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통해 약관 30세의 청년이 자수성가로 10억 달러의 부호가 된 예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윌리엄 게이츠 3세―그는 오늘날 미국 뿐 아니라 온 세계의 야심에 찬 젊은 컴퓨터 학도들의 우상이 되었다.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한 뒤 불과 10여년만에 세계 퍼스널 컴퓨터 소프트웨어계에 군림하게 된 이 노총각의 이야기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게이츠가 회장으로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고객명단에는 세계의 유수한 퍼스널 컴퓨터 메이커들이 망라되어 있다. IBM은 퍼스널 컴퓨터의 운용시스팀을 게이츠에게 의뢰했고 애플사는 매킨토시 컴퓨터용의 소프트웨어가 필요하게 되자 프로그램작성에 사용할 모델테스트를 그에게 맡겼다. 게이츠는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인 '레이디오 쇅'사의 모델 100 퍼스널 컴퓨터 설계를 도왔고 일본이 생산하기 시작한 일련의 새로운 컴퓨터용으로 MSX 시스팀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어렸을 때 부터 사업적 분위기에
1956년 미국 서해안 시애틀의 명문가정에서 태어난 게이츠는 어렸을 때 부터 비지니스의 재능을 키워 나갔다. 게이츠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대학 졸업생이된 그의 아버지는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있었고 전직교사인 그의 어머니는 '제일주간은행'중역이며 워싱턴대학 이사회의 이사로 있었다. 게이츠는 어렸을때 그의 두 누나들과 저녁 식탁에서 부모들이 사업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언제나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 는 오늘날 "배울 것이 많은 풍부한 분위기였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게이츠의 부모는 그를 학풍이 엄격하기로 이름날 사립 레이크사이드 중·고교에 넣었다. 당시 14세이던 게이츠는 이 학교에서 컴퓨터계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레이크 사이드중·고등학교 자모클럽은 1967년 자선경매 매상고를 지방 컴퓨터회사에 있는 컴퓨터와 전화로 연결된 터미널에 입력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7학년이던 게이츠는 이것을 보자 곧 컴퓨터에 미쳐 버렸다. 그는 얼마 뒤 학습시간표 프로그램을 고안해서 재능을 보여 주었다.
게이츠는 3명의 친구와 함께 레이크사이드 프로그래밍 그룹을 만든 얼마뒤부터는 그룹회원인 폴 앨런과 함께 밤중에 컴퓨터 센터로 몰래 들어가서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고 낮에는 체육시간을 빼먹으면서 컴퓨터에 열중했다. 개이츠는 교사에게 장차 자기는 백만장자가 되겠다고 다짐했으며 비지니스에 대한 그의 안식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당시 같은 나이 또래들은 컴퓨터 기술에 넋을 잃었으나 게이츠는 그 실용성에 눈을 돌렸다. 그가 8학년이 되었을 때 게이츠를 비롯한 레이크사이드학교의 프로그래머들은 2건의 상용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그중의 하나는 학교의 전산화된 급여프로그램의 개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속도로 교통량을 모니터하는 기계가 카드에 구멍을 뜷은 것을 계산하는데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게이츠는 다른 회원들보다 나이가 두살이나 어리다고 해서 한 때 이 그룹에서 쫒겨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곧 그 없이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다시 영입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게이츠가 조건을 내세웠다.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기지 않으며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대로 되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2년 뒤 이 그룹이 지방정부당국에 교통량계산 시스팀을 팔기 위해 회사를 차렸을 때 그는 사장이 되었다. 이런 결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그룹멤버중 당시 비지니스 잡지를 읽던 학생은 게이츠 뿐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차린 '트래프- 오-데이타'사는 첫번쨰 사업으로 시애틀 근교의 여러 군소도시의 교통 패턴을 조사했다. 그가 10학년이던 15세때 이 회사는 2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게이츠는 70년대초 학교의 연극반에 참여하느라고 약 1년간은 컴퓨터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돈벌이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우스 다 코타주의 '맥거번'이 미주리주의 '이글턴' 상원의원과 민주당의 공천후보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친구 한사람과 이들의 선거용 배지 5천개를 개당 5센트로 거둬들여 한참 뒤 물건이 귀할 때 기념품으로 개당 25달러씩 받고 팔았다.
