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삶을 발전시키는 도구로서 과학이 발전해왔음은 풍부한 역사적 사례로서 밝혀져 왔다. 따라서 과학문명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과학발전에 얽혀있는 뒷얘기는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과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역사를 살핀다는 점에서 과학을 인간사적으로 재조명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새해를 맞아 「테마과학사」에 대신해 「과학사 뒷얘기」를 연재하며 이 칼럼은 과학사를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원시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의 법칙을 알고 이것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인간은 열매를 따는 막대기, 땅을 일구는 쟁기, 수렵을 할 때 사용하는 날카로운 도구에서부터, 눈 비 태양열과 같이 변화시키기 어려운 천연조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파악하여 자신들의 경제활동에 이용하면서 자연에 적응하거나 대립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형성해 왔다.
이 과정속에서 '시간의 발견'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합리적으로 활용하게 하는 커다란 계기였다.
인간은 천체에 대한 연구로부터 기후 변화를 예측하고 절기의 변화를 알아내었으며, 그 결과 자연으로부터 받는 곤란함에서 조금씩 해방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인간은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도구로서 '시간'을 활용해 오기까지 했던 것이다.
'시간의 발견'으로 인간사회는 엄청나게 도약했으며, 천문학은 최초의 과학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전인류를 '공통적 삶'으로 묶어 세우고 있는 '달력'의 역사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측정하는 법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이를 인간사회의 도구로 '산물화' 시켜온 여정이기도 하였다.
●―나일강에서 탄생한 태양력
인류의 시간에 대한 싸움은 어떤 특정한 '시기'를 예측하려는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 원시시대의 경우 인간은 자연에 대한 절대열세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때문에 원시인들로서는 자연상태를 파악해서 농사나 사냥 등에 이용하거나 농사를 지을 때 어떤 시기가 적합한지를 터득하는 것은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계절의 순환가운데 이 일들에 적합한 절기가 숨어있었고, 이 때의 시기를 미리 알아 대처하는 것은 농사나 사냥의 관건이 되었다. 마침내 이 절기를 파악하여 경제적 활동에 이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간은 상대적으로 자연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이 자신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시간에 대한 과학의 역사를 형성시켜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인류는 참으로 그들방식으로 시간의 변화를 터득해 나갔다. 해나 달이 일정한 주기 아래 움직인다는 것과 강물의 수위가 규칙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등을 이용해서 사람들은 노동에 적합한 절기를 알아 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집트를 들 수 있다. 이집트의 달력은 나일강과 함께 탄생했다. 성서에서조차 'The River'라고 불리우는 나일강은 이집트인에게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종교만큼이나 절대적인 것이었다. 전 이집트의 땅을 관통하여 흘러내리는 나일강은 상업로이면서 피라밋 사원을 짓는 건축재료의 운반로이기도 했고, 나일강주변의 비옥한 땅에서 농사가 번창하여 전 이집트인들을 먹여살렸다. 전 이집트인들의 경제적 활동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나로 결속되었던 것이다. 일찌기 고대 이집트 제국이 강력한 정치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와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나일강은 매년 일정한 시기마다 수위를 달리 했다. 나일강의 수위변화는 곧 이집트인들의 삶의 변화이었다. 농업이 사회생산의 주종이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주기적으로 나일강물의 수위가 변화해가는 것을 보면서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데 용이한 '절기'들을 구분했으며, 이를 기초로 인류 최초의 달력을 만들기까지 했다.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고원과 북동쪽의 총강우량 강설량이 집결, 약 4천2백마일이나 흘러내리는 나일강의 리듬은 '나일강의 미터(Meter)', 이집트인의 달력을 제공했다.
●―1년을 365.25일로 정의
나일강의 범람이 있는 시기(6월말~10월말)와 이 범람에 의해 토질이 비옥해져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는 시기(10월말~2월말), 수확하는 시기(2월말~6월말)가 뚜렷이 구분되었다. 사람들은 이 절기에 따라 함께 움직였다.
