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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vs 배트맨

사이비 과학이 만든 가면 속의 영웅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의 출현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것이 한편의 영화 속 이야기일지라도. 최근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과 오랫동안 인기를 끈 배트맨 시리즈에서 슈퍼 히어로의 모습을 만나보자.


수많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빨간 보자기를 두르고 담장에서 뛰어내리도록 만든 장본인 슈퍼맨. 슈퍼맨은 어린이들의 영웅이었을뿐 아니라 모든 남성들의 우상이자 백마 탄 왕자 이상으로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 히어로’였다. 그러나 미사일에도 끄떡없던 슈퍼맨은 그만 말에서 떨어지면서 허리를 다쳐 반신불수가 돼버리고 말았다.

슈퍼맨 이후 최고의 슈퍼 히어로는 검은색 고무 갑옷을 입고 등장한 배트맨이다. 첨단 장비로 무장한 배트카로 자신의 재력을 한껏 과시한 배트맨은 중년의 원숙미를 물씬 풍기며 고담시 밤거리의 황태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는 법.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뽕 브라와 코르셋의 복합 기능을 갖고 있는 고무 갑옷으로도 처지는 가슴살과 늘어나는 뱃살을 감추기 어려웠는지 배트맨의 활동은 뜸해졌다. 그리고 밀레니엄의 새 시대에 슈퍼 히어로의 세대교체를 외치며 등장한 새파란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스파이더맨이다.


과학과 미신, 그리고 오만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은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 시리즈처럼 현실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허무맹랑한 영화다. 슈퍼맨처럼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 두 영화가 갖고 있는 오류의 핵심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했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피나 심장을 먹는 식으로 동물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면 그 힘까지 얻을 수 있다는 미신을 가졌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경험과 이성적 사고가 중시되기 시작했고, 점점 미신들은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하면서 영영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 세상에 늑대의 발자국에 고인 물을 마시면 늑대 인간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수천년을 이어온 미신의 생명력은 우리의 예상보다 끈질겼으니, 미신은 최대의 적인 과학과의 동침을 통해 ‘사이비 과학’이라는 사생아를 출산했다. 슈퍼거미에게 물린 피터 파커가 거미 인간이 된다는 스파이더맨의 설정은 그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슈퍼 거미의 유전자가 피터 파커의 유전자에 침투한다는 그럴듯한 포장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여름이면 매일 밤 모기에 시달리는 사람들 중에 어째서 돌연변이 모스키토맨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 것일까. 사실 영화를 통한 과학과 미신의 만남은 끊임없이 시도돼 왔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속편을 개봉했던 ‘블레이드’의 ‘흡혈귀 바이러스 이론’으로 흡혈귀에 물린 사람이 흡혈귀가 되는 현상을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설명했다.

배트맨은 과학 기술과 자본의 힘으로 상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오만의 산물이다. 과학 기술에 대한 할리우드의 황당한 상상력은 미국의 달 착륙 이후 꽃을 피웠다. 저 멀리 두둥실 떠있는 달에도 깃발을 꽂았는데 무엇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런 기류를 타고 탄생한 최초의 ‘기술 집약적 자본주의 슈퍼 히어로’는 제목에서부터 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아닐까. 얼마 후 ‘바이오닉 우먼 소머즈’가 태어났고 슈퍼카 키트를 앞세운 ‘전격 제트 작전’과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헬리콥터 ‘에어 울프’가 제작됐다. 배트맨은 기술 집약적 자본주의 슈퍼 히어로의 종합 선물세트라 할 수 있다.

고담시 최고의 재벌인 브루스 웨인의 재산은 기관총에 흠집도 나지 않는 고무 갑옷과 3단 변신 로봇을 능가하는 슈퍼카에 대해 “돈 많은 놈이 무엇을 못하겠어”라는 관객들의 합의를 이끌어낸다.

우리의 사회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외부의 강력한 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때다. 대표적인 예가 마징가 제트다. 외계에서 날아온 괴물 로봇이 도시를 파괴하지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첨단 무기인 전투기와 미사일은 무력하기만하다. 그럴 때‘짜잔’하고 등장해 외계의 강력한 힘과 맞설 수 있는 것은 마징가 제트뿐이다.

‘슈퍼맨2’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슈퍼맨2의 악당은 슈퍼맨의 동향 출신 외계인인 죠드 장군이다. 죠드 장군은 덜 떨어진 두명의 부하를 데리고 아무런 이유없이 지구 정복에 나선다. 그런 죠드 장군에 대항하는 미국의 태도는 실로 황당하다. 겨우 수송 헬기 1대와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파견해 M16 소총과 90mm 무반동총 몇 발을 쏴 보고는 항복이라니. 격납고에 쌓아둔 전투기들과 미사일은 폼이란 말인가. 또 어째서 미국의 정복이 세계 정복인가. 미국이 항복하면 다른 나라들은 저항도 안 해보고 자동 항복한단 말인가.