1972년 첫번째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선을 보인 뒤 게이츠와 앨런은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소프트웨어 쪽으로 돌기로 결정했다. 앨런의 말을 빌면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1973년 게이츠는 명문 하버드대학에 입학했으며 1975년에는 법대 예과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한편 워싱턴대학에 들어 갔던 앨런은 이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게이츠가 있는 보스턴으로 달려 왔다.
하버드 중퇴하고 사업에
이들은 컴퓨터와 관련된 새로운 비지니스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행운의 여신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 왔다. 마침 대중 과학지 '포퓰러 일렉트로닉스' 표지기사에 MITS라는 뉴 멕시코주'앨버커키'시에 자리한 로킷 및 전자 기트 메이커 이야기가 실렸다. MITS는 인텔사에서 나온 새로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한 컴퓨터키트를 팔고 있었으나 이 기계를 프로그램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게이츠와 앨런은 큰 컴퓨터에 사용되는 프로그램밍 언어인 베이직(BASIC)을 압축한 개정판을 만들면 이 새로운 기계의 제한된 기억용량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사람은 하버드대학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6주일만에 퍼스널 컴퓨터용의 언어를 거뜬히 만들어 냈다.
이들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쳤다.그것은 고등학교 시절에 컴퓨터 사용료를 절약하기 위해 압축된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골이 나있었던 덕이었다. 1975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버드대학을 중퇴한 게이츠는 앨런과 함께 앨버커키로 내려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리고 MITS 사용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MITS 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휘말려들어 끝내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사는 막 일어서기 시작하던 퍼스널 컴퓨터업계에서 다른 고객들을 찾아냈다. 1979년 1월 게이츠와 앨런은 회사를 고향인 시애틀로 옮겼다.
얼마 뒤 게이츠는 오늘의 제왕자리로 올라 앉게되는 주요한 계기를 맞는다. 컴퓨터계의 거인 IBM과 인연을 맺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그 무렵까지 만해도 IBM은 대형이나 중형 컴퓨터에만 주력해 오다가 퍼스널 컴퓨터의 방대한 시장성을 비로소 내다 보기 시작했다. IBM은 자기들의 기계도 미쳐 마련하지 못했으나 이 시장에 재빨리 진출하기 위해서는 외부 기업으로부터 이것저것 사들이기로 결정하고 컴퓨터의 운용 시스팀(컴퓨터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체계)을 위해서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접근했다. 게이츠도 운용 시스팀을 갖고 있지 않아 IBM에게 어떤 경쟁회사를 소개 했다. 그러나 IBM이 다시 요청해왔을 때 게이츠는 돈냄새를 맡았다. 그는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사로부터 뒷날 MS-DOS로 발전시킨 운용 시스팀의 권리를 사들인 다음 플로리다주 '보카 레이턴'에 있는 IBM퍼스널 컴퓨터 본부로 날아 가서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큰 기업의 대열으로 도약하게 된다. 1980년에서 81년간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수는80명에서1백25명으로늘어 났고 수입은 곱절이 되어 1천6백만달러에 이르렀다. 게이츠는 IBM으로부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예컨대 대기업은 개발 프로젝트를 계힉대로 추진하는데 매우 유리하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신출나기 기업에게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IBM은 정규적으로 신제품 팀의 모임을 갖고 엄격한 마감기한을 설정하고 있었다. 게이츠도 마이크로소프트의 현행 개발공정을 "3분의 1은 IBM의 것이며 3분의 2가 마이크로소프트의 것"이라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1천 5백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연간 매출액 3억달러가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성공과정은 순탄한것만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비는 1986년 이른 봄에 닥쳐왔다.
