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 창고가 아닌 생생한 지식의 보고이며, 그 활용장소이기도 하다
5억년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대한 골격의 공룡을 만나게 된다. 또 세계최고(最高)의 새인 시조새((始祖鳥)도 볼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진딧물의 한 종류를 대하거나 공장폐수의 수질을 나타내주는 박테리아를 목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먼 옛날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공룡에서 미세한 박테리아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의 생명체와 그들의 생존환경들을 보존, 세계도처에서 몰려온 관람객들을 경탄케 하는 것은 다름아닌 영국의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2천8백만점에 달하는 전시물
위에 든 몇가지 예는 무려 2천8백만점에 달하는 엄청난 전시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30m쯤 되어보이는 고래의 실물크기 모형도 있고,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아기공룡도 있다. 새나 나비는 그 수를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을만큼 방대한 양이 수집, 전시되고 있다. 미소(微小)생물은 플라스틱제 확대모형을 만들어 볼 수 있게 했는가 하면 인체의 구조와 신비한 메카니즘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 자연사박물관은 하루에 7천여명이나 몰려들어 항상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대영박물관과 함께 런던의 중심가에 위치한 데다가 워낙 그 진열내용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관람객들 중에는 학생들도 많아 노트를 펴들고 메모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한마디로 자연사박물관은 거대한 자연학습장인 셈이다.
그러나 자연사박물관이 단지 전시기능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수집품을 전시하는 일 이외에도 연구를 하고, 외부의 자문에 응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는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을 비롯한 세계적인 자연사박물관도 마찬가지이며,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 등도 마찬가지다. 골동품 창고가 아닌 생생한 지식의 보고이며 그 활용장소가 바로 현대의 박물관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국의 자연사박물관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본래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의 한 부문에 속했다가 1881년 자연사에 관한 파트가 분리, 독립된 자연사박물관은 현존하는 동식물, 멸망한 과거의 동식물, 광물, 운석 등 수집품이 너무나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일일이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이처럼 수집품의 양이 너무나 방대해 순회전시가 불가피한 실정인데, 지금도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다고 한다. 새로운 수집품을 추가할 때 엄격한 선정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간 5만종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고, 이들을 박제로 만들고 건조시키는데 무려 85km에 해당하는 선반이 필요하다는 것.
이들 수집품들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외국으로 보내기도 한다. 즉, 연각 9백여개의 표본이 외국으로 보내져 과학자들의 연구에 요긴하게 쓰여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가장 중심이 되는 부문이라고 볼 수 있는 동물분야(zoology)를 예로 알아본다.
8백50여명의 연구직원들이 포진
"새 물고기 포유류 등 동물분야만 모두 16파트로 나누어져 있읍니다. 여기에 모두 85명의 연구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어요. 이 숫자는 전체 자연사박물관 연구직의 1할에 해당합니다. 85명의 연구직원들은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온 사람들인데, 예를 들어 원생동물류(protozoa)를 맡고 있는 5명중 4명이 박사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이곳을 평생의 직장으로 여기고 수십년간 근무하고 있읍니다."
동물분야의 책임자인 '링컨'박사는 무엇보다도 우수한 연구인력이 박물관의 기능수행에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곳에는 부속도서관이 설치돼있어 동물관계서적이나 그림 각종 자료 등이 보관돼 있다. 예를 들어 '찰스 다윈'이 사용했던 자료들이라든가 '쿠크'선장과 관련된 물건들이 정리돼 있다. 이처럼 수집품과 장서가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어야만 박물관의 연구기능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기능은 매구 광범위한데 동물의 분류작업으로부터 비롯된다. 생물의 종류를 확인하고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연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물론 분류작업은 컴퓨터시스팀에 의해 이루어진다.
분류업무 자체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최근 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서 기금을 제공, 정어리 청어 등의 분류책자를 만들고 있는 게 좋은 예인데 이들 생선에 대한 분류작업이 수산자원관리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농업이라든가 기생충대책, 독사(毒蛇)의 분별과 치료에도 분류학연구가 기여하고 있다. 또 게나 가재 새우 등의 유충들을 현미경으로 분석해 내기도 한다.