스파이더맨의 그린 고블린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리한 실험으로 초인이 된 그린 고블린은 뉴욕 경찰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존재다. 그리고 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는 스파이더 맨 뿐이다. 그러나 철통 방어를 자랑하는 뉴욕의 방공망은 어째서 그린 고블린이 설치는 것에 속수무책이 었을까. 그렇게 허술하니 911 테러가 성공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빌딩 사이를 낮게 비행하는 물체를 레이더가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면 할말 없지만, 그러나 서울이었다면 스파이더맨이 도착하기도 전에 63빌딩 옥상의 발칸포가 그린 고블린을 묵사발로 만들어 놨을 것이다


영웅이 필요한 어두운 사회

우리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두번째 이유는 온갖 법과 제도로 무장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사회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배트맨의 고담시는 현대 도시의 어두운 단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는 항상 어둡고 음침한, 시대를 알 수 없는 1960년대 풍의 건물과 20세기말의 첨단 기술이 공존하고 있다. 박물관, 천문대, 자유의 여신상 등 거대한 도시를 상징하는 모든 건물들이 존재한다. 시장도 있고 경찰도 있다. 그러나, 공권력은 무너져 버린 지 오래고 도시는 갱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도시의 사람들은 법 이상의 강력한 힘을 요구한다. 한심한 경찰은 사건이 터질 때 마다 배트맨에게 신호를 보낸다. 배트맨은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고담시의 실제적인 권력인 것이다.

그러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경찰력이 사회의 어두운 곳까지 힘이 미치고 법이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면 악당과 싸우는 슈퍼 히어로 역시 공권력에 대항하는 범죄자가 돼버릴 테니까.

슈퍼 히어로 영화가 꾸준히 생산돼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사회를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하지만 범죄는 꾸준히 증가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앞으로도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이 없다는 이런 생각들은 영화 속에 그려진 미래의 도시들을 범죄로 가득 차 있거나 거대 기업의 지배를 받는 디스토피아로 만들어 버렸다.

스파이더맨의 공간적 배경은 세계 최대의 도시인 뉴욕이다. 미국 문화의 중심지이며 세계금융과 무역의 중심지, 자본주의의 상징 등으로 불리는 뉴욕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어두운 구석을 갖고 있는 도시다. 할렘가에는 1백만 이상의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엉키고 설킨 어두운 뒷골목들은 범죄의 사각 지대다. 그곳이 바로 스파이더맨의 활동 무대다.


슈퍼 히어로의 코스튬
거미줄 스판 옷 vs 갑옷 같은 고무 옷

스파이더맨은 몸에 착 달라붙는 얇은 스타킹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강철보 다 10배 강하고 기존의 어떤 섬유보다 탄 력이 좋다는 거미줄 소재다.


▶▶▶ 슈퍼 히어로들이 가장 애용한 스타일은 슈퍼맨이 입었던 몸에 착 달라붙는 스판덱스 재질의 옷이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스파이더맨에 등장하는 고등학생 피터 파커는 ‘영웅에게는 그에 걸 맞는 코스튬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스파이더맨의 거미 옷을 직접 디자인한다. 피터 파커가 처음 제작한 옷은 빨간색 운동복을 개조한 헐렁한 옷이었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가 되자 스파이더맨은 몸에 착 달라붙는 얇은 스타킹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이 옷은 담장이 무너지는 충격에도 찢어지지 않으며 악당들과의 격렬한 싸움 후에도 땀이 차질 않는다. 가끔씩은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범죄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보온 때문인지 속옷처럼 입고 다니기도 한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옷을 산 것인가. 사지 않았다면 배트맨처럼 부잣집 아들도 아닌 피터 파커가 어떻게 그런 옷을 구한 것인가. 그 해답은 피터 파커의 몸에서 나오는 거미줄에 있을 것이다. 거미줄은 같은 두께의 강철보다 10배나 강하고 기존의 어느 섬유보다 탄력이 좋다. 한가닥의 거미줄을 수십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리고 보온성과 수분 배출 능력도 뛰어나 속옷감으로도 그만이다. 그렇다면 피터 파커는 매일밤 동거중인 자신의 친구 몰래 자신의 몸에서 거미줄을 뽑아내 옷감을 짜낸 것일까.