여기서 '나일강의 달력'을 몇달만 기록해 보아도, 이것이 달의 주기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달의 주기에 집착했던 고대 바빌로니아, 그리스 사람들과는 달리 달을 척도로 하는 주기 측정방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일찍부터 30일로 된 12달로 각 계절을 구분했던 이집트인들은 1세기를 넘기면서 각각의 달들이 점점 더 '절기'와 어긋나는 사태를 맞이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절기력' 외에, 보다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하기위해 해(年)를 기록하는 또다른 '표적'을 찾았다.
어느해인가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Sirius)가 아침에 해가 뜨는 것과 함께 곧장 떠올랐다. 이러한 현상은 매년 나일의 범람기에 똑같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이 별을 표적으로 해서 태양의 주기를 관찰했다. 이렇게 하여 B.C. 4241년경, 1년 3백60일에 달에서 제외된 날들(epagomenal days) 5일을 더하여 1년을 3백65.25일로 정의함으로써 나일력 즉 이집트력이 탄생되었다.
이 나일력은 이후 율리우스 시저 시대에 공식적으로 수용되면서 율리우스력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후 부활절로 절기들을 정하는 과정에서 발전된 그레고리력을 통해 약간의 수정을 거치지만, 율리우스력은 중세와 17세기에 코페르니쿠스의 행성표가 쓰여질 때까지 지속될 만큼 '정확한' 달력이었다.
●―달의 유혹
이에 비해 '태음력'은 과학적으로 정확성도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용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달의 신비스러움에 매료당했다.
매일밤 다르게 나타나는 달의 모습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적막한 밤하늘에 외로이 떠서 산과 들과 바다를 비추는 풍경은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움과 매력을 주었고 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 오묘했던 것은 여성의 생리주기가 달의 주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달의 유혹에 따라, 상상의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달에 대한 사람들의 지극한 관심은 결국 '달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달의 주기에 따라 시간을 측정하기 시작했고 달의 주기에 따라 종교적 의식과 일상적 활동을 해나갔다.
달의 신비스러움은 자연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지배받고 있었던 고대국가 사람들이 '달의 주기'를 척도로 시간을 측정하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종교적 의식'이 사회생활에서 중요했던 나라들일수록 태음력을 만드는 데 집착했고, 태음력은 또한 오랫동안 이들 사회에서 엄격하게 지켜져 왔던 것이다.
바빌로니아와 도시국가였던 고대 그리스는 '달의 주기'를 기초로 '태음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인들은 19년을 주기로 하는 '메톤사이클(Meton cycle)'을 만들 수 있었지만, 너무 복잡해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달의 궤도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도로부터 약 5도 정도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달이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항성월 주기는 약 28일. 따라서 태양력에서 1달을 30일이나 31로 잡는 것과는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한 달을 29일이나 30일로 잡은 태음력에서는 윤달과 윤년을 끼워넣음으로써 그 편차를 메꿨지만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더우기 달력을 만드는 목적이 '공동의 시간표'를 작성, 인간들간의 단결력을 높이고 장사를 한다거나 생산을 하는 등의 공동의 계획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을진대, 태음력은 이러한 것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윤달과 윤년으로 혹은 '축제의 달'로 예외달을 삽입하는 것은 달력의 일관성을 저해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활동에 봉사할 수 없었던 태음력은 결국 이들 나라들이 일상활동의 용이함을 우선으로 하고자 할 때와 보다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자 할 때에 있어서는 '태양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상생활과 공동생활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태음력을 계속 고집해 온 민족들도 적지 않다. 회교국가들의 초기에는 초생달이 새겨져 있는 것들이 유독 많다. 이는 태음력을 가장 완강하게 고집해 온 이들 나라들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가 편리 압도한 회교국
달의 신비스러움을 이용할 때 종교예식의 성스러움은 한결 더 돋보였으리라. 모하메드의 예언과 코란의 지시에 고집스럽게 복종하려는 회교도들은 종교에 지배되는 다른 종교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달의 신비스러운 변화를 곧 신의 계시로 여기기까지 했다. 성스러운 예식인 라마단의 단식은 초생달이 뜨면서 시작되었고 초생달과 함께 끝을 맺었는데, 초생달은 달력전체의 표준점 역할을 담당했다. 회교도들은 달의 주기에 따라 신이 정해준 종교적 예식의 날들을 지켰다. 코란에는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위해 시간을 고정했다"고 적혀 있다.
