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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가장 가까운 나라 티베트

험준한 대산맥과 가혹한 자연 폐쇄적인 정교일치의 두꺼운 베일에 싸여 있는 신비의 고원지대 나라.

티베트(Tibet)는 먼 옛날부터 '영혼이 모여드는 곳' 이라고 알려져왔다. 죽은 뒤 육체를 떠난 혼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의 상공에 모여 잠시동안 지냈다는 것이다. 그곳은 죽은자만이 엿보는 대지인 것일까.

 

평균고도 4천5백m
 

티베트는 평균고도가 4천5백m, 면적 1백20만㎢인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고원지대이다. 남쪽은 히말라야(Himalaya), 서쪽은 카라코룸(Karakorum·몽고제국 태종 정종 헌종시대의 수도. 오르혼강의 오른쪽 기슭 몽고의 서쪽 쿠론에 가까운 엘데니조에 그 유적이 있다) 북쪽에는 곤륜산맥, 동쪽은 횡단산구와 험준한 산들이 방패가 되어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거부해 왔다. 자연조건만이 아니다. 종교상 정치상의 벽이 그위에 펼쳐져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한때 중앙아시아 열기가 높았을 때도 이 티베트에 대한것은 몇 안되는 잠입기록이 나왔을 뿐이다.
 

신비에 싸인 고원-티베트불교를 1천년을 넘게 순수하게 살려오고있는 풍토,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절대권력자'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통치하는 수수께끼의 나라, 사체를 잘게 썰어 독수리에게 주는 조장(鳥葬)의 풍습, 그리고 야생의 당나귀가 달리고 있는 아시아의 대하의 원류부(源流部). 그곳은 사자(死者)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이 그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동경의 땅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티베트 자치구로 바뀌었으나 구세력에 의한 반란, 사회주의에로의 어려운 이행, 중국·인도 국경문제, 문화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 속에서도 이곳은 문을 굳게 닫은 채였다.
 

변화는 돌연히 왔다. 1980년에 각국 등산대의 티베트를 경유하는 원정이 허가되었다. 성지 '라사'(Lhasa)를 불교계 대표들이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사원을 순례하는 관광의 문도 넓혀졌다. 티베트 여행을 열렬히 염원한 어느 작가는 "포타라 궁전의 황금 지붕을 한번 보기만해도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표현했다.
 

바람이 분다. 묘한 소리가 흐른다. 지붕에 무수하게 장치된 작은 종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가까운 티베트의 높은 곳에 있으면 살아있는 사람도 바람에 실려오는 소리(행운을 가져온다고 하는)에 싸여 한없이 불타의 세계로 이끌려가는 것 같다.
 

산골짜기의 절터. 이런 사찰에 헌납된 마니석에는 '옴 마니 페메 훔' (연꽃속의 보석에 행운이 있으라)이라는 경문이 새겨져 있다.

 

융기하고 있는 고원
 

1852년의 어느날. 3년 전에 인도평야에서 관측된 히말라야 산맥중에서 제15봉으로 불리는 산이 자료상으로 계산해 볼때 2만9천2피트로 세계 최고봉임이 판명되었다. 이산은 측량을 지휘한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1790~1866)경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라 불리게 되었다. 산록의 티베트인들이 오래전부터 '초모란마'(나라의 어머니되는 여신)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이름의 산 바로 그 봉우리였다.
 

그로 부터 1세기. 1953년 봄 에베레스트는 남쪽에서 올라간 영국탐험대가 처음으로 정복했다. 북쪽으로 부터는 중국탐험대가 1960년 봄에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15년 뒤 티베트 족을 주로한 9명의 중국 등반대가 오르는 것 만으로도 힘이드는 정상에 금속재 관측 폴(Pole)을 날랐다. 그것으로 정상에서 7~12km 떨어진 해발 5천7백~6천8백m의 10개소 삼각점에서 동시측량하여 초모란마의 높이를 8천8백43.13m라고 확정했다. 이것은 쌓인 눈의 두께를 뺀 것이다.
 

이 시기에 초모란마 지구에서는 또다른 측량이 진행되고 있었다. 산록의 롱부크에 이르는 70km의 수준고저(水準高低)를 재조사하여 7~9년간에 평균 0.15mm, 최대 31mm의 상승이 확인되었다. 티베트의 문이 굳게 잠겨있는 동안에도 초모란마에 대한 조사는 계속된 것이다.

중심인물중의 한사람, 중국과학원지질연구소의 '류통숑'(劉果生)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력(重力) 측정의 데이타를 보면 초모란마지구는 정수압평형(靜水壓平衡)이 아직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즉 이 지구에는 남북에서 밀어 붙이는 힘이 아직 걸려 있으며 이 압력으로 히말라야 산맥은 금후에도 융기가 계속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현재 히말라야 산맥은 1년에 약 1mm씩 융기하고 있읍니다"
 

1980년 6월 북경에서 열린 친창 심포지엄이 있은 뒤에 세계의 과학자들이 티베트에 처음으로 초대되었다. 그들의 관심은 히말라야나 티베트를 융기시키는, 아시아 대륙과 인도대륙 두개의 플레이트의 상호운동 분석등에 집중되었다.

신비에 둘러싸인 고원은 지금 새로운 과학의 무대가 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고원에 산다
 

4월중순의 '시샤판마'산록. 5천m를 넘는 고원을 여행하느라면 머리위의 태양이 유난히 빛난다. 그 광선은 눈이 아플 정도다. 그러나 춥다. 눈산을 향해 평원위로 차를 달리지만 산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만큼 넓다.
 