반면 배트맨은 부잣집 아들답게 돈들인 티가 팍팍 나는 메탈 블랙의 고무 옷을 입고 등장한다. 자신의 존재를 상징하는 코스튬이라기보다 갑옷에 가까운 박쥐 옷에는 정말이지 없는 기능이 없다. 방탄은 기본이고 전기톱에 레이저 발사장치, 신발 안에는 빙상 격투에 대비한 스케이트 날까지 숨겨져 있다. 망토는 화염을 막아주는 방화벽인 동시에 박쥐 날개처럼 펼쳐져 행글라이더 역할도 한다. 배트맨이 갖고 있는 능력의 90% 이상이 박쥐 옷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방탄 능력이 뛰어나도 고무 재질의 옷을 입고 기관총 앞에 서는 것은 무리다. 또한 그런 무거운 옷을 입고는 격투는 고사하고 걸어 다니기도 힘들 것이다. 배트맨은 총과 대포에 몰락한 중세 기사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배트맨의 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박쥐 갑옷과 배트카를 제작한 집사 알프레드의 정체다. 도대체 뭐하는 노인이길래 첨단 기술과 현대 디자인에 대해 그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단 말인가. 영화를 보면 알프레드가 영국 출신이라는 얘기가 잠깐 나온다. 그것으로 미루어 알프레드는 007로 유명한 영국 정보부 MI 6에서 요원들의 특수 장비들을 제작했던 과학자가 아니었을까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본다.


줄타기의 명수
거미줄 vs 강철 케이블


▶▶▶ 스파이더맨은 줄타기의 명수다. 거미줄을 이용해 빌딩 숲을 누비는 장면은 스파이더맨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슈퍼 거미의 유전자로 인해 파커의 손목에 거미줄 샘이 생겼다는 것까지 봐주자. 그러나 건너편의 빌딩까지 힘차게 거미줄을 분출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거미줄을 발사하는 거미는 없다. 거미줄은 거미줄샘에서 분비된 액체 상태의 단백질이 공기와의 만남으로 섬유가 되면서 바람에 날리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스파이더맨이 가끔 완성된 거미 그물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세상에 어느 거미가 완성된 거미 그물을 뚝딱 내 놓을까. 거미는 거미 그물을 짜기 위해 몇시간의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런 것 다 무시하고 피터 파커의 손목에 유별난 거미줄샘이 있다고 가정하자. 거미줄은 단백질이다. 그렇다면 한번 거미줄을 발사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얘기인데 피터 파커는 어떻게 단백질 소비를 감당하는 것일까. 참고로 많은 거미들은 자신이 만든 거미줄을 먹어치우는 방법으로 거미줄을 재활용한다.

배트맨 역시 스파이더맨에 뒤진다고 하면 서러워 할 줄타기의 명수다. 영화 속에서는 배트맨의 추락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오는데, 그 때마다 배트맨은 갈고리가 달린 강철 케이블을 발사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배트맨의 줄타기는 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한 것이다. 배트맨이 추락하는 속도로 미뤄 볼 때 줄에 걸리는 순간 강철 줄을 잡고 있던 팔이 빠져나가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배트맨이 떨어진 높이가 50m, 장비를 포함한 배트맨의 몸무게가 1백kg, 배트맨이 줄에 걸리는 순간 강철 케이블에 탄성이 작용하는 시간을 0.1초라고 가정하자. 배트맨이 자유 낙하 후 50m 지점을 통과할 때의 속도 v는 공기의 저항을 무시하면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식으로 구할 수 있다(1kg을 10N으로 정의).

● 위치에너지 = 운동에너지
9.8×m×h = 0.5×m×${v}^{2}$
v는 약 31m/s(m은 배트맨의 질량, h는 낙하 높이)

● 충격량 = 질량×속도 = 배트맨의 팔에 가해지는 힘×시간 
배트맨의 팔에 가해지는 힘
= (1백kg×31m/s) / 0.1s = 310000N

배트맨의 이같은 행동은 허리에 강철 케이블을 매달고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똑같다. 이후의 배트맨 시리즈에선 갈고리가 달린 줄을 강철 케이블 대신 번지점프용 고무줄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배트맨의 다음 시리즈를 기대해보자.