이리하여 29일과 30일 주기로 12달로 구성된 회교력이 탄생하였다. 회교력은 라마단의 단식과 메카의 순례절을 표준점으로 하여 지켜졌다.
하지만 매해, 전(前)해보다 10일 내지 11일 가량 기념일이 먼저오는 오차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오차를 극복하기 위해 달의 변화를 보다 정확하게 관측하고자 했는데 이는 '새로운 달을 보기 전에는 단식하지 말라'는 모하메드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회교력은 절기와 규칙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 않아 생활에 많은 불편을 주었다. 몇몇의 이슬람 종파들이 전통에 반대하여 이러한 회교력의 불합리성을 시정하기 위해 '관측'이 아닌 달력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다수 회교도인들은 이를 오직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회교도들이 오랫동안 '태음력'을 지켜왔다는 사실은 '종교'가 이들에게 차지하는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회교국가들의 분쟁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가 '종교'에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이해가 갈 듯하다.
그러나 이슬람의 이러한 완고함도 격렬한 변화를 수반한 물결앞에서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태음력을 표준으로 하던 이슬람사회도 결국 실용성이 높은 태양력을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6년 터키에서 '살탄'(Sultan, 회교국 군주)의 지위에 대해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새시대를 열었던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rürk)는 오랜 풍습에 대해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새로운 규범과 법을 제창하기도 하고 전통복장의 착용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한편, 이슬람 음력을 폐지하고 서양의 태양력을 수용했다. 이것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실용성'에 발맞춘 회교도들의 대변화의 시작이었다.
이렇듯 이슬람교도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가장 완강하게 태음력을 고집해 왔다.
●―부활절 고정 안돼 혼란일어나
종교를 중요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기독교 국가들의 사정은 다소 차이를 보였다. 기독교인의 달력도 또한 29일과 30일을 주기로 한 12달, 3백54일로 구성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초생달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달(month)을 시작했던 유태인들 역시 생활상에서 많은 불편함을 받았지만, 신앙을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월절 춘분 뒤의 봄의 축제'를 기준으로 태음력을 고수했다.
예수의 죽음 이후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의 음력 날짜에 의해 다른 날들을 고정시키고자 했다. 신약성서에는 유월절이 금요일이고, 부활절은 일요일로 명시되어 있다. 성서에 충실했던 기독교인들은 이에 따라 부활절을 지키고자 했으나 부활절은 해마다 반드시 '일요일'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예수를 믿는 전 기독교인들사회에서 부활절을 지키는데 혼란이 발생했다.