시샤판마는 8천12m의 높은 봉우리다. 티베트어로 초지 또는 목초의 산을 의미하는데 이름 그대로 평원이다. 그것도 마르고 짧은 풀이 대지에 붙어있을 뿐인 그런 평원이다. 티베트고원 학술등산대에 의한 1982년의 조사에 의하면 이 고원의 4월의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2.2도였다. 그러나 일교차는 섭씨20도를 넘었다. 생물에는 너무 혹독한 환경인것 같다.
 

오후가 되면 산에 반드시 구름이 낀다. 그러나 대지 위에 쏟아지는 햇살은 풀린다. 황색 일색의 대지에 뭉게구름이 파도치듯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양떼인 것이다. 대지를 핥아나가듯이 짧은 풀을 먹어 치워나가는 한무리 또 한무리…. 이런 양의 무리 무리가 고원을 가로 질러가고 있다. 목초지의 산은 히말라야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알프스의 광경과 같다.
 

이런 광경에 익숙해지면 야생동물들도 분간하여 볼 수 있게 된다. 20세기 초두에티베트를 답사한 스웨덴인 '헤딩'을 감동시킨 야생당나귀. 늑대 ,여우, 사슴, 양, 토끼… 등등. 만날 수 있는 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눈에 띄었을 때 이것들은 마구 달리기 시작하여 작은 뒷모양을 보일 뿐이다. 그러나 소리도 없이 가까이 닥아오는 생물이 있다. 평원에 자동차를 멈추고 쉬고있으면 홀연히 사람이 나타난다. 땅속에서 솟아오른 것인지 두꺼운 모피를 걸친 양치기들이 가까이 닥아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나타난 생물을 보듯 여행자들의 일거일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지방질과 먼지가 섞여 검게 빛나는 그들의 피부와 의복, 그리고 얼굴. 잠깐 마주치는 눈길속에 희미하게 흔들리듯 하는 표정에서 어렴풋이 사람과 사람의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럴때 조용히 잠긴 공간이 더욱 실감되는 것이다. 그리고 야생이라는것이 그렇게 간단히 이해되는 것이 아니란 것도 통감하게 된다.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물기르기를 계속하고 있는 승려(위) 초모란마 산록 롱부크 승원의 폐허 벽에 남아 있는 불화.(가운데) 산마루에는 타르초라는 기도문을 쓴 깃발과 석총(石塚)이 있다.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돌이나 헝겊, 머리털 등을 공양한다.(아래)

 

문화혁명이 가져온 파괴
 

'셰카르'(티베트어로 '빛나는 수정'이란 뜻)의 거리는 라사에서 서쪽으로 7백km떨어져있다. 우뚝 솟은 암산과 그 바위를 따라 올라가는 건축물의 긴 대열이 눈길을 끈다.
 

1921년에 최초의 영국 에베레스트 등산대으로서 셰카르를 찾은 '노엘'은 이 셰카르 승원(僧院)의 위용에 감탄했다. 진흙과 돌이라는 단순한 재료로 마치 토대인 바위에서 그대로 솟아오른것 같이 견고한 모습의 건물을 만든 티베트인의 재능을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들이라고 찬탄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이 뛰어난 상상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바위와 건물의 선이 꼭 맞게 하는 기술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엄청난 노동력은 어떻게 조직된 것인가. 암흑의 중세를 생각케 하는 티베트의 사회체제를 생각하면 저절로 아팠던 역사로 되돌아간다.
 

셰카르승원은 문화혁명때 파괴되었다. 군력의 상징이라 하여 4개월 동안에 걸쳐 철저히 허물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않는 돌조각과 기와조각 무더기만이 쌓인 산더미 같다. 어쩐지 기분나쁜 소리로 우는 새들만이 날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셰카르의 거리는 지금 재건되고 있다. 산기슭에는 흰집들이 나란히 서고 있고 돌이나 모래를 실은 마차가 달리고 있다. '틴리'현의 현청 소재지로서 평지에 그 모습을 드러내 가고있다.
 

아시아의 산악지대에서 모습을 거의 볼수 없게 된 야생의 왕자 눈표점(위) 티베트어로 야생의 양과 목신의 이름 두가지를 뜻하는 냥. 지금은 거의 없어져 어느 이름도 전설이 될 상태다.(가운데) 유명한 히말라야 산 양귀비의 일종. 라마승은 이 꽃을 모아 염료로 쓴다.(아래)

 

문은 열리다
 

국경의 거리 '잔무'는 티베트의 새로운 얼굴이다. 잔무와 초모란마 사이에 '난파라'의 고개길이라는 빙설의 히말라야를 가로지르는 길이 있다. 옛날부터의 중요한 교역로로 1960년대에 중·인국경문제로 긴장되었을 때도 끊어진적이 없었다. 그리고 1960년대 말에는 중국·네팔 우호도로가 완성되어 두 나라의 교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
 

잔무는 셰카르에서 자동차로 하루거리다. 건조하고 벌거벗은 고원에서 3천m를 내려간 녹색의 계곡에 있다. 농도 짙은 공기와 후덥지근한 온기. 빨간 석남화와 흰 난꽃이 있는 곳. 하나의 다리가 두나라를 이어 놓고있다. 다리 이름은 우의(友誼)의 대교. 다리 중앙에 그어놓은 한줄의 붉은 선이 국경이다.
 

원색의 색도짙은 트럭이 붉은 선을 넘는다. 교역품을 진 사나이가 다리를 건너간다. 두나라 사람들의 왕래는 자유인것이다.
 

잔무에는 다방이나 자유시장도 열려있고 산뜻한 4층건물의 초대소도 마련되어 있다. 한편으로 길 옆에는 천막살이를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오지에서 온 건설노동자들인 것이다. 잔무도 건설도상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티베트를 보는 또 하나의 문이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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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시라이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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