙어버린채로 출토되었다.
 

갑옷은 지산동의 것 외에 함양 상백리 고분에서 출토된것도 있다. 등판높이 46.0cm, 가슴판 높이 33.5cm, 몸통폭 47.5cm인 이 갑옷은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는 있으나 역시 여러개의 쇠판을 못으로 접합시켜 만든 등판과 좌우 가슴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갑옷도 오른쪽 가슴판은 떼어놓아 입고 벗을 때 편리하도록 하였다. 말얼굴 가리개와 볼가리개는 부산복천 10호분에서 나온 가야유물이다. 말얼굴가리개는 길이 51.6cm, 높이 10cm, 너비 24.4cm이고 볼가리개는 길이 31.5cm, 너비 16.4cm이다.
 

뒷편에 곧추선 귀가리개로 챙이 붙어있는 말얼굴가리개와 볼가리개로 구성되어 있다. 말얼굴가리개는 쇠판 16장을 못으로 박아 조립하여 만들었다. 말얼굴가리개와 볼가리개의 테두리에는 작은 못이 부착되어 있어 서로 끈으로 묶어 사용토록 했고 각기 한편에 반원형의 구멍을 파주어 눈구멍을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나라 고분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것이나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말머리에 장착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무장구나 마구류는 당시의 격변하는 시대상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남부지방의 전술이 보병전에서 기마전으로 전환한 극히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복천 11호분에서 출토된 가야금동관은 높이 21.9cm, 밑지름 17.6cm이다. 도금한 청동판을 오려서 만든 것으로 머리테 중앙과 좌우에 나무가지형의 솟은 장식이 하나씩 붙어있다. 이 솟은 장식의 겉면에는 달개가 붙어있고 끝은 보주형으로 만들어 마무리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유물


왜병이 전국을 휩쓸던 조선조 선조25년(1592년·임진년) 진주성만이 함락되지 않고 있었다. 이 진주성을 뺏어 보급과 전략기지로 삼으려던 왜군들은 그해 10월 5일 2만이 넘는 병력을 집결, 대공세를 취했다. 이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비롯한 3천8백여명 관민은 끝내 성을 지키고 왜병을 물리쳐 후세에 임란삼대첩의 하나로 기록을 남겼다.
 

이때에 쓰였던 무기류와 참여했던 의병들의 유물이 2백여점이나 보존되어 있다.
 

그 유물 속에는 오늘날의 대포의 원조라 할수 있는 현자총통(玄字銃筒)과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승자총통(勝字銃筒), 소총에 속하는 십연자총(十連子銃) 조총(鳥銃) 등이 있다.
 

문물로는 진주성 주변에서 의병을 일으켜 돕던 곽재우(郭再祐)장군의 큰칼 말안장 벼루(보물671호)등을 비롯하여 김시민의 편지 고경명(髙敬命)의 창의격문 이언춘(李彦春)의 임란일기 등이 있다.
 

진주박물관은 발굴조사활동도 벌이고 있다. 개관후 '김해 양동리고분군'(1984.11~12), '거창 말흘리 고분군'(1985.5), '합천 죽죽리 폐사지'(1985.12~1986.4), '합천 반계제 고분군'(1986.10~1987.4)등을 발굴조사하여 아직 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않은 서부경남 및 경남 내륙지방의 역사·문화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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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이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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