철저히 음력날짜를 고수하여 주에 관계없이 음력14일에 부활절을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 정교와 로마교회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던 것. 많은 나라에서 부활절 분쟁이 일어났다. 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구세주가 부활한 날을 지키는 데 있어서 만큼은 서로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로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함에 따라 야기된 혼란과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기독교사회는 부활절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소아시아 니카에아(Nicaea)에서 열린 최초의 기독교 총회에서 '음력을 지키는 것과 일요일을 지키는 것'을 골간으로 하여 '3월 25일 이후 보름달이 뜬 후 최초의 일요일'로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었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태음력과 함께 필수적으로 태양력을 사용해야만 했다. 결국 태양력을 태음력과 동시에 사용하는 안이 채택되어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 태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일에 관여한 기독교도들의 의식. 표면상 '부활' 예식날짜를 둘러싸고 율리우스력이 수용되던 이면에는 종교적 전통과 함께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일하는 자'로서의 기독교인의 철저한 실용적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기독교인들은 현재까지도 농민·상인의 일상적 활동을 위해 태양력을 사용하면서도 종교적 예식을 위해서는 태음력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사회에 율리우스력이 보급되면서 달력은 더욱 정교한 변모의 길을 걷게 된다. 율리우스력이 널리 이용되기 시작하자 이제는 율리우스력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태양력은 1년이 3백65일 5시간 48분 46초인데 반해, 율리우스력은 365.25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현재의 양력보다 11분 14초가 길었다. 매년 11분이 누증되어감에 따라 해를 거듭할수록 시차가 발생했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1582년, 로마교황 그레고리 13세는 1백년마다 마지막 해에 윤일을 빼게 함으로써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력으로 개정했다. 이로써 태양력은 보다 정확해지고 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서양인들에 의해 현재의 달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달력 변화로 워싱턴의 생일도 바뀌어
결국 달력의 역사는 태음력과 태양력으로 각기 발전해 오다가 정확하고 실용성이 높은 태양력으로 통일되어 온 것이다. 태양력의 사용으로 인류는 보다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하고 보다 용이하게 공동의 활동과 계획들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것이라 해도 한 사회에 그것이 수용되기까지에는 많은 갈등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한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되어 오기까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속에 뿌리내린 이제까지의 많은 전통과 양식이 있는 반면, 새것의 수용은 이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개정된 그레고리력의 전세계적 수용이 있기까지 많은 나라에서 갈등과 혼란이 있었다. 로마와 다른 기독교국가들 사이의 종교적 사회적 갈등은 그레고리력의 실용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의 사용을 거부하게 했던 것이다.
합리성과 실용성을 중시했던 청교도의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도 엄청난 갈등을 수반했다. 식민지 미국은 이주 초기부터 사용해왔던 달력대신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달력은 이전의 것보다 11일분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갑자기 11일분의 날짜가 더해지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면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단지 날짜가 바뀌었을 뿐이었는데 마치 자신의 생이 어느날 갑자기 열하루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라 여겼다.
달력의 변화로 인해 겪는 보다 심각한 양상들이 모든 미국인에게 나타났다. 미국인의 영웅이었던 조지 워싱턴의 생일이 바뀌는가 하면, 갑자기 11일이 더해짐으로써 주인과 노예들 사이에 월급을 둘러싼 분쟁도 많이 일어났다. 미국인의 이제까지의 일상을 온통 뒤흔들면서도 태양력은 수용되어진 것이다.
로마에서 개정했다는 이유때문에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던 동방 그리스 정교 교회도, 청교도의 나라 영국도, 그의 식민지 초기에는 수용을 거부했고 그 수용의 과정에서 많은 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태양력이 지닌 합리성과 실용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실용성이란 점에서 태음력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던 태양력은 마침내 전 세계 인류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달력으로 된 것이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세계 공통의 달력인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별 어려움없이 날짜를 계산하고 자신과 세계를 의식적인 활동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인류는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많은 시간을 과학적 탐구에 투여해 왔다. 거기에는 인류의 자연과의 대항의 한 단면으로서의 과학의 역사가 배어있으며, 인류의 지혜가 전수되어온 과정이 얽혀있다.
각 나라 각 시기마다 무엇이 그 사회에서 중요한 일인가, 무엇이 중심적인 가치관인가에 따라 태음력과 태양력의 역사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인간의 경제적 활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속에서 발전되어 온 것임에도 틀림없다.
쉽고 간단하게 치부해버리는 사실 하나에도 이렇듯 인류의 과학사, 삶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
날마다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현대사회. 이제 우리 시대의 과학은 또 어떠한 인류역사와 함께 그 내용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관심을 현재로, 우리의 삶 더욱 가까이로 여행시켜 보는 것은 더욱 흥미롭고 유익한 일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