뉴욕 교외에 있는 IBM 뉴욕 본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시애틀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게이츠는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된다. 4년전 게이츠는 '윈도우, 라는 소프트웨어를 구상하여 이것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퍼스널 컴퓨터 소프트웨어계의 정상자리에 올라 설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주요한 고객이 된 IBM사가 퍼스널 컴퓨터에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결국 연간 수백만개의 카피를 팔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자신에 차 있어서마이크로소프트사의 장기성장전략도 이 한개의 제품을 중심으로 계획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회의결과 IBM은 '윈도우'를 거절하고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설계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일순간 게이츠는 아찔했다. 그는 지난 날 IBM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다가 컴퓨터계의 이 거인이 기어를 바꾸는 바람에 나뒹굴어버린 수 많은 기업들의 대열에 끼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12년의 역사를 가진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렇게 맥없이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는 IBM 퍼스널 컴퓨터 사업부 책임자인 윌리엄 로우와 2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이 결정을 연기하는데 성공했다. 대신 게이츠는 IBM 엔지니어들과'윈도우'를 그들의 마음에 쏙 들게 개량하기로 했으며 IBM은 그 결과를 기다려 다시 채택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1년 남짓 지난 올해(1987년) 4월 2일 IBM은 퍼스널 컴퓨터계의 패권을 노리는 새로운 세대의 기계용 주요소프트웨어로 '윈도우'를 채택한다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래서 새로운 모델의 IBM 퍼스널 컴퓨터가 팔릴 때 마다 이 소프트웨어가 함께 묻어 팔려 나가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역할은 퍼스널 컴퓨터 소프트웨어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보장받게 되었다. 86년 3월 기업을 공개할 때 21달러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는 이 통에 급등하여 90달러 안팎으로 치솟았으며 45%의 주식을 가진 그의 몫은 약 10억달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기술천재라는 칭찬을
경쟁자들은 게이츠를 '기술천재'라고 부르지만 게이츠의 가장 큰 목표는 컴퓨터의 계산력을 '일반 대중'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게이츠와 앨런은 거의 모든 일에 뜻을 같이 했으나 가격을 매기는데 언제나 맞섰다. 앨런의 주장은 사람들이 좋은 제품에는 최고가격을 매겨도 즐거히 대가를 지불한다면서 '고가원칙'을 내세웠으나 게이츠는 싼 값에 많이 팔아 이용자를 늘이는 원칙을 고집하고 이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
애플사의 매킨토시 컴퓨터와 비슷한 그래픽을 사용하는'윈도우'는 IBM PC를 조작할 떄 필요한 명령을 단순화했기 때문에 종전보다 훨씬 쓰기가 쉬워졌다. 게이츠가 IBM으로부터 받는 로얄티도 크게 늘어 날 것이다. 언제나 가장 잘 팔리는 컴퓨터만을 위한 신제품(소프트웨어)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 소프트웨어계의 다른 메이커들도 '윈도우'와 제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IBM 호환기종 메이커들도 어쩔 수 없이 '윈도우'운용 시스템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내년 쯤에는 '로터스'사를 물리치고 퍼스널 컴퓨터 소프트웨어계에서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지난 날 IBM이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MS-DOS를 채택하자 이 운용 시스팀은 퍼스널 컴퓨터계의 표준이 되었으며 지난해까지 미국서 팔린 7 백 10만대의 퍼스널 컴퓨터중 58%가 MS-DOS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새로 나온 '윈도우'도 그 예를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IBM은 방대한 소프트웨어 개발 예산을 갖고 있으면서 게이츠에게 기대기로 결심한 이유는 게이츠가 '지능지수(IQ)계측기에 눈금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IQ 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이츠의 기억력은 학교연극용의 3페이지나 되는 독백 (独白)쯤은 한번 읽기만 하면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라고 그의 고등학교영어교사였던'앤스티븐즈'선생은 말하고 있다. 게이츠는 위대한 과학자, 실업가 및 정치가들의 자서전을 탐독하는 이유를 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경영은 '셜리'사장에게 맡기고 기술문제에만 전념하고 있으나 법률문제, 세법, 마케팅과 유통문제에서도 전문가적인 식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계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천재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나 게이츠만은 영리한 비니지스맨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게이츠의 완전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번 래번'은 1982년 게이츠가 "그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결정을 내린 뒤 마이크로소프트의 소비제품 그룹사장을 사임했다. '제임스 타운'은 마이크로소프트 사장으로 있다가 1년만에 게이츠에게 해고를 당했다. 그는 존경을 받던 경영인이었으나 게이츠가 바라던 것 만큼 기술에 대해 열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이츠는 경영을 떠난 뒤에도 이들과 아직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봄 '레번'이 결혼할 때 게이츠는 그의 들러리를 설 정도였다.