슈퍼히어로의 콤플렉스
짝사랑에 빠진 소심한 고등학생 vs 나약함 감추는 박쥐 가면


▶▶▶스파이더맨이 짝사랑하는 메리 제인 앞에서 가면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슈퍼맨처럼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덜 떨어진 남자로 비춰진 피터 파커의 모습으로는 메리에게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슈퍼 히어로와 스파이더맨의 가장 큰 차이점은‘스파이더맨은 슈퍼맨이 아니다’이다. 평범한 나무꾼이 천년 묵은 산삼을 캐먹고 내공이 갑자기 늘어난 고수가 되듯, 거미에 물린 피터 파커는 얼떨결에 슈퍼 히어로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슈퍼 히어로가 됐지만 피터 파커란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지구 평화보다는 옆집 여학생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소심한 고등학생이다. 슈퍼 거미의 힘을 깨달은 피터 파커는 벤 아저씨와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날이 새는 줄 모르고 빌딩 숲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슈퍼맨이라면 악당을 처단하기보다는 신나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다. 그 힘을 이용해 돈벌이도 좀 해보고 싶다.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우쭐거리고 싶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평범한 사람이 초인적인 힘을 얻었을 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다른 슈퍼 히어로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잔잔한 감동이다.

배트맨의 박쥐 가면은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감추고 슈퍼 히어로의 정체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다. 동시에 슈퍼 히어로와 평범한 인간이라는 이중성 사이의 경계선이다. 가면을 쓰지 않은 브루스 웨인은 보통 사람보다 좀더 몸이 날렵하고 싸움을 잘하는 정도다.‘ 배트맨2’의 가면 무도회 장면에서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은 두 사람은 배트맨과 캣우먼이다. 두 사람은 춤을 추면서 가면이 지겹다고 얘기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의 몸을 끌어안지만, 가면을 쓰는 순간에는 적으로 돌아가 싸워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때문에 배트맨은 캣우먼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자신의 가면을 찢어버린다.

배트맨 역시 슈퍼맨처럼 숙명적으로 타고난 영웅은 아니다. 어린시절 부모가 갱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브루스 웨인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강력한 힘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철저한 자기 관리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그리고 알프레드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력자를 통해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

악당을 물리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구 평화를 위한 사명감보다는 언제나 매력 있는 정서인 복수심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매일 밤 악당을 찾아 밤거리를 헤매는 일은 신성한 의무가 아닌 저주와 형벌인 것이다.


영웅보다 개성 넘치는 악당들
본능에 충실한 자유인 vs 버림받은 이단아들


▶▶▶과거의 악당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지구를 정복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지구 정복에 성공한다면? 기껏해야 부귀 영화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런 것을 원한다면 악당 노릇을 때려 치우고 고리 대금업을 하거나 카지노를 운영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의 악당은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다. 그들의 목적은 더이상 부귀영화가 아니다.

슈퍼 히어로 시리즈의 성공 여부는 악당에 달려있다고 한다. 슈퍼히어로는 일정 수준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슈퍼 히어로로 태어난 이상 용감하고 정의로워야 하며 법의 심판에 악당들을 넘겨야 한다. 그러나 악당에 있어서는 기존의 틀을 깨는 어떠한 상상도 허용된다. 감독의 파격적인 상상력은 악당 캐릭터에서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그린 고블린은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폭력성 그 자체다.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소위‘열 받는’일들을 겪지만 그것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둔 채 살아간다.

노만 박사 역시 마찬가지다. 군부 실력자에 의해 수년간 이끌어왔던 프로젝트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고 경쟁자들에 의해 회사의 경영권을 빼앗겨도 노만 박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참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 노만 박사의 분노를 표출하는 악당이 바로 그린 고블린이다. 노만 박사는 그린 고블린의 가면을 쓰는 순간, 자신이 받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못하게 하는 사회의 굴레를 벗어나게된다.‘ 강한 힘에는 의무가 뒤따른다’는 벤 아저씨의 유언 한마디에 자신의 정체성조차 찾지 못한 채 악당들을 찾아 방황하는 스파이더맨 보다는 그린 고블린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배트맨은‘악당 시리즈 영화’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개성 강한 악당들이 등장한다. 태어나자마자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은 펭귄맨. 그는 결국 인간임을 포기하고 고담시의 모든 부모에게 선전 포고를 한다.

남성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캣우먼. 그녀는 인간의 나약함과 사랑 앞에서 무너질지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가면 속으로 철저하게 감춘다. 인간 이중성의 상징인 투 페이스와 과대 망상증 환자 리들맨, 그리고 미스터 프리즈.

그 중에서도 최고의 악당으로 꼽히는 이는 배트맨을 창조한 장본인이자 배트맨에 의해 창조된, 웃는 얼굴 속에 한없는 슬픔이 가려진 전위 예술가 조우커이다.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그의 모습에서는 지구 정복이라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악당 대신 유쾌한 장난꾸러기의 모습이 보인다.

 

200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노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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