환경·공해 연구가 특히 활발
박물관의 연구작업은 자체의 필요성에 의한 것 이외에 외부의 위탁을 받아 수행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환경·공해에 관련된 분야가 그렇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의 공해상태를 조사한다고 했을 때 박물관의 연구팀은 생물의 서식상황을 깊이 있게 조사해낼 수가 있다. 그 결과 서식하고 있는 생물체의 종이 희박한 지역은 일단 공해요소가 있는 곳으로 간주할 수 있다. 거꾸로 특정의 생물체가 모여 사는 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도 연구대상이 된다. 달팽이가 많이 모여 있다거나, 나방류의 번식이 활발할 때 과연 어떤 생태계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쓰레기나 오물처리에 관련된 공해문제도 박물관팀이 자주 다루는 분야. 수천m 깊이의 바다속에 버릴 경우, 생물학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특히 방사능물질이나 중금속물질들을 버렸을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같은 공해물질을 동물이 먹은 뒤 다시 사람이 동물을 섭취했을 경우의 문제점은 어떻게 나타나는거 등등 박물관의 과학자들이 다룰 수 있는 테마가 매우 많다.
이런 환경·공해에 관한 연구는 때때로 다른 연구단체와 협력, 공동작업으로 수행된다. '심해의 쓰레기' 문제같으면 해양학회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된다.
박물관의 연구팀이 이처럼 외부로부터의 용역연구를 많이 하게 된 것은 연구예산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게 박물관측의 설명이다.
지난 1백여년간 중앙정부로부터 충분한 예산을 얻어왔으나 최근들어 불충분할 정도로 줄어들어 부득이 외부용역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사박물관의 입장료(2파운드, 약 2찬6백원)를 얼마전부터 받기 시작한 데서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참고로 자연사박물관의 1년 예산은 1천7백만파운드(약 2억2천만원)인데, 이중 5백만파운드가 건물유지비로 지출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직원들의 봉급으로 지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용역연구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는데, 최근에는 박물관쪽에서 적극적으로 외부기관에 위탁연구분야를 홍보하기도 한다는 것. 즉, 기존의 연구성과를 농업 의학 어류 공해 등으로 정리해 농수산부나 수도국 등지를 찾아다닌다는 얘기다. 이같은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학 등에서 해왔음에 비추어 오히려 박물관은 뒤늦게 나선 것이며, 박물관처럼 다양한 방면의 전문가그룹이 있는 곳도 드물다는 게 이곳 사람들의 주장이다.
'링컨'박사에 의하면 자연사박물관팀의 용역연구는 해외로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중동지역이나 홍콩 등지에서 환경·공해문제들을 대학연구팀과 공동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좋은 예. 이런 연구작업 중에서 '특정지역의 동식물보존방법'같은 테마가 박물관팀이 우수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료의 대여·교환도 중요한 기능
전시와 연구기능 이외에 자연사박물관이 맡고 있는 큰 역할이 '자문기능'이다. 학구적인 의문점은 물론, 상업적인 목적 등으로 많은 질문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이다. "조개속에서 이상한 게 나왔는데 이게 무엇인가" "농작물의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서 천적을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등등 각종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고 있는데 생물의 종(種)을 확인해주는 게 그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일이라고 한다.
한편 수집품을 외부에 빌려주거나 교환하는 작업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84년도 통계에 의하면 그해 외부에 빌려준 표본이 2천5백86건에 8만7천79개였다. 반면에 기증받은 품목은 27만여점에 달하고, 교환품이 1만1천8백여점으로 집계돼 외부와의 교류가 빈번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은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연구활동이 활발한 대표적인 자연사박물관으로 꼽히고 있다. 영국의 자연사박물관 이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워싱톤의 스미스소니언자연사박물관,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 빠리의 국립자연사박물관 등이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은 10만㎡의 연면적을 자랑하는 거대한 건물과 함께 생태(生態)전시 등 생명현상에 관한 의욕적인 표현과 지역사회에의 적극적인 교육활동으로 이름 난 곳이다.
아뭏든 평면적인 전시위주의 박물관에서 탈피해 연구·조사활동을 통해 과학의 발전은 물론, 인류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의 전형을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