자기에 반격하는 직원을 존중
게이츠는 신제품에 착수할 때 엔지니어링과 마케팅부문에서 약 10명을 선발하여 팀을 구성한다. 목표를 설정한 다음 일을 분담하고 매 2주마다 모아 문제해결을 토의 한다. 이때 게이츠는 엄포를 놓을 기회를 갖는다. 최근의 한 회의에서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고 개발책임자가 특정한 소프트웨어의 특징을 코멘트하는 것을 듣고 "당신 농담 하는 것 아니오?"라고 쏘아 붙이면서 해직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과는 개발책임자의 뜻대로 돌아 갔다. 그는 회의때마다 직원들을 호되게 몰아 붙이는데 이것을 되받아치지 않으면 그의 존경을 잃고만다. 그래서 이것도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윈도우'의 경우와 같이 게이츠는 미래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게이츠는 적은 레이저 디스크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저장하기 위한 기술인 CD롬 기술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계에서는 이런 시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경쟁자들중에는 게이츠가 컴퓨터과학의 학위가 없기 때문에 비전이 매우 흐리다거나 지식의 폭이 좁다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평은 웃어 넘기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기술에 대규모의 연구노력을 집중해 왔다. 지난 3월초에는 문서처리 소프트웨어와 사전, 시소러스, 지역우편번호부 및 바렌의 '일상 인용문'을 함께 묶은 3백 달러의 프로그램을 첫번째 제품으로 선을 보였다.
사람들은 심한 경쟁이나 실패를 한 경험이 없는 게이츠가 큰 곤경에 부딪히며 견뎌낼 수 있을까하고 걱정을 하지만 당사자는 "IBM이 윈도우를 채택한 현재로서는 가까운 장래에 곤경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태연한 자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1천5백명의 종업원들의 평균연령은 게이츠와 마찬가지로 31세이다. 젊은 기업의 장점은 여러가지 있겠으나 우선 이들은 장시간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이츠는 이 기업의 수석 전략가로서 광범위한 생산개발 노력을 직접 감독하고 규칙적으로 그의 최고 경영진들과 만나는데 주말에 만나는 일이 흔이 있다. 그는 주말에도 아침부터 밤중까지 일하는 경우가 흔이 있으며 본시 어렸을 때부터 일밖에 모르고 지내온 게이츠는 휴가의 즐거움을 모른다.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사 본부에서 14분이면 닿을 수 있는 75만달러 짜리의 호화주택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다. 9m 길이의 인도어 풀에서 수영을 즐기다가도 틈만나면 눈아래 펼쳐진 워싱턴호를 내려다 보면서 사업구상에 잠긴다.
한편 마이크로소프사 종업들은 언제나 가족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다. 피크닉과 파티는 심심치 않게 열리고 이웃에 있는 헬스 클럽은 회사부담으로 무상출입의 혜택이 주어지고 있다. 미리 예정된 회의를 제외하면 프로그래머들은 자기가 정한 시간에 출근하면 된다. 프로그래머들이 다른 기업보다는 다소 급여가 적어도 회사의 장래성에 대한 기대에 차있다. 거의가 주주인 이들은 최근의 주가상승으로 모두 느긋한 기분이 되어 있다.